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이러다 들키겠어! (3)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피데스의 차가운 일갈.
강태서는 상태창을 숨기고 몸을 돌렸다. 피데스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화내는 거지?’
이건 상당히 중요했다. 안 그래도 피데스는 예전부터 강태서를 상당히 껄끄러워했다. SPES회의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존대를 꼬박꼬박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고, 칼리고 대 SPES 수장으로서 대할 때도 비즈니스적인 매너를 항상 지켰다.
던전에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피데스는 강태서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거나 악의적인 플레이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면 언제나 강태서에게 차갑게 대했다. 강태서가 조금이라도 시스템 관리자와 관련된 작업을 할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서 뭐 하냐고 묻기도 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 피데스는 분명 뭔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했다.
‘어쩌면 에라타와 내가 만나는 걸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피데스와 마이너 패치는 누구나 다 아는 숙적이다. 지나가는 꼬마를 붙잡고 물어도 ‘정의로운 피데스 님이 나쁜 마이너 패치 일당들을 깨부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한 방송 콘텐츠가 범람할 정도다.
‘마이너 패치와 내 관계를 의심한 거겠지.’
설마 시스템 관리자와의 관계를 안 건 아닐 테다. 아직까지 그 정보는 이 세계에서 당사자인 사도들만 제대로 알고 있으니 사도 중 누군가가 배신하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니어야 했다.
만약 피데스가 거기까지 알게 된다면 일이 상당히 커지니까.
‘피데스가 일곱 번째 사도를 죽인 적은 있지만, 순식간에 죽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보를 알아냈을 가능성은 없어.’
생각을 마친 강태서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단둘이 있을 때는 존칭을 생략하는 게 그들 사이였다. 강태서야 워낙 위아래 없이 말을 놓은 적이 많아 여상한 일이었지만 언제나 누구에게든 깍듯하게 대하던 피데스가 강태서에게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 반응이 볼만할 텐데.’
강태서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피데스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전히 미동 없는 자세로 피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묻잖아. 뭐 하고 있었냐고.”
“창밖 구경.”
“…….”
‘어차피 관리자 모드 창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
지금 아무리 열심히 탐색해도 피데스가 찾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걸 잘 알았기에 강태서는 얼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제는 내가 창밖을 보는 것조차 아니꼬운가 보지?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걸 보면.”
“여긴 학교다.”
피데스가 싹둑 그의 말을 잘랐다.
“만에 하나 네 허튼 짓거리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
평소 같으면 아예 무시하거나, ‘무슨 말이냐’고 억울한 표정으로 반격을 해야 맞았을 거다. 칼리고의 수장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어쩐지 강태서는 그냥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피데스의 태도가 문제였다. 잔뜩 무게를 잡고 있는 저 태도. 가득 분노를 억누르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가 사람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무심코 묻고 말았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거다.”
‘그럼 나부터 죽였어야지.’
강태서는 조소 섞인 뒷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그 순간.
“……!”
흠칫.
피데스가 강태서의 뒤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몸을 굳혔다.
……슬금슬금.
그리고 잠시 후, 피데스가 주춤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순식간에 방금과 같은 위압감과 무게감은 어디로 사라지고, 그의 각 잡힌 자세가 무너졌다. 조금 당황한 기색의 피데스.
‘왜 저러지?’
강태서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피데스는 어느새 저만치 탁탁 뛰어 사라지고 있었다. 피데스가 재빠르게 외쳤다.
“어쨌든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둔다!”
“……?”
“지켜보고 있다!”
탁탁탁. 다급하게 계단으로 향하는 피데스.
-게엥?(저 인간은 왜 저러는 것이냐?)
널브러져 있던 까망이도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멍하니 있던 강태서는 뒤늦게 까망이의 울음에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까망이는 마비 공격을 받아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다친 건 아니군.’
피데스가 손속에 꽤 자비가 있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나 보다. 강태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망이의 상태를 확인할 때였다.
“강태서! 괜찮아?”
그리고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현하빈?”
“뭐야? 가면마법사 어디 갔어? 아까 전까지 분명 여기 있는 걸 봤는데.”
‘음……? 혹시…… 현하빈을 피해 도망친 건가?’
그 피데스가?
타이밍이나 상황을 보아서는 그런 추측이 가능할 법했다. 그러나 강태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현하빈과 피데스에게 무슨 접점이 있다고 그러겠는가. 그냥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난 것이 맞을 것이다.
“아유 까망이, 오늘도 태서 따라온 거야?”
-게엥! 게에옹!(인간! 츄르나 내놔라!)
하빈은 신이 나서 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벌써 마비 마법이 풀린 까망이는 하빈의 팔을 툭툭 치며 츄르를 찾고 있었다.
-게엥! 게오엥!(츄르 준다는 약속 까먹었냐!)
지난번에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나면 츄르 줄게!’라고 외쳤던 하빈의 약속.
-께옭, 께오옭…….(뭐, 딱히 그것만 기다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걸 까먹다니 이 인간도 멍청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까망이. 그 모습을 보며 강태서는 생각했다.
‘언제는 현하빈을 볼 때마다 무서워하더니 이제 적응을 했나 보군.’
“흠, 까망이가 왜 이러지? 뭔가를 찾는 것 같은데.”
-게엥!(그렇다! 눈치를 채라!)
“음……. 짜잔! 이거 찾니?”
하빈이 인벤토리에서 츄르를 꺼냈다. 까망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껭! 게에겡!(인간! 기억하고 있었군! 사랑한다!)
신이 나 소리친 까망이가 흡족한 얼굴로 웨옹웨옹 울었다.
-게에옹, 게옹!(아까 멍청하다고 한 발언은 사과하겠다! 네가 저 까만 인간보다 훨씬 똑똑하다, 츄르 인간!)
마침내 하빈에게 츄르를 받은 까망이가 행복한 얼굴로 츄르를 찹찹찹 핥았다.
* * *
‘언니…… 책을 두고 갔네.’
여전히 진행되는 정령술 수업. 여서윤은 자리에 남아 있는 현하빈의 흔적을 확인했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 한참 안 오는 걸 보니 큰 볼일을 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땡땡이를 치러 간 것 같아.’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현하빈을 완벽하게 파악한 여서윤이 결론을 내렸다.
‘왜 그렇게 다급하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이나마 번쩍 빛났던 환한 빛. 그리고 당황하던 현하빈의 표정. 그걸 떠올린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그건 정말 뭐였을까?’
A급 헌터 출신이랬으니 마법의 위력이 대단해서 잠깐 그런 효과가 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에 했던 검사에서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아무 반응이 없다니.’
정령술에 정말 재능이 없는 경우 그런 결과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마법 계열 각성자는 그래도 조금씩은 빛을 내기 마련인데.
‘하빈 언니는 정령 쪽이 아닌 마법 계열로 능력이 쏠려 있나 봐.’
서윤이 마법보다 정령 계열에 능력이 거의 쏠려 있는 것과는 반대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정령술과 마법은 서로 조금씩 다른 영역에 있었다. 마법의 위력이 마력과 비례하고 정령술이 정령 친화력과 비례하는 걸로 보아서도 둘은 서로 다른 계열이다. 마법사는 직접 스킬을 쓰지만 정령술사는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서포터나 원거리 딜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술사 클래스를 마법학교에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가 무척 적으니까.’
정령술사 클래스를 굳이 따로 모아 새 학교를 만들 정도로 인원이 많지가 않다. 정령술사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 계열에 속하는 클래스였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후천적 성좌 능력자’라고 부를 정도의 애매한 위지.
정령술사가 아닌 사람들도 간혹 성좌급의 강력한 정령을 발견하면 성좌 계약을 맺어 그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정령술사는 그 반대다. 성좌가 아닌 하급 정령을 자신의 힘으로 소환하고, 성장을 통해 더 강한 정령을 불러낸다. 그리고 이들은 성좌 계약이 아닌 정령 계약을 수행한다. 이런 특이한 능력 사용 덕분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인 부분이긴 했다.
어쨌든 희귀 클래스인 정령술사는 그 수가 적은 만큼 마법학교에 같이 데려다 놓고 가르쳤다. 마법사든 정령술사든 전투술은 두 클래스 다 비슷한 위치에 있고 말이다. 각각 서포터나 원거리 딜러와 비슷했다.
마검사의 경우 근거리 딜러도 겸하겠지만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따로 들으면 될 일.
헌터학교가 대학교처럼 자유로운 수강신청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다음은 여서윤!”
마침 다음 차례로 서윤의 이름이 불렸다. 그녀는 꿀꺽, 긴장을 삼키고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제발 잘 나와라.’
우우웅-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작은 원이 그려졌다. 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서윤은 ‘정령술사’라는 직업명에도 불구하고 정령 친화력이 다른 학생들만큼 높지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한 역량. 물론 하빈은 서윤의 능력만으로도 대단하다며 박수를 쳐주었지만.
‘이래서는 정말 각성으로 달라진 게 없잖아.’
매번 수업을 열심히 듣고 수련을 열심히 하지만 타고난 한계라는 게 언제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고 보조 계열이나 연구 계열로만 종사하게 될 루트.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서윤의 꿈은 헌터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게이트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영영 하지 못한다는 건 또 다른 의미다.
서윤의 어두운 표정이 걸렸는지 정령술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여서윤 학생. 너무 상심하지 마. 원래 각자가 가진 잠재력은 상태창에 전부 표시되지 않아. 등급만으로도 역량을 다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너희는 어리잖아? 가능성이 많아.”
그녀가 이 반의 학생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말했다.
“F급에서 A급 이상으로 올라간 헌터들도 꽤 많아. TV에서도 종종 봤지? 물론 너희에게 헛된 꿈을 심어 주려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측정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재단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
“그리고 헌터의 등급이 행복의 등급인 것도 아니지. 등급과 상관없이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든지 있고, 소중히 해야 할 가치도 어디든 있어.”
어디선가 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논리였지만, 그게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서윤이 자리로 돌아갔다. 말을 마친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까 화장실 간 애는 왜 안 와?”
* * *
“태서야. 안 본 사이에 애가 너무 수척해졌다!”
‘어제도 봤는데.’
현하빈은 수업 장소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까망이를 붙들고 있었다. 한참 까망이의 재롱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서야, 어차피 이제 우리끼리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
“혹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강태서는 얼굴을 굳혔다. 피데스의 추궁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현하빈도 무언가를 눈치챈 건가?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잔뜩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서야, 혹시 상사가 너 괴롭히니? 막 개X랄 하고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