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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97) (97/268)

097. 마법 도서관의 비밀 (2)

“무슨 책 찾으러 왔어요?”

바쁜 와중에도 꽤 친절한 목소리였다. 하빈은 그의 교복 재킷에 달린 배지를 보며 물었다.

“도서부?”

웅장한 분위기 때문에 어쩐지 당연히 도서관 직원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데스크는 학생들이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도서부 관할이죠.”

도서부원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동아리 모집 홍보 포스터를 서윤에게 건넸다.

<도서부원 절찬 모집 중!>

“다음 주에 동아리 부원 모집을 하는데. 혹시 관심 있으면 가입해요. 우리 부서 되게 좋아요.”

도서부원은 물 만난 고기처럼 좌르륵 도서부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마치 보험 가입이나 자산 설계라도 하는 듯 체계적이고 준비된 설득이 이어졌다.

“우리 부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파티도 하고, 좋은 책이 들어오면 누구보다 먼저 빌릴 수도 있고, 대출 권수도 더 늘어나고…….”

“책을 더 많이 빌릴 수 있다고요?”

서윤이 솔깃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도서부원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을 꼽으면…… 여긴 봉사활동 증명시간을 무려 60시간이나 줘요!”

“헉.”

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주네요?!”

그녀가 조금 혹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가입 상담을 할 기세였다. 곁에 있던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어어, 안 돼. 겨우 봉사시간에 혹하는 건 아주 위험하다구!”

“대학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냐. 서윤이 넌 헌터고 전형으로 갈 거라며? 그럼 도서관에서 봉사활동한 걸로는 자소서에 쓸 게 없잖아. 문헌정보학과를 간다면 모를까.”

“그, 그것도 그렇네.”

하빈이 간만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4층까지 빼곡히 차 있는 책장들, 그리고 주변 대학에서도 수시로 방문하는 환경, 휴게실과 멀티미디어실, 자습실, 스터디실까지.

‘굉장히 크고 관리할 게 많아 보이는데 이걸 학생들한테 맡긴다고?’

하빈의 귀찮음 레이더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도서부는 분명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는, 헬부서다!

하빈은 그녀의 룸메이트를 위해 이번만큼은 특별히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흐음, 다시 생각해 봐. 내가 장담하건대 매번 책 반납 처리하느라 도서분류기호 하루 종일 보고 있어야 해. 도서 분실된 것도 찾아야 하고, 새로 온 도서에는 도장이랑 바코드도 붙여줘야 하고…….”

“……!”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는 듯 서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요!”

서윤이 도서부 가입을 만류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쳇, 이번에야말로 좋은 도서분류 노예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만.”

“……!”

바로 얼굴이 돌변한 도서부원. 매서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가 하빈을 향해 삐딱하게 물었다.

“제법이군, 신입생. 대체 어떻게 그걸 한 번에 간파했지? 도서부 경험자인가?”

하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응. 중학생 때.”

“큭, 이래서 눈치 빠른 신입생은 싫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도서부원은 다시 수레를 드르르륵 끌며 사라졌다.

“바, 방금, 무슨 일이……?”

놀라 굳어 있는 여서윤.

그녀의 어깨를 하빈이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래. 잘 봤지? 도서부란 저런 곳이야! 차라리 평범하게 영화 감상 동아리나 드는 게 삶의 질을 더 상승시킬걸? 아니면 아카데미물의 클리셰를 따라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아리를 개설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아리.

“이름만 들어도 좋은 동아리야! 그런 동아리 어디 없나?”

그 말에 서윤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아. 우리 학교에는 자습만 하는 자유 동아리가 있대. 그럼 동아리 시간에 도서관이나 기숙사에 가서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면 된다고.”

헌터고에도 대학 진학을 위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들을 위해 동아리 시간에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기숙사에 돌아가 공부할 수 있도록 안배하는 ‘자습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들은 하빈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날 위한 동아리네! 혹시라도 동아리 가입하라고 하면 거기 이름만 올려놓고 기숙사 와서 네풀릭스 봐야지!”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럼 이제 우리 책은 누가 대여해 주나?”

원래 교과서 빌리려고 온 거였는데. 갑자기 도서부원이 탈주해 버렸다.

“……흠흠, 크흠.”

그 순간, 이번에는 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방금 사라진 도서부원 데스크 옆에 있던 학생이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 방금은 많이 놀라셨죠? 이해해 주세요. 요즘 저 선배님이 일손 부족하다고 부원 모집에 열을 올리고 계셔서…….”

그 학생의 교복 재킷에도 도서부 배지가 달려 있었다.

“책 대여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서부원들이 무슨 잘못이겠어? 이게 다 학생들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한 학교의 잘못이지.”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도서부원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빈이 말을 이었다.

“이래서 학생들에게 청소를 다 맡기거나 책 정리를 다 맡기는 건 위험한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지역 명물이 될 만큼 커다란 도서관인데. 이걸 어떻게 학생들한테 맡긴담?”

“우리의 고충을 알아주는군요!”

도서부원이 눈을 빛냈다. 정말로 그동안 시달린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열의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어떤 책을 빌려드릴까요?”

마침내 본분을 되찾은 도서부원의 질문. 그것에 답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는! 나는 저기 인기 목록에 있는 1위 책이 궁금하다! 읽고 싶다!]

‘아, 웹소 전문 잘잘이를 깜빡했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말한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동아리 이야기할 때는 무슨 이야긴지 잘 몰라서 못 끼어들고 있다가 이제야 참았던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빌려다오, 빌려다오!]

오랜만에 떼를 쓰는 아헤자르.

‘쓰읍, 그만해, 잘잘. 캐시로 보면 되잖아? 웬만한 웹소는 카카페에 다 있다고!’

[빌려 보면 돈이 안 든단 말이다!]

‘허? 역시 잘잘이는 카카페 캐시로 계산할 때만 금전 감각이 알뜰해진다니까?’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건 안 돼. 인기 순위 1위라서 분명 예약이 많이 밀려 있을걸? 내가 도서 예약해 봐서 아는데, 인기 많은 건 3달도 훌쩍 넘겨!’

[그, 그런 것인가?]

‘잘잘이가 세상을 아직 잘 모르네!’

이참에 본보기를 보여줘야겠다. 하빈이 도서목록 1위에 있는 책을 처억 가리켰다.

“이거, 빌리려면 며칠 기다려야 하죠?”

“음, 이건 인기가 많아서…….”

곤란한 표정으로 검색대에 무언가를 탁탁 입력하는 도서부원. 그가 잠시 뒤에 다시 말했다.

“지금 예약 신청이 꽉 차서 당장 예약해도 3달은 걸릴 거예요. 잘못하면 방학 때 빌리겠는데요?”

‘거봐!’

[크윽…….]

‘포기해, 잘잘. 내가 다음에 인기 없어서 바로 빌릴 수 있는 걸로 몇 개 빌려줄게.’

[뭐가 됐든 인기 있는 걸로 빌려라!]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서관이 이렇게 크니까 재밌는 책도 참 많겠지? 가끔 땡땡이치고 심심할 때 도서관 들러서 몇 개 빌려야겠다.

[종류별로 빌려라! 헌터물도 좋고 아카데미물도 좋고, 복수물도 좋고 요즘은 일상물도 좋느니라!]

하빈이 오래 말이 없자, 서윤이 걱정되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혹시 저거 못 빌려서 많이 아쉬워? 나도 같이 예약할까?”

“아냐. 그럴 필요는 없고.”

“언니도 판타지 소설 좋아해? 어떤 장르 제일 좋아하는데?”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니.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하빈이 머뭇거렸다.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헌터물? 아카데미? 로판? 복수? 육아? 역시 웅장한 전투씬이 넘치는 작품을 고를 거냐?]

“아니. 판타지 말고.”

[판타지 말고? 아, 혹시 웹소설은 싫어하느냐?]

“그럼 SF? 추리물? 로맨스?”

“외국서? 비문학?”

서윤과 도서부원도 한 마디씩 보탰다. 하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는 판타지 정말 많이 봤는데…… 요즘은 아니야.”

“요즘은 아니라고?”

“응.”

하빈은 언젠가 뒷자리의 동창 녀석과 쉬는 시간에 판타지 소설을 돌려 읽었던 평화로운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는 판타지 소설이 재미있었다.

그 시간이 유독 좋았던 이유가 판타지를 좋아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꼽아야 한다면.

“……일상물.”

[일상물?]

“아무도 안 죽는 일상물. 괴물이랑 게이트 같은 거 없이, 슬프거나 복수할 대상도 없이. 그냥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작품으로.”

하빈의 말을 들은 도서부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아쉽지만 제가 아는 책 중에서는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건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러게.”

“그렇지?”

하빈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아헤자르가 의아한 듯 끼어들었다.

[음? 그동안 너는 재미있는 드라마와 소설을 추천받으며 다녔지 않느냐? 드라마도 재미있다는 것만 골라 보고!]

‘재미있는 거랑 좋은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런 것인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서윤이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에는 ‘정령술의 기초’ 책을 검색해 주시겠어요? 아마 교과서 대여 서고에 따로 빼뒀을 것 같은데.”

“아, 찾아볼게요.”

탁탁탁. 도서부원이 검색을 시작했다.

* * *

“늦지 않게 빌려와서 다행이야!”

서윤이 빌려 온 ‘정령술의 기초’를 하빈에게 건넸다. 서윤 본인은 원래 자기가 갖고 있던 책을 썼다.

“내 책을 같이 봐도 되지만, 아무래도 실습이 많은 수업이라 각자 책이 있는 쪽이 편할 것 같아서. 거기 보면 이제껏 발견된 정령들에 대한 그림과 상세 설명들이 적혀 있어!”

하빈이 책을 펼쳤다. 그러자 각 페이지마다 던전에서 촬영된 정령의 사진, 유명한 정령술사와 함께 있는 정령들의 사진이 나왔다.

“오……!”

[오오오……!]

화려한 정령들의 비주얼에 하빈과 아헤자르가 감탄을 흘렸다. 그들이 한창 책을 팔락팔락 넘겨보고 있는 동안 아헤자르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기대가 되는 수업이도다! 이제 정말 마법학교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그동안 이런 학교를 다니면서도 마법 수업을 못 들어서 어찌나 아쉬웠는지!]

그동안 하빈을 따라다니다 보니 아헤자르도 졸지에 드라마와 웹툰 감상 수업만 들었던 것이다.

‘뭐어? 웹소랑 웹툰 수업은 잘잘이 네가 제일 재미있게 들어놓고?’

[크흠…….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학업의 정진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마법학교만이 가진 특색이 궁금했느니라!]

마법학교가 가진 특색이라.

‘흐음. 정령술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가끔 바람의 정령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복도에서 보긴 했는데.

드르륵-

그 순간이었다. 교실 앞문이 열리며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정령술 과목을 맡은 선생님이 들어왔다.

[호오!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는가!]

아헤자르가 잔뜩 기대를 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빈도 덩달아 교탁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학생들을 휙 둘러본 정령술 선생님이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들이 무슨 어둠의 자식들이냐? 불 좀 켜고 살아라! 교실이 왜 이렇게 어두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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