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현하빈, 학교를 나가다. (1)
교칙 위반 걱정하지 말라고? 직접 허락한다고?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람.
‘젠장.’
하빈은 눈을 굴렸다. 안 그래도 학생들은 옹기종기 모여 하빈의 실력을 보기 위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 언니가 핫게시판을 달군 그 언니지?’
‘컨티뉴의 후계자라던데.’
‘컨티뉴는 제작계로 유명하잖아? 근데 실전 능력도 좋은 거야?’
‘대박 사건!’
“…….”
‘하…….’
하빈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선생님이 재차 입을 열었다.
“A급이라 주변과 수준 안 맞을까 걱정해서 안 나서는 거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상대할 테니.”
“……!”
웅성웅성.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 말에 학생들은 더더욱 동요했다.
‘서, 선생님이 직접 상대한다고?’
‘선생님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A급인 거 빼박이네.’
‘뭔데? 나도 볼래!’
당연히 하빈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망해 가고 있었다.
‘아니 쌤! 너무하시네!’
남의 개인정보 이렇게 막 밖으로 뱉어도 되는 거냐고!
물론, 하빈의 썰들이 핫게시판을 한 번 점령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현하빈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A급 헌터인데 정체를 숨기고 F반에 왔다는 게 중론.
하지만 그게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실제로 공인되는 건 다른 문제다!
하빈의 기분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운동장에 놓인 훈련 아이템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켜둔 비상 알림등과 방어 아이템들.
“같은 A급이라 해도 서로의 경력과 스타일이 다를 테니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검술 선생님은 현역 A급 헌터로 활동하다 온 사람이었다. 보통 헌터고의 교사는 안정적인 공무원을 꿈꾸는 상위 각성자들이 많이 지원했다.
비록 월급은 적지만 던전 가서 고생 안 하고, 잘리거나 사고당할 위험도 없고. 퇴직하면 연금이 꽤 나오는 데다 나름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직업이다.
특히 울림국제고는 내로라하는 유명 헌터들을 많이 배출하는 명문 마법학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유능한 헌터들을 직접 제자로 키워낸다는 인맥과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울림국제고의 교원들은 꽤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F반을 가르치는 검술 선생님도 최소 A급 이상의 실력과 경력을 겸비한 헌터.
“그럼 대련을 시작할까?”
“잠깐만요, 전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하빈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주춤 물러섰다. 아헤자르가 지적했다.
[그냥 간단하게 보여주고 끝내면 되지 않느냐?]
‘잘잘이 너, 약한 스킬 없다며!’
저번에 연수원에서 써봐서 안다. 제일 약하게 해봤자 S급 스킬이었단 말이다.
‘그렇다고 스킬을 아예 안 쓰거나 대충 쓰는 건 저쪽도 알아차릴 텐데…….’
슈슉-!
“……!”
그때였다. 선생님이 하빈을 향해 예고 없이 검격을 날렸다.
“던전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없다! 그걸 기억해 두도록.”
하지만 하빈은 그 자리에서 미동 없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공격은 하빈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겁만 주려는 일격이었어.’
그 경로를 다 파악했기 때문에 하빈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우와, 방금 선생님 공격 봤어?’
‘난 보이지도 않던데.’
‘역시 선생님…….’
챙-!
이어서 쏟아지는 공격에 하빈이 검집을 살짝 틀어 공격을 막았다. 일부러 봐주려고 공격한 거라 전혀 타격이 없었다. 심지어 하빈이 든 아헤자르는 여전히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꽂혀 있는 상태였다. 하빈은 검집째로 공격을 막았다.
-챙, 채앵.
몇 번 더 이어지는 공격에도 하빈은 들고 있는 검집을 아주 살짝 틀어 막는 정도로 그쳤다.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아주 간소한 동작.
그걸 보고 선생님은 생각했다.
‘……검을 뽑을 시간이 없는 건가?’
아직도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다니.
‘검을 뽑는 동안 내가 공격할까 봐 그러는지도 모르겠군.’
결론을 내린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그래. 검을 뽑도록 기다려 주겠다.”
잔뜩 배려를 담은 제안. 하지만 하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네? 전 검을 안 뽑고 싶은데요…….”
‘이러려고 검집 만든 건데!’
검집째로 쓰려고 검집을 제작했는데 뭐하러 검을 뽑냔 말이다.
‘실수로 아헤자르의 날카로운 날에 선생님이 베여 봐, 아주 큰일 나는 거지. 큰일!’
이건 다 선생님을 최대한 안 다치게 하려는 하빈의 상냥한 배려였다.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가 있느냐?]
‘기억 안 나, 잘잘? 나 저번에 한번 일 친 적도 있잖아.’
[언제?]
‘마왕성에서 헤르밋인가 뭔가 하는 애’
[…….]
움직이다가 영 안 좋은 곳을 잘못 맞았던 금욕…… 아니, 색욕의 마왕.
‘그거랑 비슷한 일이 선생님에게 잘못 일어나기라도 해 봐, 얼마나 큰일이겠어!’
하빈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선생님은 나름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밖에 없다. 의욕이 과하게 넘쳐서 문제지만.
하빈의 실수로 앞길이 창창한 훌륭한 교사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기라도 한다면.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
이분도 가정이 있고 그동안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시간들이 있고, 교사로서 가진 신념과 자긍심도 있을 테고, 아무튼.
‘어쨌든 지켜드려야 한단 말씀.’
그러는 사이 검술 선생님이 재차 입을 열었다.
“검을 뽑으라니까. 뽑는 동안은 공격하지 않겠다.”
“잠시만요…….”
하빈이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검집을 살폈다.
“……으음, 어떻게 하더라?”
‘검을 뽑을 줄도 모르는 건가?’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했고.
[시간을 끄는 것이냐?]
아헤자르는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그리고 하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이참에 해볼 게 생각났어!’
[뭐기에?]
‘안 그래도 테스트를 어떻게 해봐야 하는지 걱정했는데. 이런 기회가 오다니!’
[테스트? 뭐, 무엇을 하려고 그러느냐? 그러니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어허! 저언혀 걱정할 게 아냐, 잘잘. 이걸 잘 보라구!’
하빈이 검집에 새겨진 달 문양을 건드리며 교과서를 읽는 영혼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 앗, 이.게.뭐.지? 이.렇.게 여.는 건.가?”
하빈은 어색한 대사와 함께 달 문양을 슬쩍 문지르며 그곳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슈욱.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아아-!
인지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들을 뒤덮는 수면 향!
맞은편에 있던 선생님은 물론, 그걸 지켜보던 학생들도 손쓸 틈 없이 수면 향의 범위에 둘러싸였다.
“……?”
무색무취의 수면 향.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곧바로 일어났다.
……기우뚱.
잠잠하던 와중, 갑자기 서 있던 학생들 중 누군가가 푹 쓰러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스르륵, 툭! 휘청, 쿵!
그걸 시작으로 다들 픽픽 운동장 바닥에 쓰러져 드러눕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동시에 훈련 및 대련용으로 미리 설치되어 있던 안전용 보호 아이템이 알림음을 냈다.
[충격 흡수를 실행합니다!]
덕분에 학생들은 아주 폭신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스르륵-쿵!
[충격 흡수를 실행합니다!]
“……쿨.”
대자로 운동장에 드러누워 잠든 선생님.
[세상에…….]
“좋아! 잘 먹히는군! 코난 작전!”
내 이름은 하난. 수틀리면 모두 재워 버리는 탐정이지!
하빈이 후훗, 하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헤자르가 기함했다.
[선생님이랑 학생들을 다 재워 버리면 어떡하느냐?!]
“다들 수업 시간에 낮잠 정도는 자봐야, 어? 인생 좀 살아봤다 하는 거라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
“원래 살면서 한 번쯤은 수업 시간에 조는 거거든? 안 졸아본 사람 아마 없을걸?”
어깨를 으쓱한 하빈이 검집을 돌아보았다. A급 헌터인 선생님조차 순식간에 재워 버린 수면 향의 위력이란!
‘할머니 최고예요! 성능 아주 확실하다구!’
아마 이 정도면 반품 안 해도 될 것 같다. 코니에게 좋은 품질의 물건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진 하빈은 상냥한 얼굴로 선생님과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들 숙면 취하세요! 꿈나라 굿나잇!”
[…….]
“…….”
“……드르렁.”
“……쿨.”
푹 잠든 사람들을 뒤로한 채, 하빈은 총총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빈의 은밀한 작전. 사실 그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가 하나 있었으니.
교장실 창밖으로 그걸 모두 보고 있었던 현시우와 네아이바였다.
“…….”
[…….]
운동장에 널브러져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 그리고 거기에 손 흔들고 자리를 이탈하는 현하빈의 경쾌한 줄행랑까지.
[지, 지금 선생님이랑 학생들 다 재운 거냐?]
“…….”
할 말을 잃은 현시우.
그 모습을 다 지켜본 그는 조용히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 나라도 수습하자.’
그렇게 하빈의 업적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수업 시간에 클래스메이트와 선생님 다 재워 버리기.
* * *
하빈은 기숙사로 총총 돌아왔다.
‘수틀리면 나도 몰랐다고 하면 장땡이라구.’
왜 갑자기 다들 잠들었는지 모르겠다며,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우지 못하고 홀로 빠져나온 척할 것이다.
아니면 본인도 깜빡 잠들었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서 줄행랑쳤다고 둘러대거나.
“흐음, 이거 보니까 수면의 지속시간도 설정할 수 있더라. 딱 쉬는 시간 즈음에 깰 수 있게 설정했는데 그게 잘 먹힐지 모르겠다. 그것까지 보고 올 걸 그랬나?”
뭐 어차피 그건 다음에도 또 확인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어? 언니 수업 벌써 끝났어?”
마침 기숙사에 있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지금 검술 수업 시간…… 아, 아하! 땡땡이쳤구나?”
서윤은 지금 듣는 수업의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휴강을 해서 수업이 빈 상황이라 기숙사에 있던 참이었다.
“서윤이도 방에 있었네? 그럼 같이 매점 가자, 매점!”
“매점?”
“매점은 수업 시간에 가야 널널하단 말씀!”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하빈은 교내 매점을 알차게 잘 이용했다.
수업 시간에 매점을 이용하는 건 상당한 고난이도였지만, 하빈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애들 수업 들을 때 슬렁슬렁 다녀오면 된다구!’
하빈의 수업량은 다른 학생들의 반도 안 되기 때문에 수업을 안 듣는 시간, 즉 공강이 넘쳐났다.
그래서 매점을 쟁탈하기 위해 굳이 힘을 뺄 필요도 없었다.
“크, 역시 오늘도 이 시간엔 사람 없네!”
줄 없는 매점을 보며 하빈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것이 바로 땡땡이의 특혜라는 거다. 학생들이 빡세게 수업 듣고 있을 때 여유를 부리며 매점을 들락거리는 게 하빈의 일과.
“학생! 또 왔네! 오늘은 뭐 살 거야?”
“디핀더트 구슬 아이스크림이요! 솜사탕맛으로요!”
하빈이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카드를 꺼냈다.
‘김잘잘, 이것 봐. 여긴 무려 구슬 아이스크림을 팔더라고!’
다른 아이스크림 종류들도 다 잘 먹는 하빈이었지만 구슬 아이스크림은 조금 더 특별했다.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거 찾기 힘들어서 편의점 뒤지거나 놀이동산 같은 데 가야 먹을 수 있는 건데. 학교에서 팔다니 개꿀.’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으면 알갱이들이 사르르 녹는 독특한 식감!
신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하빈은 그다음 주문을 했다.
“그리고 빵은 앙버터요! 앙버터 남았어요?”
차가운 것만 먹으면 속이 상하니까 빵도 먹어 줘야 하는데.
하지만 그 물음을 들은 매점 사장님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어쩌지? 앙버터는 아침에 다 나가고 없는데…….”
“네에?”
“알다시피 그 빵은 기성품이 아니라 급식실에서 매번 만들어서 납품하는 거다 보니까 받을 수 있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대신 다른 빵은 어떠니……?”
“이럴 수가!”
충격적인 소식에 하빈이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나라라도 잃은 듯 허망한 표정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 역시 강태서한테 빵 받아올 때가 좋았어. 역시 갓태서. 좋은 빵을 알아서 잘 챙겨주던 좋은 친구였는데!”
그 혼잣말을 듣던 서윤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결국 빵셔틀 맞잖아……?’
“후우,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 못 그러는 게 너무 아쉽다.”
“…….”
* * *
한편. 그 시각.
현하빈이 찾고 있던 강태서는 마침내 컴퓨터 화면을 보며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게웨에용?(뭐냐? 내 새로운 간식을 찾은 것이냐?)
꼬리를 살랑거리는 까망이의 물음에 강태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화면에 뜬 팝업 창에 적힌 이벤트의 날짜와 시각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다.
‘이거면 현하빈은 다음 주 금요일에, 무조건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어.’
강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