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09) (109/268)

109. 탐문 (2)

-귀찮은 게 있으면 칼같이 제거하는 게 네 방식인 줄 알았는데.

에라타의 지적에 강태서는 코웃음쳤다.

“제거? 그 학생을 죽이라고? 지금 피데스가 지켜보고 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해서 꼬리를 밟히란 말인가? 너는 항상 일부러 내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길 바라는 것 같은데?”

-오, 그럴 리가! 오해야, 오해.

에라타는 즉각 부인했다. 강태서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너희의 방식이 있다면 나도 나대로의 방식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존중할 줄 알았는데.”

-…….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학생한테 해코지라도 했다간 한순간에 쓰레기로 낙인찍히고 피데스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의 신임을 잃겠지. 혹시 넌 그걸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나 혼자 위선 떠는 게 보기 싫어서.”

-……솔직히 위선 떠는 건 같잖지만, 끌어내릴 생각은 없었어. 그 점은 사과할게.

에라타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공과 사를 구분해라. 난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도 않으니까. 지금 피데스의 감시망을 피해서 코드 심는 것도 바빠.”

-…….

에라타가 잠깐의 침묵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독기가 꽤 빠진, 상당히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 하지만 태서, 내가 말이야……. 재밌는 점을 발견했는데.

말이 길어지는 동안 슬금슬금 웃음기가 올라왔다. 다시 웃음을 되찾은 에라타가 빙글빙글 놀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현하빈, 그 애. 저번에 CCTV에서 본 여자 얼굴과 좀 닮았지 않아?

“그래?”

-닮은 것 같은데……. 흐응……. 기분 탓일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지만 강태서는 동요 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 핑계로 또 내게 귀찮은 일을 시킬 셈이라면 관둬.”

-하, 알았어.

수화기 너머로 ‘이 X끼 그럼 그렇지.’라는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강태서는 대답 없이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뚝.

-게에옹!(뭐냐? 또 귀찮은 여자지?)

태서의 모습을 본 지 한참 된 까망이. 이제 까망이도 에라타에 대해서는 웬만큼 다 파악했다.

-게옹, 게에옹, 겡게옹.(그 여자한테는 정보를 주면 안 된다는 거겠지? 앞으로 그 여자 앞에서는 모른 척을 해야겠다!)

계속 우는 까망이를 보며 태서가 중얼거렸다.

“간식을 달라고 우는 건가?”

-게엥……. 게에옹…….(인간……. 너는 눈치가 없지만 이해하겠다. 나라도 눈치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께엥, 게에옹!(그리고 간식은 언제든 환영이다!)

까망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태서는 서랍을 열어 내용물을 뒤졌다. 그의 손에 몇 가지 고양이 간식들이 딸려 나왔다.

모두 주변에서 준 것이었다.

‘태서야! 이거 까망이한테 줘. 고양이한테 좋은 음식이래.’

현하빈이 준 것.

‘강 선생님! 이거 까망이한테 전해주세요!’

‘까망이가 정말 귀엽더라고요!’

채남매를 비롯한 학교의 교직원들이 주고 간 것,

‘태서쌤! 오늘은 까망이랑 같이 안 왔어요?’

‘까망이한테 전해주세요!’

‘까망이 너무 예뻐요!’

‘까망이 보는 낙으로 학교 와요!’

학생들이 쥐여준 것들까지.

“…….”

강태서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가 까망이한테 물었다.

“……어떤 걸 먹을래?”

-게옹, 게옹!(그것 하나 못 골라주는 인간! 하지만 괜찮다. 나는 간식을 고르는 안목이 아주 뛰어나니까!)

턱을 치켜들며 웨옹웨옹 운 까망이가 성큼 다가와 마음에 드는 포장지를 골랐다. 태서는 그걸 까망이가 잘 먹을 수 있게 뜯어주었다.

-겡겡, 게엥.(역시 나는 간식도 잘 고른다!)

흡족한 표정으로 찹찹 간식을 해치우는 까망이. 그 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방금 에라타와 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현하빈, 그 애. 저번에 CCTV에서 본 여자 얼굴과 좀 닮았지 않아?

‘눈치챈 것 같진 않았어.’

오히려 떠보려는 뉘앙스. 강태서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어버린 기색이었다.

‘잘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걸.’

현하빈의 각성은 최근에 들어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에 비해 피데스와 채지세가 활약을 보인 건 벌써 5년이나 된 일.

조금만 조사해 봐도 현하빈은 털어낼 게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때 찍힌 사진도 밤거리에 멀리서 찍힌 것이었던 데다, 노이즈가 많이 섞여 있어서 그냥 분위기만 닮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도 딱 좋았다.

‘설사 동일인이라 확신하더라도 예언 능력 정도는 아니고 그냥 복권과 관련된 다른 스킬을 썼다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

그걸 알아내려고 귀찮은 일까지 감수할 에라타는 아니다. 애초에 복권은 조작을 하고 있으니 현하빈에게 뜯긴 것도 없었고.

뭐, 에라타가 지금 현하빈을 의심 중이라 해도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단…… 지금 문제는 현하빈을 어떻게 학교에서 내보내냐는 건데.”

-게옹?(츄르 인간을 내보낸다고?!)

이제 슬슬 게이트 발동 조건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얼마 안 가 관리자의 사도들이 그걸 실행시키려 들겠지.

그들의 최근 회의에서 이미 결론이 났다고 한다. 피데스와 채남매가 학교에 없을 날짜를 노려서 발동시키자고.

‘그래. 언제까지라고 기다릴 순 없어.’

‘강태서 네가 지켜보다가, 다들 학교에 없을 날짜를 알려줘.’

‘그럼 그날 발동시키게.’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강태서가 날짜에 대한 최종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현하빈이 학교에 없는 날로 지정하면 되겠지.”

잘 하면 이대로도 바로 자퇴할 것 같고. 강태서는 교장실에서 가져온 자퇴서를 살펴보았다.

“현하빈이 또 교사연구실에 들어오면 이걸 주면서 자퇴하는 방법을 슬쩍…….”

-게에옹!(그게 무슨 소리냐! 절대 안 된다!)

바로 그 순간, 까망이가 자퇴서를 든 강태서를 향해 돌진했다. 까망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퇴서를 향해 쇄도했다.

파박박!

찢찢찢!

처참하게 발톱 모양으로 찢어진 자퇴서.

“…….”

강태서는 넝마가 된 자퇴서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 * *

“서윤아!”

“언니! 괜찮았어? 듣기로 다들 언니를 찾으러 혈안이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날 기숙사. 하빈은 창문을 통해 기숙사 방 안으로 휙 들어왔다.

“짜잔, 기숙사 랜딩!”

휘릭, 탁.

“그, 그거 교칙 위반일 텐데…….”

하지만 그동안 하빈이 어긴 교칙이 몇 개이며 결석한 수업이 몇 개인가.

서윤은 이윽고 놀라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하빈의 상황 자체가 문을 통해 평범하게 들어오기엔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숙사 앞에도 기자들이 깔렸더라. 크윽, 이 지긋지긋한 기자들.”

하빈이 아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면 언론 노출에 이골이 난 세계적인 스타라고 해도 믿을 법한 제스처와 발언.

“……신문부지?”

그 대상이 학교 신문부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어. 쟤네 왜 저렇게 진심이냐?”

“요즘 신문부 위상이 많이 올라갔거든.”

고작 고등학교 신문부지만, 매번 찍는 인물들이 죄다 거물이다.

피데스, 채남매, 강태서.

다른 외부 언론 매체들도 그들의 사진 하나, 인터뷰 하나라도 따려고 야단법석인데, 이 학교 신문부는 교사와 학생 관계라는 특이점을 활용해서 그 어려운 기회를 숨 쉬듯이 따고 있었다.

‘선생님! 저희 인터뷰 한 번만 해주세요!’

병아리 같은 눈망울로 채지세에게 달라붙으면, 지세는 웬만해선 거절을 잘 안 했다.

‘그래,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요?’

채지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4반 애들이랑 축구 약속 있는데 그거 끝나고 점심 먹고 와서 인터뷰할게! 너희도 점심 맛있게 먹어라!’

강태서는 단답이지만 짧게 대답을 하는 편이었고, 피데스의 경우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한다고 들었다.

덕분에 신문부의 인터뷰는 외부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렇게 잡기 힘든 피데스 님과의 인터뷰라니! 혹시 인터뷰 내용을 저희 기사에도 실을 수 있게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듣자 하니 학교 외부 언론 매체들과도 협약을 체결해서 이미 중소기업 수준의 자금을 굴리고 있다고 한다. 신문부 동아리 부장이 행복해 죽으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니까.

‘어예! 이거면 신문방송과 입시는 문 부수고 들어갈 수 있는 스펙이다!’

“신문부 동아리 부장, 헌터 때려치우고 입시 준비할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래. 기자로서의 적성을 찾았다나?”

“그게 뭔…….”

인상을 찡그리던 하빈은 곧 별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에게 입시가 중요하긴 해.”

아무리 헌터고등학교지만 헌터로서의 길이 아닌 대학 입시를 고민하는 학생들도 이곳에 꽤 다니고 있다.

‘헌터는…… 아무리 돈 많이 버는 직업이라지만 대학 졸업하고 나서 다시 고민해 보려고요.’

‘부모님이 대학은 가래요.’

각자 여러 이유가 있지만, 헌터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목적은 여러 가지다.

첫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칼리고나 솔라리스 같은 명망 있는 길드에 스카웃되어 헌터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

그걸 노리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그래서 채남매와 강태서가 교원으로 부임했을 때 학생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범하게 대학 입학하는 것. 앞서 말한 부모님의 권유나, 개인의 보류나 적성에 따라 대학 입시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하빈이 가입한 ‘자습부’가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자습부’에서는 학생들이 수능 공부나 헌터전형 과목 공부를 했다. 모두 입시와 관련된 것들.

“역시. 한국에서 대학은 아주 중요한 건가 봐.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대치동이 안 죽었다니!”

그랬다. 게이트가 열려도 대치동과 노량진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헌터와 관련된 인터넷 강의들이 핫하게 인강 트렌드를 휩쓸고 있었다.

-올해 대학 입시 헌터 전형 완벽 분석

-던전 실습 수행평가에서 감점당하지 않는 핵심조건 요약 강의!

-던전중개사 자격증 100일 도전!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헌터관리공무원 프리패스 인강 특가. 오늘 이 가격이 마지막!

입시에 대한 것도 있고, 헌터 관련 자격증이나 공시 관련 강의도 있고. 아예 헌터로서의 역량을 키워 주는 꿀강의까지 있었다.

-마법사 클래스, 이걸로 이론 완전정복! 마법사 클래스 각성자를 잘 키울 수 있는 공략 최종정리!

스킬트리나 스탯 포인트를 어떻게 찍느냐부터 효과가 좋은 아이템 셋과 던전 공략법까지. 꽤나 비싼 강의료를 걸고 팔리고 있었다.

“요즘 학교 게시판에도 프리패스 강의 같이 듣자고 자주 올라오더라.”

“역시 사교육은 죽지 않아!”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마침 여기 온 김에 기숙사에 오늘 받았던 포켓파이를 가져다두려던 참이었다.

“어, 그건 뭐야?”

하빈이 꺼낸 포켓파이의 모습을 보며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질문에 하빈이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이게 뭐냐면, 바로-”

똑똑똑!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숙사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혀, 현하빈 학생?!”

“……?”

“지, 지금 현관으로 나가 봐야겠는데요?”

얼떨떨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기숙사 사감선생님인 모양이었다. 하빈은 이마를 탁 치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이번엔 또 무슨…….”

하빈은 잠깐 침묵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결심한 듯 다급히 자신의 코를 틀어막았다. 상당히 나긋나긋하게 변조된 톤의, 다른 사람 같은 코맹맹이 목소리.

“죄송하지만 현하빈 학생 여기 없습니다……!”

‘언니…….’

그 모습을 보며 서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