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12) (112/268)

112. Unboxing (1)

“……후후,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네.”

그 시각, 킬스크린의 컨티뉴.

그 중앙에 위치한 제작계 헌터 ‘코니’의 비밀 공방.

“지금쯤 화내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똑똑한 아이니 내 의도를 파악했을까?”

“화내다뇨? 이건 누가 겪어도 감동받거나 좋아해야 할 상황 아닌가요.”

코니의 곁에 있던 비서가 차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비서가 덧붙였다.

“애초에 전 코니 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들 현하빈을 코니 님의 혈육이라 오해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현하빈 측에서 코니 님을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코니 님의 이름을 대고 사기를 친다거나.”

“그럴 애는 아냐.”

“코니 님, 주제넘는 조언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코니 님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코니가 인상을 썼다.

“……쉽게 믿긴, 그 반대라네.”

그녀는 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 나이 먹으면 너무 잘 보여서 탈이지. 믿어서는 안 될 사람,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될 사람. 그런 게 벌써부터 보여서 사람을 지레 밀어내게 돼.”

코니의 고객 선별 조건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범죄 집단과 관련된 헌터에게는 절대로 물건을 팔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길드가 있으면 바로 계약을 해지했다.

게다가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수준의 VIP가 아니면 특별 주문제작은 안 받는다.

“처음 그 녀석의 제작 의뢰를 받아 준 것도 솔라리스의 부길마가 보증을 선 덕분이지.”

채남매는 코니가 가장 신뢰하는 헌터 중 하나였다. 그녀의 기준으로 신념은 물론, 사람을 보는 눈까지 뛰어난 게 채남매였다.

그 남매가 데려온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겠다는 판단 하에 현하빈의 주문을 받았던 것.

“이해합니다. 저라도 솔라리스의 소개라면 한 번쯤 믿고 VIP대우를 해줄 수는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비서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지금 현하빈에게 하시는 대우는 VIP 그 이상이시죠.”

지금쯤 하빈의 숙소에 도착했을 코니의 사람들. 그리고 선물들.

아무리 VIP라고 해서 이런 특별 이벤트를 공들여 해주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코니는 이렇게 특정 누군가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비서는 그동안 코니가 현하빈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 걸 보고 의아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 고객에게 그 정도로 특별한 뭔가가 있었습니까?”

아무리 채남매의 소개라 해도 실상은 무명 A급 헌터다. 코니가 특별히 관리할 만한 고객은 아니었다.

“아니면 혹시…….”

비서는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 제자분을 닮으셔서 그런 겁니까?”

코니는 분명 첫 만남 때 하빈에게도 이야기한 적 있었다.

자신이 아끼던 죽은 제자와 닮았다고.

코니가 고개를 저었다.

“닮은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 절대 아니지.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던가?”

“……아니시죠.”

코니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조심스레 갈무리해 둔 편지 더미를 쳐다보았다.

“나도 원래 편지를 오래 주고받을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로 그럴 예정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그래도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죠!’

‘여기 면세 되는 거 확실한가요?’

유쾌하다 못해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질문들과 알사탕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앗, 감사합니다! 마침 당 떨어졌지 뭐예요! 센스 있으셔.’

사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코니는 그런 무해한 웃음을 마주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녀의 주변에 다가오는 인간은 모두 헌터였다. 그것도 생사를 오가는 싸움이 일상인 헌터, 야망을 가지고 계산을 하는 헌터, 무거운 신념과 부담을 가진 헌터.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코니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헌터들을 응원했다. 때로 일부러 코니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헌터들까지도 코니는 기껍게 받았다.

‘나에게 잘 보여서라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 모양이지. 참 열정적이군.’

혼란한 세계에서 패권을 지키려는 랭커들, 혹은 뒤집으려는 랭커들. 그리고 인명을 구하려는 헌터들.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사투 사이에서, 코니는 매번 그에 맞는 대응을 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굴리며 치열하게 달렸다.

‘이번 아이템이 부디 다음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요.’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런 옵션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고객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이번 재료, 반드시 우리 공방에 가져와야만 하네. 경매장에 올라온 물건 모두 두 배를 불러서라도 가져오도록 하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제작 회의와 고뇌 속에서 코니는 빡빡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예전에는 그 틈으로 짧은 휴식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코니 님! 당 떨어졌을 텐데 사탕 하나 드시는 거 어때요? 앗, 혹시 당뇨가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한번 먹어보지요.’

‘헤헤. 코니 님이 내가 드린 사탕을 드셨어!’

한때나마 잠시 가르쳤던 훌륭한 조수이자 제자. 제자는 찹쌀떡처럼 코니의 곁에 붙어 그날의 일을 조잘거리곤 했다.

‘코니 님, 저번에 방패 아이템을 가져가셨던 고객님이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셨어요!’

‘저희가 또 누구 한 명을 구한 셈인 거예요. 맞죠?’

‘우와, 이번에 드렸던 아이템은 제가 제안한 반사 옵션이 들어갔었는데. 그것 덕분에 공략에 결정적인 기여가 되었대요! 크으, 그럼 저도 기여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던전 공략에 기여한 거죠! 저희가 또 세상을 구했어요!’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바쁜 와중에도 옆에서 떠드는 내용들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말이죠, 저쪽 약초농장에 심어 놓은 재료가 싹을 틔웠대요. 그쪽 담당하고 있는 친구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오늘은 부모님께 연락이 왔는데요, 학교에 갈 생각 없냐고 또 잔소리를 하시더라고요. 전 학교 안 다녀도 여기서 배울 건 다 배우는데. 귀찮아요…….’

‘제가 헌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그러시기도 하고.’

‘코니 님은 아침 뭘로 드셨어요? 저는 오늘 훈제연어 남은 걸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는 물론, 그날 식사나 어젯밤 꾼 꿈까지 떠들던 조수.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천진한 그녀 옆에는 어딜 가나 웃음꽃이 피는 모양이었다. 공방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애를 좋아했으니.

코니도 또한 그런 일상의 이야기를 듣는 걸 즐겼다. 너무 조용할 때면 ‘오늘은 왜 아무 이야기도 안 하지?’라는 생각에 넌지시 묻게 되기도 했다.

‘오늘은 별일이 없었나요? 말이 없군요.’

‘엇, 제 이야기 기다리고 있으셨어요? 오늘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면요…….’

언제까지고 그렇게 평온할 것 같던 하루가 무너진 건 그 아이가 킬스크린에 도전하겠다고 말했을 때였다.

‘별일 없을 거예요! 저는 보조로 가는 거라니까요.’

‘꼭 가야 할 필요가…….’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에요. 자신도 있고요. 제가 가진 아이템들이라면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거예요!’

차마 말리지 못하고 보내는 길에, 코니는 그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들을 챙겨 주었다.

‘으앗, 코니 님! 이거 진짜 비싼 거잖아요! 저 돈 없어요! 이거 못 갚아요! 갚으려면 컨티뉴에서 평생 일해야 될 텐데요?’

‘네. 건강하게 돌아와서 평생 일하면 되겠지요. 그러니 꼭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에이, 코니 님도 참…….’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제자는 킬스크린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에 휘말려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으니.

코니는 그 이후로 한참을 생각했다. 그때 코니가 그 애를 말렸다면. 아니면 더 좋은 장비를 제작할 능력이 있었다면. 어린 조수는 살 수 있었을까.

다른 헌터들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갔으니…….’

‘던전 공략하다 죽는 사람들이 한둘입니까. 원래 삶이란 허무한 거죠.’

지금은 게이트의 시대다. 치열하게 생사를 오가는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 속에서 그 조수 같은 천진한 태도는 원래 희귀한 것이었다.

스러지기 쉬운 것. 어쩌면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해도 던전 공략에서 험한 꼴을 보았다면,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 녀석의 얼굴에도 조금씩 그늘이 졌겠지.

현하빈은 그런 점에서 제자를 떠올리게 했다.

‘코니 님도 네풀릭스 보세요? 무슨 드라마 보세요?’

‘제작계 헌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거 진짜 재밌더라고요. 제작계 헌터들은 진짜 그래요?’

처음에는 제작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하빈은 꽤 정성 들인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일상에 대한 이야기. 룸메이트에 대한 이야기, 드라마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코니는 제자를 잃은 이후 그런 사소하고 따뜻한 조잘거림을 참 오랜만에 느꼈다.

‘지나칠 수 있는 편지에도 이렇게 정성과 진심을 들여 답장을 쓰다니.’

게다가 편지에는 가식이나 아부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평범하고 소탈한 진심만이 담겨 반짝거리는 이야기들.

그래서 오랜만에 답장을 쓰는 일이 조금 즐거워졌다.

‘네풀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계 헌터 릴리의 우아한 하루>를 말하는 거군요!’

‘덕분에 나도 어쩐지 학창 시절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순간이 있는 법이지요.’

코니는 현하빈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채지석이 소개해 줬을 정도면 강력한 헌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순수함과 평범함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천진하게 학교를 다녀야 할 시기에 헌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검을 숨기고 다닐 정도면, 주변에 대해 경계를 하며 살았겠지.’

하빈이 의뢰한 검은 누가 보아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작계 클래스의 대가인 코니는 그 진면목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아이템을 지니고 다닐 랭커는 지구상에 몇 없다. 어쩌면 현하빈 그녀 혼자일지도.

그리고 채지석과 그 정도로 친밀하게 지내는 헌터도 보지 못했다. 그 말은 솔라리스에서도 현하빈의 인성과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

‘참 팔자가 사나운 아이로군.’

그 정도로 큰 힘을 가졌다면 태풍의 눈처럼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싸움의 중심에 설 것이다. 그게 몬스터를 향한 것이든, 사람을 향한 것이든.

‘안됐어.’

그게 그 애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객과 제작자의 관계로 만난 이상 최선을 다해 주어야겠지.

코니가 할 수 있는 것만큼 말이다. 일단 코니는 검집 제작에 공을 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코니 님, 현하빈 양이 학교 게시판에서 상당한 논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

어느 날, 코니는 현하빈이 받게 된 오해에 대해 들어버렸다.

‘코니 님의 손녀가 아니냐는 추측부터 강태서나 채남매와 혈연이라는 추측까지 돈다더군요.’

‘진상은?’

‘전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강태서랑은 동창이긴 해요.’

‘맞아. 채남매와 혈연으로 보이지는 않았지. 친해 보이기는 했지만 얼마만큼인지는 확실치 않고.’

‘아무래도 십대들이 주류인 게시글이다 보니 소문이 일파만파 부풀려진 모양입니다. 지금 현하빈이 대통령의 숨겨진 자식이 아니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어요.’

‘허, 참…….’

코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그런 일에 휘말려 놀라고 있을 하빈의 얼굴이 바로 그려졌다.

‘이런 일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좋지 않은데.’

진짜 그런 인맥이 있다면 괜찮다. 오히려 그녀를 노릴 사람들에게 견제와 경고의 의미가 된다.

다만, 헛소문이라면 문제가 된다.

‘현하빈 양은 고아라고 합니다. 칼리고도, 솔라리스도 가입한 적이 없고요. 그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어요.’

코니의 정보력은 웬만한 길드나 정보부를 상회했다. 좋은 재료를 누구보다 선점하기 위해 곳곳에 심어놓은 정보망, 그리고 전 세계의 VIP 고객들과 거래하는 대단한 인맥으로 인해.

그래서 코니는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단한 소문에 비해 현하빈은 기댈 곳 없는 혼자다.

‘그러면 후폭풍이 안 좋을 수도 있어. 이목만 이목대로 끌고, 받쳐 주는 뒷배는 없는 최악의 상황.’

혹여나 현하빈을 함부로 조사하려 드는 여럿 세력들이 생겨날 수 있다.

‘마이너 패치에서도 조사가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그건 큰일이군.’

그러다가 현하빈이 지키려고 하는 비밀이 까발려지거나, 괜한 회유나 협박에 따라 질 나쁜 세력의 눈에 들어 편입될 수도 있고.

“그래서 차악을 골랐지.”

“네? 차악이라뇨?”

“소문만 무성하고 실속은 없는 최악보다는, 소문이 반쯤 진실인 게 낫지 않겠나?”

적어도, 컨티뉴의 코니는 현하빈을 지지한다. 그렇게 대놓고 보여주는 거다. 괜한 놈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겸사겸사. 현하빈이 진짜로 대단한 가치의 헌터면 미리 우리 고객이라 만천하에 찜해놓는 효과도 누릴 수 있고. 일석이조지.”

“그런 것치고 과하시다니까요!”

코니는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그래도 확실하게 해놔야. 계속 이렇게 밝은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 않겠나?”

그녀는 한 번 소중한 제자를 잃어봐서 안다. 사소한 것일수록 과하게 챙겨두지 않으면 후회로 돌아올 뿐이니.

* * *

“……어쨌든 그래서, 소문을 들으신 코니 님은 하빈 님의 뒷배를 자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보여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숙사 안. 경호원은 나름대로 코니의 의중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현하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젠장. 저는 선량한 힘숨찐이 목표인데요! 안 그래도 헌터인 거 숨기고 학교 다녔단 말이에요! 이런 어그로는 사양인데!”

“……그치만, 주문하실 때 아이템 관련 비밀만 지키자고 했을 뿐 코니 님께 친한 척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셨지 않나요?”

“……에잇 진짜!”

그렇긴 한데!

그걸 진짜 말로 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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