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13) (113/268)

113. Unboxing (2)

“에휴, 언박싱이나 하자. 지친 사회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건 역시 택배 언박싱!”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하얀 상자를 품에 안았다.

상자에는 은으로 된 장식들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하얀 몸체를 배경으로 은빛 달이 빛나는 디자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예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경호원이 설명을 했다.

“그 어떤 충격과 흔들림에도 안에 있는 아이템을 지켜내도록 만들어진 특수 상자랍니다.”

그 말에 하빈이 눈을 빛냈다.

“오, 그럼 여기 음식 같은 거 넣어도 뒤집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겠네요!”

“네? 어…… 넵, 그렇죠.”

“이 상자도 저 주는 거죠?”

“네…….”

“그럼 간식 상자로 써야지! 특히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 넣으면 뒤집어져도 안 뭉그러질 테니 딱이겠어!”

“…….”

‘이 상자를 케이크 담는 데 쓰시겠다니…….’

비록 상자였지만 나름 컨티뉴의 고도의 기술력과 특급 노하우가 들어간 최고급 아이템이었다.

“아마 이걸 간식 상자로 쓰시는 건 최초실 것 같은데요.”

“엥? 그럼 다들 어디다 써요?”

“집에 전시하거나 모셔 두는 분도 계시고, 다른 귀중한 아이템을 보관하는 용도로도 쓰시죠.”

“에엥? 집에 모셔 놓다뇨? 이런 실용성 있고 소중한 아이템을 집에 가만히 냅두는 건 자원 낭비라고요!”

간식 상자로 쓰는 게 상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빈은 그럼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상자는 검집 하나가 들었다기에는 가로 폭도 세로 폭도 무척 컸지만, 인벤토리가 있는 데다 힘도 센 하빈이 들고 다니니까. 크기 따위는 문제 되지 않는다.

하빈은 달칵, 하고 상자를 열었다.

“어?”

열면 바로 검집의 모습이 보일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상자 안에는 조심스럽게 포장된 부드러운 포장지와 클리닝 약품, 천, 보증서 등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검집도 비단처럼 사르르한 질감의 천으로 꽁꽁 감싸여져 있었고 말이다.

“……와.”

역시 이름있는 제작 브랜드는 포장부터 정성스럽다는 건가. 어느 하나도 허투루 짜인 게 없었다.

하빈은 검집을 감싼 천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그러자 스륵 하고 천 사이로 마침내 새하얀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아헤자르가 먼저 감탄을 흘렸다. 새하얀 검집에는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처음 부탁한 대로 깔끔하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조잡한 장식 하나 없지만 모양과 선에서 설명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검의 손잡이와 검집이 맞닿는 곳보다 조금위, 그곳에는 은으로 양각된 달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은을 쓴 것이 아닌지 희미하게 푸른빛이 돌았다.

자개로 만들어져 그런지 검집의 하얀 몸체를 자세히 보면 푸른빛을 받쳐 주는 희미한 무지갯빛도 드러났다.

반사하는 방향에 따라서 오묘하게 여러 빛깔을 비쳐 주지만, 조잡하기는커녕 기가 막힌 조화를 보여주는 하얀 검집.

“원래 검이 하얀색과 푸른색 조합이라 하셔서, 그에 맞게 제작되었습니다.”

하빈이 검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은으로 양각된 달에 머문 것을 확인한 경호원이 말했다.

“특히 이번 검집을 만들 때 코니 님께서는 ‘달’에 영감을 받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스페키 진주조개를 주재료로, 그리고 달빛과 관련된 아이템들을 부재료로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달이요?”

“그, 현하빈 님의 이름을 듣고 생각난 게, 달이었다고 하셨습니다. ‘하현’이 한국에서는 달의 이름이라면서요?”

하현달.

거기서 영감을 얻었던 모양이다. 하빈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한국어까지 잘하실 줄이야…….”

“원래 코니 님은 주문자의 이름이나 특징에서 따 온 무언가를 추가하는 걸 즐기시거든요. 그것도 깜짝 옵션으로요.”

“따로 이리저리 사전을 뒤져 보시면서 고심하셨을걸요?”

곁에 있던 다른 경호원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 달하고 관련된 옵션이 있다는 거죠?”

“네. 물론 자세한 부분은 설명서를 보시면 더 잘 아실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원하실 때 발광 효과를 내실 수 있습니다.”

“오, 무드등 옵션!”

“…….”

원할 때 끄고 켤 수 있는 휴대 무드등이 추가되었다.

“그게 다예요?”

“엄……. 그리고, 달이라는 건 밤에 잠들 때 뜨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옵션이 또 있다고 합니다. 이건 혹시 모르니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경호원이 동봉된 설명서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듣는 귀가 많은데 귀중한 옵션에 대해 마음껏 떠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코니에게 가장 신임받는 이들이라 해도 이 아이템은 기본적으로 고객을 위한 무기.

자칫 잘못하면 비장의 무기나 약점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니까.

하빈은 실링으로 동봉된 설명서를 집어 들었다. 설명서 또한 코니가 직접 쓴 자필편지로 되어 있었다. 하빈은 그 중간 부분을 읽었다.

-……달은 모두가 잠들 때 뜨는 거니까요, 이 검집에는 원할 때 언제든지 수면 가스를 퍼뜨리는 효과가 있답니다.

“……!”

-웬만한 상태저항도 뚫을 정도의 강력한 수면 향이니 참고해 주세요. 단, 아이템 사용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답니다. 때로 너무 강한 헌터에겐 힘 조절이 어려워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고 종종 들었던지라…… 상대와 싸우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넣어봤어요.

“세상에!”

하빈이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코니 님, 진짜 센스 넘치시잖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그동안 때리고 묶을 때 힘 조절하느라 정말 어려웠던 하빈의 슬픈 과거들이 눈앞을 스쳐지나 갔다.

이거라면 싸울 필요 없이 다 재워 버릴 수 있다!

“좋아! 코난 작전 가능!”

“……?”

사실 ‘웬만한 상태저항을 뚫는 수면 향’은 그 자체가 엄청난 기능이었다. 랭커를 재울 정도의 수면 향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희귀 옵션.

“듣자 하니 여러 잡다한 기능을 넣기보다는 검집의 본질에 충실하려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저희가 돌아가고 난 뒤 제대로 확인해 보시면 좋으실 것 같아요.”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 대화를 나누면 다른 사람들이 더 궁금해하거나 섣부른 추측이 덧붙여질 수도 있으니, 저희는 이 정도만 하고 물러가 보겠습니다.”

“원래 하려던 건 검집을 전달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척척척 자리에서 일어서며 방음 아이템을 회수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훈련받은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갈 채비를 한 그들을 하빈이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넵. 혹시 더 필요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검품 과정을 더 도와드릴까요?”

고객과 아이템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일부러 일찍 나서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 고객은 함께 물건의 하자와 기능을 꼼꼼히 봐주길 바라는 고객도 있었다. 그런 경우인가 싶어 경호원이 하빈을 돌아보았다.

“있죠. 정말 중요한 사항이.”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검집과 박스를 향해 있는 시선을 보아하니, 제품과 관련된 일인 모양.

“뭡니까?”

혹시 너무 빨리 일어섰을까. VIP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안 그래도 배달하러 왔을 때부터 현하빈은 여러 이유로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이러다간 고객 만족도 점수에서 마이너스다!’

경호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A/S 기간은 언제까지죠?”

“예?”

“무상보증 수리기간이요.”

“어, 아! 그, 그게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는 듯 경호원들이 버벅였다.

‘우, 우리 A/S 수리기간 얼마나 되었지?’

‘그런 거 없을 텐데? 한 번 구매하면 쭉 케어해 주잖아.’

‘그럼 평생인가?’

‘평생이지!’

‘빨리 평생이라고 말씀드려!’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경호원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펴, 평생……! 평생입니다. 무상 A/S!”

그 말에 하빈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예쓰! 역시 컨티뉴야. 평생 무상보증이라니!”

클라스가 다르다! 이래서 브랜드를 따져서 구매를 하나 보다. 하빈은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만족하신 건가?’

경호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하빈이 말을 이었다.

“교환 반품 가능일은 구매일로부터 며칠인가요?”

“예? 아, 7일 이내에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나중에 A/S 받으실 때는 개런티 카드를 가지고 킬스크린에 오시거나 저희를 불러주시면 되는데요……. 저희 카드 있으시면 킬스크린 출입허가는 바로 나실 것 같고…….”

“앗! 그리고 여기, 이 화분은 물을 몇 번 줘야 하죠? 그리고 지금 가져다 주신 케이크, 유통기한이 안 적혀있는데…….”

“헉!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죄송합니다.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자고로 제품의 A/S 기간과 케이크 유통기한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르르 쏟아지는 현실적인 질문에, 경호원은 그 후로도 한참 현하빈에게 붙들려 설명을 계속해야 했다.

* * *

마침내 경호원들이 방 안을 빠져나간 뒤.

“서윤아! 같이 케이크 먹자!”

하빈은 결국 서윤과 함께 기숙사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는 워낙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으로 족발을 시켜 먹었던 그들은 지금 후식을 위해 코니가 보내 준 케이크를 뜯고 있었다.

“헉, 언니! 이거 엄청 맛있어!”

케이크를 입에 넣은 서윤이 놀라 소리쳤다.

-삐이! 삐이이!

옆에서 냠냠 케이크를 파먹던 리베도 감격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였다. 리베는 얼굴에 생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채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리베도 마음에 드나 보네?’

어디 거길래 이렇게 맛있지?

하빈은 케이크에 적힌 상표를 보았다.

-로즈슈가

“어? 이 케이크, 로즈슈가에서 만든 거잖아?”

상표를 확인한 하빈이 눈을 빛냈다. 로즈슈가는 일반적인 디저트 가게가 아니었다.

‘게이트의 시대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맛을 지향합니다!’

로즈슈가는 지구상에 있는 식재료를 베이스로, 던전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독특한 식재료를 섞어 썼다.

‘던전에서만 서식하는 팝팝베리를 넣은 컵케이크랍니다. 달콤한 과즙이 입에서 팡팡 터져요!’

오로지 던전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귀한 식재료를 조합해 만드는 특별한 디저트. 그래서 가격이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판타지 웹소를 보면 던전이나 다른 차원의 식재료로 요리해서 대박 나는 주인공이 있었던 것 같고?

[정확하다! 얘기할 공통 화제가 생겨서 본인은 몹시 기쁜…….]

‘다시 들어가자, 잘잘아.’

어쨌든, 로즈슈가는 그것의 실사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언니, 진짜 아니라는 거지?”

“에이, 진짜 아니야. 코니 님이랑은 정말 고객과 사장님의 관계라구. 아깐 장난친 거라니까!”

“……으, 응.”

서윤은 보드라운 생크림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치고 케이크도 주문제작이던데…….’

VIP 고객이면 이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건가?

서윤이 홀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마침 케이크를 다 먹은 하빈은 가장 먼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끄응, 이제 검집을 마저 봐야지.”

경호원들이 놓고 간 오늘의 주인공. 아헤자르의 검집.

비록 대략적인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사항들은 모두 비밀 유지를 위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건 여기 적혀 있겠지.’

하빈은 코니의 자필 설명서를 마저 읽었다.

‘검집의 본질에 충실하려 했다고?’

경호원은 분명 나가기 전에 이 검집은 자잘한 기능보단 검집 자체의 본질에 충실하려 한 아이템이라고 설명했었다. 마침 하빈이 읽고 있는 코니의 설명서에도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견뎌내는 것, 그리고 시선을 자연스럽게 흩트리는 것. 그 두 가지에 집중했습니다.

‘최대한 견뎌내는 것.’

과연 아헤자르의 힘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긴 그게 가장 커다란 난제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상 수리 기간을 물어본 거란 말씀!’

하빈이 휘두를 때마다 혹시나 너무 강한 힘 때문에 검집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 끼워 보자.”

하빈은 아헤자르를 꺼냈다. 이제껏 철검으로 위장되어 있던 아헤자르. 하빈이 손을 올리자 스르륵 하고 원래 아헤자르가 가졌던 우아한 본모습이 드러났다.

-삐이.

그걸 보고 리베가 감탄한 듯 주변을 서성거렸다. 반짝거리는 우아한 아헤자르의 모습이 리베가 보기에도 꽤 멋있었던 모양.

[역시, 이 녀석도 보는 눈이 있다.]

‘흐음. 그러게. 이렇게 멋진 생겼는데 그동안 평범하게 둔 게 좀 아깝긴 하네.’

앞으로는 아헤자르의 멋진 모습을 보여줘도 될 것 같았다……가 아니지.

‘그래도 최대한 싸울 일은 없어야 한단 말씀!’

[이잇! 그럼 대체 언제까지 이 몸을 썩힐 셈이냐!]

‘아, 잘잘! 너도 방구석에서 웹소 보는 게 싸우는 것보단 재미있을 거 아냐! 평화롭고!’

[싸움은 재미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스릉.

그 순간 하빈은 새로 받은 검집에 아헤자르를 끼웠다.

[……!]

찰칵.

빈틈없이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맞물리는 검집과 아헤자르.

“와…….”

그 광경을 본 하빈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보기보다 더 물건인데?’

* * *

한편.

코니가 보낸 경호원들로 인해 놀랐던 건 현하빈뿐만이 아니었으니.

“컨티뉴에서 프러포즈를 했다고요?”

“그게 프러포즈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대형 이벤트를 했다는 이야기가…….”

그 소식을 듣고 괴상한 표정을 짓는 현시우.

그리고.

-게에옹?(진짜 손녀냐?)

“이 무슨…….”

‘현하빈, 같이 학교 다닐 땐 그런 말 없었는데……?’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강태서.

‘손녀 아니잖아! 내가 두 사람 서로 처음 소개해 준 건데?’

진상을 다 아는데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하는 채지석까지.

그들은 긴급 교무 회의를 하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