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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19) (119/268)

119. 현하빈, 학교를 나가다. (2)

강태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확인 중이었다.

“채남매가 수업을 하는 시간이 이 날과, 이 날. 그리고 현하빈이 성공적으로 학교를 나오려면…….”

채남매와 피데스, 현하빈이 모두 없는 날을 노리는 방법.

사실 채남매의 수업참여 날을 피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학교에 잠깐만 머물며 특강 정도만 하고 솔라리스 본부로 돌아가곤 했으니까.

물론 예전에는 하빈이를 보러 함께 점심을 먹거나 저녁을 먹거나 하면서 더 많이 머물기도 했지만 이제 학교가 한 번 뒤집어졌으니 한동안은 사람들 눈을 의식하느라 이제 학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채지세가 월화목, 채지석이 월수목 수업이니까, 결국 금요일이 비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채남매는 금요일에 출근하지 않는다.

‘다음은 피데스.’

피데스 또한 바쁜 몸이었다. 평일에는 학교에 머물렀지만 학생들이 하교하고 나면 돌아가서 밀린 SPES 업무를 처리했고, 주말에는 던전 공략이나 범죄 소탕 작전 등을 했다.

그러나 평일 수업 시간대에는 언제나 학교를 지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도저히 빈틈이 없어서 의아할 만큼.

‘그래도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겠지.’

SPES의 존폐가 위험할 상황이 되거나 비상사태가 터진다면 결국 달려 나갈 것이다.

‘그럼 남는 건 현하빈.’

현하빈은 평일 동안엔 기숙사에서 뒹굴거리며 드라마 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학교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을 좋아해서 거기서 영화를 빌려보거나, 도서관에 있는 학생들 틈에 끼어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웹소를 대여해서 읽기도 한다고 들었다.

침대도 안락하고 급식이 맛있었기 때문에 하빈의 입장에서는 이런 꿀 같은 장소에서 즐길 거 다 즐기고, 방구석에서 드라마나 정주행하는 것이었다.

이게 문제였다.

‘현하빈, 학교를 벗어나지 않네…….’

이게 다 학교가 너무 좋은 탓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갑자기 안 좋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갑자기 급식을 안 좋게 바꾼다거나 갑자기 도서관을 폐쇄시키면 너무 티가 난다. 그럴 명분이 없기도 하고.

‘그래도 현하빈은 주말마다 꼬박꼬박 학교를 나와 놀러 다녔지.’

노래방, 영화관, 피씨방, 보드게임카페와 방탈출 카페까지 섭렵하며 알차게 놀러 다니던 현하빈.

사실 주말에는 피데스도 채남매도 현하빈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마이너 패치가 일을 벌이기에는 주말이 가장 쉬웠다.

하지만 주말에는 다른 학생들도 학교에 없다. 평일이라면 모를까, 주말까지 기숙사에 남는 인원은 적었다. 다들 십 대다 보니 본가를 방문해 부모님을 만나고 오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라타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가장 많은 평일에 일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근한 사람들과 등교한 학생들이 가장 많은 타이밍에.

그러니 평일에 주요 인물들을 빼내야 한다.

피데스를 평일에 빼낼 방법이야 많았다. 이미 그 부분은 마이너 패치가 공을 들여 여러 방안을 준비해 두었다.

‘그냥 금요일에 일 쳐. 그날 채남매 없잖아. 피데스 빼내는 건 나한테 맡기고.’

‘다섯 번째’가 답답하다는 듯 참견했다. 그러나 강태서는 그에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현하빈도 빼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나름 그동안 수많은 시도를 했었는데.’

강태서도 그동안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현하빈이 학교를 벗어날 수 있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제스처를 상당히 많이 취했다.

‘자.’

‘어? 대박. 이거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이잖아! 이렇게 많이?’

‘난 갈 일 없으니까 알아서 써.’

저번에는 놀이공원 티켓을 줬다.

그리고.

‘자, 여기 영화 티켓. 오다 주웠어.’

‘태서야, 그런 거 함부로 주우면 안 돼. 주인을 찾아줘야지.’

‘……농담이야.’

‘앗! 그럼 잘 쓸게! 고마워!’

사람 눈 피해 영화관 티켓 이용권도 줬다. 일부러 평일 시간대로 고심해서 골랐다.

‘이 정도 유혹이면 학교 땡땡이치고 놀이공원이랑 영화관 가겠지.’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현하빈은 평일이 아닌 주말에 놀이공원을 다녀왔다.

‘고마워, 태서야! 애들 데리고 놀다 왔어!’

‘아, 그리고 영화 티켓은 환불받고 주말로 바꿔도 돼? 룸메도 보고 싶대서.’

현하빈은 전부 주말에 외출 일정을 잡았다. 아마 다른 학생들도 주말에만 쉬기 때문에 누군가와 같이 가려면 그렇게 빠지는 모양. 어쩌면 평일에 나가는 것 자체가 싫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서 결국 강태서는 좋은 시기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된다면…… 마지막 방법이 하나 남았지.”

태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화면에는 대문짝만 하게 이벤트 팝업 배너가 떠있었다.

<제 3회 뮤즈레 문화예술대축제>

‘이거다!’

현하빈은 분명 네풀릭스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여기서는 현하빈이 좋아하던 네풀릭스 새 시즌에 대한 깜짝 발표회와 상영회, 배우 내한 사인회, 감독 인터뷰가 열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금요일 평일 오전부터 한다는 점이다.

현하빈이 이걸 빠지지 않게 하려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강태서는 드라마 담당 과목 선생님에게 상영회와 사인회의 맨 앞좌석 티켓들을 건넸다.

“……어쩌다 생겼는데, 학생들을 데리고 단체 관람을 하고 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머, 세상에. 이거 구하기 엄청 힘든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뛸 듯이 기뻐하던 드라마 수업 선생님의 얼굴.

“학생들 데리고 수업대체로 다녀와야겠어요! 잘됐네요!”

수업대체.

그게 바로 강태서가 바라던 단어였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다 같이 가는 분위기라면 현하빈도 따라가게 되겠지.

“이날 네풀릭스 새 시즌 선공개랑 배우 내한 이루어진다는 점, 학생들에게 알려주면 더 좋을 것 같군요.”

“당연하죠! 역시 강태서 선생님은 학생들을 생각하시는 씀씀이가 남다르시군요! 학생들이 정말 좋아할 거예요!”

“…….”

드라마 교양 선생님은 강태서에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강태서는 그 눈빛을 슬쩍 피했다.

* * *

결국 다음 드라마 수업 시간.

“……그러니 이번 주 금요일에는 여기에 함께 다녀오면 좋겠네요!”

“와!”

뮤즈레 문화예술대축제 방문 소식에, 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거 티켓 진짜 구하기 힘들었잖아.”

“나도. 영영 못 갈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떡이냐?”

“나 설명 봤는데 배우들 사인회도 열린대.”

“이 수업 듣길 정말 잘했어!”

‘……엥? 뮤즈레 문화 어쩌고를 갈 수 있다고?’

그 소식을 들은 하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내가 티켓팅 실패한 건데!’

그랬다. 이 행사는 현하빈도 실패한 티켓팅이었던 것이다.

[티켓팅이 무어냐?]

‘거기 가려면 입장권이 필요해, 잘잘! 그 입장권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단 거지!’

[호오, 지난번에 컴퓨터 켜놓고 계속 시계를 보며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그 일이 바로 이것이었느냐?]

‘오, 김잘잘. 꽤 기억력이 좋은걸? 맞아! 바로 그거야. 하, 플미 붙은 거라도 사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갈 기회가 생기다니. 이건 운명이야, 운명!’

[그게 뭐 그리 좋은 거라고 그러느냐? 별로 대단치도 않아 보이더만…….]

관심이 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 아헤자르. 그러자 하빈이 덧붙였다.

‘여기 웹소랑 웹툰 부스도 있는데?’

[아니?! 뭣이?!]

아헤자르는 빛의 속도로 팸플릿을 훑었다. 축제에는 따로 입장해서 관람하는 상영관도 있었지만, 가장자리에는 웹툰과 웹소 관련 부스들이 한가득 있었다. 그중에는 아헤자르가 좋아하던 인기 작가의 작품들도 있었다. 그걸 확인한 아헤자르가 곧바로 외쳤다.

[가, 가야 한다! 아니 이 좋은 걸 왜 진작 말 안 해줬느냐!? 꼭 가야 한다! 반드시 가야 한다!]

‘이것 봐. 내가 말했지? 여기 진짜 재밌을 거라니까?’

[작가 사인회도 가보고 싶다! 일찍 가서 사인도 받고 오자!]

‘흠, 그건 귀찮은데…….’

[가자, 가자!]

뭐, 잘잘이가 이렇게까지 조르니까 일단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 일단 가보자! 이번에는 정말 놓칠 수 없다고.’

무려 재밌게 봤던 드라마 배우들의 내한이라니!

‘게다가 각종 유명 영화 시사회랑 감독님들도 오신단 말이지……. 와, 명진홍 감독님도 오시네. 성도 명씨에 손대시는 것마다 명작만 만들어서 별명과 호칭이 모두 명감독이신 분이신데! 이분은 정말 실물로 뵙고 싶었어!’

하빈이 잔뜩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팔락팔락 안내서를 뒤적였다. 가보고 싶었던 곳도 가고, 동시에 학점 인정도 되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일이었다.

현하빈은 별 고민 없이 재빠르게 참가 동의서를 제출했다.

* * *

‘……됐어. 현하빈이 참가한다.’

마침내 현하빈의 참가 소식을 전달받은 강태서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까망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옹, 게옹.(이 인간, 평소 하는 일을 보면 대체 무슨 직업인지 알 수가 없다.)

놀이공원 티켓과 영화 티켓, 축제 티켓을 찾아보러 다니는 관리자의 사도(칼리고 수장 겸직).

까망이는 한심하단 표정을 하며 스윽 책상 위를 가로질렀다.

‘이대로면 금요일에 현하빈과 채남매가 빠지게 된다.’

만에 하나 수틀려서 현하빈이 마음을 바꿔 금요일에 학교를 나가지 않는다거나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

그럴 때를 대비해 세워 놓은 계획도 있고, 일이 터진 후에 수습하는 방안도 있지만. 지금은 강태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일 테다.

강태서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이너 패치와 연결용으로 마련해 둔 세컨 폰을 집어들었다. 정말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한다는 듯 잔뜩 굳은 표정이 찰나 스쳐 지나갔다.

* * *

“……음? 날짜 정했다는데?”

강태서의 연락을 확인한 다섯 번째 사도의 말에, 네 번째가 게임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이번 주 금요일.”

“빠르네? 첫 번째도 참. 이제껏 미적거리더니 왜 갑자기 또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지?”

네 번째가 의아하단 듯 말을 끌었다. 다섯 번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들 알겠어? 어쨌든 금요일에 맞춰 피데스까지 밖으로 빼낼 예정인 모양이니 우리도 준비해야지.”

다섯 번째가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번째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튼 첫 번째, 항상 지 편한 대로만 굴지? 채남매는 그렇다 치고, 피데스를 갑자기 금요일에 자리 비우게 할 수 있으려나?”

그들이 지켜본 바로도 피데스는 평일 내내 학교에 머물렀다. SPES에 가벼운 일이 생겨도 대리인이나 원격 근무로 처리하곤 했다. 혹시나 뭔가를 알고 머무르나 싶을 정도로 빈틈이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대체 피데스는 무엇 때문에 학교를 지키지? 설마 정보가 새지는 않았을 테고.’

어쩌면 ‘에라타’가 사사건건 노리는 예언자가 피데스일지도 모른다. 뭔지 몰라도 학교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을까?

교장까지 맡은 차에, 단순히 학교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섯째는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 낄낄 웃었다.

“뭘 걱정해? 피데스 나으리쯤이야, 언제든 학교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지.”

철컥, 철컥.

구석으로 걸어간 다섯 번째는 검붉은 빛이 번뜩이는 아이템을 정리했다. 딱 봐도 한참 위험해 보이는 아이템들.

이건 모두 특수 제작된 폭탄들이었다. 일반적인 폭탄이 아닌, 제작 스킬과 희귀 재료를 사용해서 엄청난 위력으로 가중시킨 폭탄.

그걸 쓸어보던 다섯 번째가 음산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리 피데스라지만 SPES 본부가 테러당하는데 지가 안 튀어오고 배길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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