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03) (103/268)

103. 이 학교의 숨겨진 실세 (1)

“편지?”

채지석도 덩달아 궁금했는지 하빈을 돌아보았다. 하빈은 얼른 지세에게서 편지를 돌려받았다. 그녀가 눈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 저번에 만난 할머니께서…… 종종 연락하셔서.”

“……할머니?”

지석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빈이 최근에 만난 할머니라면.

“서, 설마!”

‘컨티뉴에서 만났던. 전설적인 제작계 헌터 코니 님?!’

“응. 그분 맞아.”

“그분이 어쩌다가 편지를……?”

‘저건 무슨 소리지?’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던 강태서도 덩달아 귀를 쫑긋했다. 채지석이 저렇게 놀랄 만한 인물이라면 몇 되지 않을 텐데.

“그냥 주문 사항이랑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는 거지.”

하빈이 편지에 찍힌 인장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주문 사항 말고 다른 잡담도 하잖느냐.]

‘으음…….’

그랬다. 하빈은 컨티뉴 방문 이후로도 종종 코니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첫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빈 양. 갑작스럽게 편지를 받아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이런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걸 꽤 즐긴답니다.

편지의 목적은 하빈이 주문한 검집과 관련해 몇 가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코니는 편지 중간중간에 삽화처럼 그림을 그려 넣어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검집의 옆면에는 이런 장식을 넣을지(그림), 혹은 이런 장식을 넣을지(그림) 고민 중이에요. 특별히 넣고 싶은 문장이나 장식 스타일이 있나요? 덩굴 같은 곡선과 모던하게 떨어지는 깔끔한 선 중에서는 어떤 쪽이 취향인가요?

‘우와, 그림 진짜 잘 그리셨잖아?’

간단한 러프 스케치임에도 불구하고 멋진 삽화들이었다. 역시 뛰어난 제작계 헌터는 디자인에도 실력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하빈은 감탄하며 디자인을 골랐다. 하지만 코니의 편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던가요? 잘 지내고 있나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꽤 궁금하더군요. 개인적인 궁금함이라 불편하다면 이 부분까지 답장하지는 않아도 된답니다.

‘흠…….’

하빈은 답장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남는 시간도 많은데 이 정도는 대답해 드릴 수 있지!’

그녀는 코니가 질문한 검집에 대한 내용 외에도 자신의 일과를 조금씩 알려주었다.

-저는 어떻게 지내냐면요……. 앗, 잠시만요.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서 대답해주고 왔어요. 룸메이트는 서윤이라는 동생인데 정말 성실한 아이예요. 헌터가 되고 싶다며 매일 열심이거든요! 방금도 과제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저한테 물어보려고 말 건 거더라고요.

그리고 걔랑 오늘 같이 치킨을 시켜 먹었는데 무려 닭다리를 양보하지 뭐예요? 심성도 아주 착한 아이임이 틀림없어요!

저는 요즘 웹툰 강좌를 듣고 있는데 웹툰을 만드는 강좌는 아니고 감상하는 강좌예요. 그게 뭐냐면…….

사각사각 종이에 답장을 쓰는 과정이 꽤 재미있어서 하빈은 일기를 쓰듯 조잘조잘 자신의 생활을 편지에 적었다.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길어지곤 했다.

-코니 님도 네풀릭스 보세요? 무슨 드라마 보세요? 요즘 나오는 오리지널 시리즈들 중에서 제작계 헌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거 진짜 재밌더라고요. 제작계 헌터들은 진짜 그래요?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을 한 움큼 담아 편지를 부쳤다.

답장은 바로 다음날 도착했다. 아무리 아날로그 방식의 편지라 해도, 포탈과 마법이 존재하는 게이트 세상에서 우편물 전송은 빛의 속도를 자랑했다.

게다가 코니의 답장은 꽤 장문이었다.

-네풀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계 헌터 릴리의 우아한 하루>를 말하는 거군요!

마침 그 드라마를 만들 때 드라마 제작팀의 요청이 있어서 컨티뉴 측에서도 고증을 위해 많은 참여를 했답니다. 참여하면서 나도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 드라마가 재미있었다니 정말 기쁘군요.

그리고 룸메이트 동생이 착한 친구라니 학교생활이 무척 재미있겠어요!

덕분에 나도 어쩐지 학창 시절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순간이 있는 법이지요.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게 있는데…….

코니의 답장에도 소소한 그녀의 일과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 온실에서 키우게 된 새로운 작물에 대한 이야기와, 무럭무럭 자란 작물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

그런 편지 주고받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하빈은 꾸준히 코니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다분히 일상적이고 때로 힐링이 되는 펜팔 관계 같은 느낌?

‘좋은 분이신 것 같아!’

이번에는 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하빈은 우아한 크림색 봉투를 보며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 * *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채남매가 먼저 돌아간 뒤, 강태서는 현하빈을 불러세웠다.

“현하빈.”

‘웬만하면 앞으로 못 오게 해야겠어.’

이제 강태서가 할 일들은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일들이다. 현하빈이 계속 찾아오는 건 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이제 오지 말라고 해야지.’

결심한 강태서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게엥!(까만 인간! 네가 츄르 인간을 못 오게 할 셈이지!)

-겡! 겡겡!(츄르 인간을 쫓아내다니! 안 된다!)

우다다다!

격렬하게 항변하는 까망이.

“어어? 까망이가 난리네?”

후두둑.

까망이의 난동에 태서의 책상에 있던 간식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모두 학교 매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과자와 빵들이었다.

‘태서쌤! 이거 먹고 하세요!’

강태서에게 잘 보이려던 다른 선생님들이 억지로 건네준 빵들. 하빈은 그걸 차곡차곡 주워다가 다시 강태서의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고양이들은 탁자 위 물건 잘 넘어뜨리더라. 그치?”

“…….”

-게에옹!(난 다 이유가 있었다, 인간!)

“와, 이 빵이 아직도 나오네.”

하빈은 떨어뜨린 빵 중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악당들의 초코초코롤’이라는 빵이었다.

초코롤 자체가 맛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싸구려 초콜릿 크림 때문에 미끄덩하고 달달한 맛이 나는 허술한 빵이었다. 하지만 학업 스트레스 받는 고등학생에게 그만큼 당분 충전을 잘 시켜주는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스티커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구!”

학생들은 ‘악당들의 초코초코롤’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아서 책상 위에 붙이곤 했다. 하빈이도 멋지게 생긴 희귀 스티커가 나오면 주변에 자랑을 하고 책상에 붙였다.

‘와, 푸른별 스티커가 나왔어! 이거 진짜 희귀하다던데!’

하빈이 초코롤 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거 우리 학교 다닐 때 매점에서 많이 사 먹었잖아. 추억이다.”

“……네가 좋아했던 빵이지?”

“올, 기억하네!”

웬일이냐는 표정을 하는 하빈을 향해 태서가 말했다.

“먹고 싶으면 가져가. 아, 그리고 그 옆에도 있어.”

‘가져가고…… 이젠 오지 마라.’

강태서는 그 말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잠깐 침묵했다. 그사이 하빈이 다른 빵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헉! 이건 매콤피자빵이잖아?”

그냥 피자빵이 아닌 화끈한 소스가 들어 있어서 매운 탄수화물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던 빵이었다. 학교급식으로 나오는 우유와 궁합이 환상적이라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빵.

“이것도 내가 좋아했던 빵이었는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가져가. 그리고…….”

“크으으, 고마워! 역시 갓태서!”

“…….”

“역시 갓태서가 최고라니까!”

신이 난 표정으로 빵을 한 아름 집어든 하빈이 까망이를 쓰다듬었다.

“까망아, 누나 다음에 또 올게! 태서 너도 파이팅!”

“아니…….”

-게엥! 게엥!(이 인간이 쫓아내도 그냥 와라!)

하빈에게 축객령을 내리려던 강태서의 말을 막으며, 까망이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빈은 신난 표정으로 복도를 향해 나왔다.

“좋아! 그럼 기숙사에 가서 빵을 까먹어볼까!”

하빈은 빵에 정신이 팔려 있는 바람에 누군가 문틈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 * *

마침 하빈이 복도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오는 서윤과 마주쳤다.

“헤이, 서윤! 동아리 끝났어? 이거 먹을래?”

“언니! 웬 빵이야?”

“흠흠, 이런 거 알아서 갖다 주는 친구가 있어.”

‘이런 걸 갖다 주는 친구가 있다고?’

서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 언니…….”

“응?”

“서, 설마…… 누군가에게 빵셔틀 같은 거 시키는 거 아니지?”

“뭐어?”

“아, 아니야.”

“뭐야. 날 뭘로 보고? 이건 다 친구와의 따뜻한 우정으로 가져온 거야.”

“……그, 그치! 그럴 것 같았어!”

‘난 또. 착한 하빈 언니를 의심하다니!’

매번 땡땡이를 치는 불량하빈.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 무서운 하빈의 이미지를 떠올린 바람에 서윤은 괜한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그 둘은 아직도 따라붙고 있는 의아한 시선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금 태서쌤한테 빵 받아 나온 거 맞지?’

‘빵……셔틀이라고……?’

그리고 다음 날.

울림국제고 익명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오게 된다.

제목: F반의 ㅎㅎㅂ 정체가 머임?

태서쌤을 빵셔틀로 부린다는 소문이 있음

└ ?

└ 그게 가능하냐?

└ 강태서를?????

└ 야 말이 안 되지 태서쌤이 여기서나 교사로 활동하지만 국랭 1위의 넘사벽 칼리고의 수장 강태서인데…….

└ F반이라 안타까워서 하나라도 더 챙겨준 거 아님?

└ 근데 미안한데 F반 ㅎㅎㅂ이 누구야?

└ 수업에서 본 적이 없는데....동아리 같은 것도 안 든 것 같고

└ 걔 교양만 듣는 걸로 유명함

└ 교양만 듣는다고????

└ ㅇㅇ검술 수업 하나 신청하긴 했는데 맨날 스탠드에서 낮잠만 자서 안 한 거나 마찬가지임 선생님들도 은근 쩔쩔매는 듯

└ A급 헌터라는 소문이 있어...선생님들끼리 그렇게 떠드는 거 들었는데...

└ A급 헌터? 근데 왜 F반에 있음?

└ ㅁㄹ.....힘숨찐 놀이하나?

익명 게시판은 말 그대로 완전한 익명이었다. 예전에 졸업한 선배 중 한 명이 후배들을 위해 만든 게시판이라 학교 관계자들도 누가 어떤 글을 썼는지 추적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마음 놓고 글을 썼다.

그래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는 근원지의 역할을 했다. 처음 올라온 현하빈에 대한 게시글도 급속도로 추천을 받아 핫 게시물이 되면서, 그에 따라 파생된 글들이 우루루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목: F반 현ㅎㅂ 이사장 손녀인듯

강태서를 빵셔틀로 부리고 채남매도 쩔쩔매더라

└ ㅋㅋㅋㅋㅋㅋ야 아무리 울림국제고라고 해도 이사장 손녀가 힘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다고

└ 대통령도 못한 일을 겨우 학교 이사장 손녀가 어케함?ㅋㅋㅋㅋ

└ 이거 진짜면 울림국제고 이사장 손녀가 우리나라 서열 0위네ㅋㅋ 울림국제고 이사장이 세계관 흑막이냐

└ 아! 알겠다 그럼 대통령의 숨겨진 딸인거임 ㅎㅎㅂ은 대통령 딸인듯!

└ ㅈㄴㄱㄷ)아님 ㅎㅎㅂ은 채남매의 숨겨진 이복남매임 내가 ㅊㅈㅅ이랑 ㅎㅎㅂ이랑 다정하게 복도에서 대화하는 거 봄

└ ㅊㅈㅅ도 가족처럼 대하던데 서로 반말 쓰는 거 들었다

└ 채남매 둘다 초성 ㅊㅈㅅ라서 누가 누군지 못알아듣겠네

└ 야 근데 아무리 솔라리스 남매의 이복남매라고 해도 강태서를 빵셔틀로 부리는 게 말이 되냐

└ 아 근데 그럴듯한데...채남매랑 가족이거나 뭐 있는 듯

└ 아님 반전으로 강태서랑 가족일수도있음

└ 강태서랑 가족인 거 킹능성있다. 숨겨진 남매일수도

└ 너희 선생님들 이름 여기서 너무 막 부르는 거 아님?

└ ㅈㅅ헌터넷에서 이름 부르는 거 익숙해져서.....

└ 아직도 선생님인 거 실감 안 나서 그럼 이해부탁

안타깝게도 하빈과 강태서, 채남매가 만나는 장면을 본 학생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하빈과 채남매가 조심한다고 해도 학교 곳곳에 있는 눈과 귀를 다 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애초에 교장실 앞에서 현하빈과 채지석이 반말로 대화하던 것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봤고.

어쨌든 게시판 덕에 추측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현하빈이 세계 3대 재벌 가문의 아가씨인데 정체를 숨기고 학교에 입학했다더라, 미국 대통령의 방계 친척이라더라.

별별 소문이 다 올라왔지만 다들 ‘헉 진짜 그럴지도 몰라’ 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간혹 그중에서는 이런 글도 있었다.

제목: 혹시 ㅎㅎㅂ

피데스의 숨겨진 가족인거아님?

└아 이건 아님ㅋ

└다른 소문 다 맞아도 이건 아닌 듯 제일 가능성없다ㅋㅋㅋㅋ

└뭔....하다하다 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올라오네

└(글쓴이)ㅎㅎ그치? 내가 적었지만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삭제할게!

물론, 이처럼 글을 올려봤자 아무도 지지하지 않아서 까이는 설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하빈의 정체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게시글이 생겨났다. 대부분 얼마 안 가 몇 가지의 가설로 좁혀지려는 듯했다.

이 모든 추측에 휘발유를 끼얹을 마지막 글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제목: ㅎㅎㅂ미스터리 이걸로 종결한다.

(사진)(사진)(사진)

└....미친?

└야 이거 찍어도 됨?

└글내려라;;

증거 사진까지 준비된 충격적인 게시글에 게시판은 한 번 더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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