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10) (110/268)

110. Almost paradise~ (1)

“…….”

하빈의 변조 같지 않은 괴상한 코맹맹이 음성변조를 듣고 충격에 빠졌는지, 잠깐 침묵하던 문밖의 사감쌤. 그녀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까 서윤 학생이랑 떠드는 거 다 들었습니다. 그냥 나오는 게 어때요?”

“쳇. 대체 뭐 하다 온 선생님이길래 귀가 이리 밝으셔?”

“다 들립니다!”

기숙사 사감직이지만 이곳은 헌터고등학교. 사감선생님 또한 웬만한 실력의 헌터 출신이었다. 방 너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일도 아닐 터.

평소에는 보안과 프라이버시에 잔뜩 신경 쓰던 하빈이 방음 아이템을 켜 둔 채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외출에서 돌아온 직후라 아직 깜빡 켜두지를 않았다.

‘내가 안일했어!’

이래서 외출하고 들어오면 정해진 수칙을 잘 지켜야 하는 거다. 들어오자마자 손 씻고, 양말 벗고, 옷은 세탁기에 잘 넣어두고, 방음 장치도 꼼꼼히 켜둘 줄 아는 살림꾼이 되어야 하는 법.

“추가로 도청 장치 제거도 꼼꼼히 하고, 도촬 카메라가 있는지를 확인하면 완벽한 셀럽의 생활습관이 되겠지.”

“뭐, 뭐라고?”

“맞아. 그런 삶은 안 되지 안 돼. 그래서 셀럽의 삶이 별로라는 거야.”

랭킹 1위든, 셀럽이든. 그런 귀찮은 자리에 있을수록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써야 하니 삶의 질은 훅훅 떨어지는 법이라고.

그러는 사이 사감선생님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하빈 학생, 지금 그렇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바깥에 택배가 왔는데 본인 수령밖에 할 수 없는 택배라고 해서.”

본인 수령밖에 안 되는 택배?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에엥, 왜 본인밖에 안 되는 건데요? 서윤이를 제 대리자로 위임하면 안 되나요?”

“나? 내가? 대리자?”

갑자기 이름이 불린 서윤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하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흐음, 대체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낸 택배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 직접 수령이라는 귀찮은 조건을 내걸다니! 무척 수상하단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그냥 버릴까?”

하빈이 중얼거렸다. 지금 이렇게 주변에 곤란한 시선들이 많은데 그걸 다 뚫고 기숙사 입구에 가서 택배를 받으라고?

“어림도 없지! 이게 다 음모인 게 분명해!”

원래 사람은 택배라는 소리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현관으로 달려나가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건 하빈도 마찬가지였다. 택배가 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이번엔 어떤 물건을 시켰나 궁금해서 곧장 현관문을 열던 게 그녀의 삶이었다.

‘내가 언제 이걸 시켰더라?’

기억도 안 나는 물건이 가끔 도착하기도 했다. 그럴 땐 ‘나 자신한테 주는 깜짝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언박싱을 하면 된다.

하빈은 기숙사에 오고 나서도 택배 서비스와 배달 서비스를 알차게 이용했다. 유명한 과자를 시켜 먹고, 비싼 게임기를 주문하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질렀었다.

“하지만 그걸 노리는 나쁜 놈들도 많단 말씀.”

오죽하면 스릴러 범죄 작품들의 단골 소재가 ‘택배요!’, ‘택배입니다!’라는 대사겠는가?

‘그 말에 속아 주인공이 문을 여는 순간! 사이코패스가 나타나 주인공에게 일격을 먹인다고!’

이번에도 그 논리임이 틀림없어.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지금 기숙사 앞에 신문부가 죽치고 있다잖아? 걔네가 내 얼굴 한 번 보려고 개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니까?”

“그, 그런가?”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던지,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헤자르도 덩달아 끼어들었다.

[그렇군! 맞는 말이다. 보통 암살자들이 그런 식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한 후 일격을 날리지. 평범한 상인이나 배달원으로 위장을 하는 것이다.]

‘오, 잘잘. 웬일로 또 맞는 소리를 하는구나.’

결론을 내린 하빈이 문밖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전 안 나갑니다! 그런 허튼 수에 넘어가지 않아요!”

“하, 하지만 하빈 학생!”

사감선생님은 곤란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택배, 컨티뉴에서 왔다는데요?”

“엥?!”

“네?!”

[뭐라고?!]

컨티뉴.

예기치 못한 단어에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순간 굳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서윤이었다.

“……어, 언니! 컨티뉴면! 그 컨티뉴지? 코니 님의……!”

[설마…….]

“…….”

컨티뉴라니.

하빈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눈을 딱 감았다. 어쩐지 요즘 코니의 편지에는 그런 뉘앙스가 조금 적혀있긴 했었다.

‘곧 완성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검집은, 얼마 안 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깜짝 놀라게 할 테니 기대하기를.’

“……깜짝 놀라긴 깜짝 놀랐는데.”

이런 식으로 놀라는 건 원하지 않았다고!하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이런 상황에!

하빈의 속을 모르는 문밖의 사감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계속 밖을 기다리게 해도 되긴 하는데…… 문제는, 컨티뉴 측에서 찾아온 사람에게 신문부가 다가가고 있어서.”

“네? 뭐라고요!?”

그 말에 하빈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이 신문부 인간들은, 하빈에게 인터뷰를 따낼 수 없자 다른 좋은 타겟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바로, 하빈을 찾아온 컨티뉴의 사람!

그쪽에게 대신 질문을 하려는 셈이겠지.

어쩌다 하빈에게 왔는지, 그 물건은 무엇인지.

“섣불리 대답해 주면 안 되는데!”

컨티뉴에서 온 사람이 뭔가 애매한 뉘앙스의 말 한마디라도 했다간 또 얼마나 부풀려질지 모른다.

‘VIP 고객이니 뭐니 특별 주문이니 같은 말은 사양이라고!’

그럼 코니에게 주문한 아이템이 이목을 끌게 될지도 모른다.

‘이목을 안 끌고 싶어서 주문한 검집이었는데!’

쾅-!

견디다 못한 하빈이 기숙사 문을 열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기숙사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휙휙휙,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가고, 로비를 지나, 저 멀리 유리창 너머로 와글와글 모여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카메라를 든 꿈나무 기자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저게 뭐야?!’

[저, 저게 무엇이냐?]

‘사람이 한 명만 온 게 아니었어?’

기숙사 입구에 주차된 새카만 리무진. 그리고 그 주변을 엄호하듯 둘러싼 경호원들.

“미친.”

저게 뭐야.

‘할머니, 이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택배 배달 스케일의 상태가?

‘이건 택배 배달이 아니라 국빈 대접하는 거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었다. 도저히 저쪽으로 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 돌아가자.’

택배고 뭐고, 컨티뉴 측 사람들 인터뷰고 뭐고, 일단 저 혼돈, 파괴, 망각의 현장에 끼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하빈이 삐걱삐걱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 순간.

“어? 현하빈 님!”

리무진 앞에 있던 경호원 한 명이 하빈을 알아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돌아보는 폼이나 하빈을 알아채는 시력과 기감이나, 아무래도 상위 헌터였던 모양.

‘하긴, 이 시대에 경호원 하려면 최소 헌터급은 되어야지……가 아니라!’

문제는 그의 말을 필두로, 우루루 하빈을 향해 시선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혀, 현하빈 떴어?!”

“어디?”

“저기야, 저기!”

와글와글 모인 사람들이 시선이 순식간에 현하빈 한 명을 향해 꽂혔다. 그 모든 시선을 받은 현하빈은 생각했다.

‘시바! 튀어야 해!’

빠른 상황 판단을 한 하빈이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눈치 없는 경호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하빈 님! 안 그래도 저희는 코니 님께서 하빈 님을 특별히 대우…….”

“스탑, 스탑!”

하빈이 기겁한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가 경호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빈은 삐걱삐걱 뒤를 돌아 신문부원들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읍읍!’ 하고 입이 막힌 경호원을 무시하며, 하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정말 코니 할…… 아니, 코니 님이랑 아무 사이 아닙니다. 오해는 놉.”

정말 영혼이라곤 하나도 실리지 않은 재빠른 해명이었다. 하빈은 그에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경호원들을 향해 정중히 손짓했다.

“자자, 돌아가세요. 돌아가 주세요. 지금 사람 잘못 봤어요! 착각하셨네!”

“착각이 아닌…….”

“어허어! 다시 물어보고 오세요! 분명 착오가 있었어!”

하빈이 진땀을 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코니도 하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빈이 아헤자르를 평범한 철검으로 위장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껏 검을 위장해 가며 숨겨온 데다, 검집에 눈에 띄지 않는 옵션을 넣어 달라 부탁까지 한 현하빈이었는데.

‘그럼, 딱 봐도 내가 눈에 띄는 걸 싫어한다는 뜻이잖아. 코니 할머니도 그 점을 이해했을 거 아냐?’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걸 이해했다면, 이렇게 요란하게 전달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하빈이 생각에 빠진 사이, 다른 경호원이 리무진의 뒷좌석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 안에서 선물 상자 더미와 풍선들이 나왔다.

풍선들은 헬륨 가스라도 채웠는지 둥실둥실 주변을 감싸며 떠올랐다. 마치 프러포즈나 생일 이벤트라도 받는 분위기였다. 뿌듯한 미소를 지은 경호원이 선물 상자를 하빈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하빈 님이 홀로 기숙사에 지내시다 보니 잘 챙겨 드시는지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네?”

“간식이나 영양제라도 잘 챙겨 드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코니 님이 케이크와 쿠키, 몸에 좋은 포션을 챙기셨다고 합니다.”

“엥?”

하빈은 삐걱삐걱 다시 선물 상자들을 살펴보았다. 선물들은 어디에도 검집이나 검과 관련된 것들은 없었다.

전부 간식거리와 포션들.

경호원이 덧붙였다.

“학업에 열중하려면 몸이 축나실 텐데 건강하셔야죠. 코니 님이 그 부분을 참 많이 신경 쓰셨습니다.”

“자, 잠시만.”

하빈은 방금 들은 말을 정리하며 창백한 낯을 했다.

‘저, 저렇게 말하면……뉘앙스가 좀…….’

학업에 열중하려면 몸이 축날 테니 걱정해서 간식이랑 포션을 바리바리 챙겨 줬다니.

꼭 수험생을 챙겨주는 할머니의 선물 같잖은가!

“……우와아!”

그걸 눈치챈 건 하빈뿐만이 아니었는지, 신문부 사이에서도 엄청난 반응이 터졌다.

‘역시 코니 님의 손녀라는 설이 정설이었어!’

‘현하빈은 곤란해하는 것 같은데.’

‘곤란해하는 부분이 바로 찐이라고!’

‘저게 바로 그거야! 금수저인 걸 전혀 티 내고 싶지 않던 후계자와, 이 틈을 노려 만천하에 티 내려는 할머니의 기 싸움!’

‘흥미진진한걸!’

학생들의 추측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하빈이 그 분위기에 체념한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헤자르가 쐐기를 박았다.

[이, 이건! 하이틴 드라마다! 내가 본 하이틴 드라마의 장면이도다!]

재벌 부모님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금수저 자제의 엇나간 반항! 누가 봐도 그런 장면이었다.

하빈은 이를 깍 깨물었다.

‘이렇게 나오신다는 거지?’

하빈은 선물 상자를 살펴보았다. 상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내용물이 똑똑히 보이는 포장이었다.

누가 봐도 케이크, 누가 봐도 포션.

‘……?’

그걸 확인한 하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경호원이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꽃도 기숙사에 키워 보라고 주시더라고요.”

화분까지 손에 든 경호원. 그 옆에도 줄줄이 경호원들이 선물을 주워들었다.

“이건 좋아한다는 게임기랑.”

“좋아하는 드라마 배우들의 친필 사인입니다.”

“아, 도마뱀을 키우신댔죠? 이건 도마뱀을 위한 영양 간식 세트고…….”

“……으악, 진짜!”

참다못한 하빈이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아니, 할머니, 대체 어디까지 하시려는 건데요!? 뭘 이렇게 준비했어?!”

“……!”

“……헉.”

하빈의 ‘할머니’ 발언에 주변의 신문부원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들었어?!’

‘하, 할머니라고!’

‘코니 님을 할머니라고 불렀어!’

‘역시 현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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