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94) (94/268)

094. 게엥게엥 (2)

사실 강태서는 채남매보다 조금 늦게 울림국제고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른 사도 대신 강태서가 들어오겠다 자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놈들이 오면 벌써부터 현하빈의 존재를 알게 되겠지.'

만약 에라타의 측근이 울림국제고에 온다면 현하빈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에라타가 찾으라고 한 얼굴이니.

‘지금 당장 알게 할 필요는 없지.’

미룰 수 있으면 더 미루고 싶었다.

'진짜 현하빈이 예언자거나 기만의 수호자일까?'

아직 강태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라면 그의 계획이 다 어그러진다는 점이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만일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에라타와 마이너 패치 같은 녀석들과 얽히지 않는 게 그녀의 신상에 더 나을 것이다. 

그 녀석들은 진위 확인도 없이 무조건 공격하고 볼 테니까.

일단 위협이 되는 현하빈을 죽인 뒤 '어머? 아니었네? 쏘리!' 할 수 있는 게 그가 아는 다른 사도들의 특징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강태서가 진짜 기만의 수호자를 찾아내는 게 낫다.

진짜 기만의 수호자가 나타나면 현하빈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겠지. 그냥 복권에 허점이 있었구나, 하고 적당히 넘어갈 것이다.

다른 문제는.

'현하빈이 진짜 기만의 수호자라면…….'

"……."

강태서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

어쨌든 울림국제고에는 강태서가 오는 게 낫다. 현하빈이 진짜 기만의 수호자든, 가짜든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현하빈과는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자.'

그와 가까워지다 보면 에라타의 레이더망에 현하빈이 포착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강태서는 학교에 부임하고서도 현하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대신 피데스와 채남매는 마주쳐야 했다.

“……어쩌다 오셨습니까?”

피데스는 경계 어린 어조로 물었다. 강태서는 언제나 자신을 향한 피데스의 반응이 묘하게 날이 서 있다고 느꼈다. 가끔 피데스가 자신의 이중생활을 다 아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 만큼.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걸 알면 자신을 이렇게 살려둘까? 강태서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의심 가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것이다.

강태서는 평범한 이유를 댔다.

“교육부에서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솔라리스에서도 참여한다는 말에, 빠질 수 없었습니다.”

솔라리스와 칼리고는 한국의 양 날개라는 별명답게 서로 많은 부분에서 협조하지만, 동시에 경쟁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더 좋은 헌터를 영입해서 길드를 꾸려 나가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한국 내에서 영입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원으로 부임해 눈여겨본 학생은 칼리고 이름으로 후원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5년 만에 S급의 미성년자 각성자가 나왔다고 떠들썩했다. 올해 울림국제고 입학생 수석이 S급이라며 난리를 피워댄 덕에, 솔라리스와 칼리고가 동시에 울림국제고에 부임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며 세간에서는 알아서 포장을 했다.

‘솔라리스와 칼리고의 S급 학생 영입 눈치 싸움!’

‘솔라리스와 칼리고가 교원으로 부임까지 하며 데려오려는 전설적인 입학생은 누구?!’

물론 강태서는 수석 입학생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좋은 명분으로 써먹을 순 있었다. 솔라리스 측에서도 물어봤기 때문이다.

“칼리고에서도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따뜻하게 웃으며 입을 열던 채지세.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저쪽도 뉘앙스가 분명했다.

“S급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구경할 겸 왔습니다.”

“그렇군요.”

그 정도 변명으로도 채지세는 굳이 더 묻지 않고 넘어갔다. 강태서로서는 귀찮은 일을 덜어서 편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강태서는 이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특히 현하빈과는 안 마주치기로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하빈 측에서도 굳이 강태서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아니, 안 찾아오다 못해 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수준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나?’ 

그래도 알던 사이의 사람이 같은 학교에 교원으로 왔는데. 궁금하지도 않은 건가.

그런 마음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들긴 했지만.

‘안 만나는 게 상책이지.’

이제 만나서 좋을 것 없다.

현하빈 측에서도 칼리고 가입을 거절한 데다, 연수원 출결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으니 정말로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강태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교사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울림국제마법학교는 교사마다 각자의 연구실을 제공해서 학생들을 위한 커리큘럼 개발과 마법 연구에 힘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피데스와 채남매의 시선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 강태서는 여기 머무는 동안만큼은 교사연구실에서만 조용히 지낼 계획을 세웠다.

“대신 네가 돌아다녀야겠다.”

-게엥?

“간단한 정찰 정도는 할 줄 알겠지?”

강태서는 이제 익숙해진 동그란 괴물에게 물었다. 괴물은 교사연구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과일캔디를 냠냠 빨아먹고 있었다.

-엥……. 게엥…….

시무룩한 태도를 보니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해야 돼.”

강태서는 짐짓 단호하게 덧붙였다.

간단한 정찰조차 못 하면 이 그림자 괴물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 태서는 괴물에게 녹화 기능이 있는 목걸이 아이템을 걸어 주었다. 이거면 대화가 안 통하더라도 괴물이 봤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현하빈을 봐도 너무 당황하지 마.”

-게엥?(그 여자?)

“위험한 녀석은 아니야.”

-게엥! 겡!(거짓말! 그건 네가 그 여자한테 속은 거다!)

심통을 부리는 까만 괴물. 강태서는 심드렁하게 괴물을 달랬다.

“알고 보면 착한 녀석이다.”

-께엑!(착한 거랑 무서운 건 별개다! 난 그 여자 보면 무섭다고!)

“알아듣긴 하는 건지…….”

혼자 통통통, 책상을 두드리는 괴물을 내버려 둔 채, 강태서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저 모습은 너무 눈에 띄어.’

동그랗고 까만 덩어리가 겡겡 복도를 굴러다니는 걸 누군가 발견한다면, 바로 몬스터라 판단하고 죽일지도 모른다.

‘제약 없이 돌아다니려면 동그란 덩어리보단 좀 더 친근감 넘치는 모습이 낫겠지.’

생각을 마친 태서가 결정했다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동그란 괴물의 모습이 스르륵 바뀌었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까만색 고양이.

-게엥!

자신의 변화에 놀란 괴물이 기웃기웃 새로 생겨난 꼬리와 발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기에! 게에!

낯설어하던 괴물이 마침내 새 몸에 적응했는지 자신의 꼬리를 붙잡으려 팔짝 뛰기도 하고, 소파에서 뒹굴 구르기도 했다. 제법 신이 난 표정이었다.

강태서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울음소리도 바꿔. 고양이는 그렇게 안 운다.”

-게엥! 겡! 겡! 기기괴게엥엥!(내 개성을 망치지 마라! 난 태어날 때부터 기기괴게엥엥으로 울었다!)

“…….”

아무래도 고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 * *

‘……그렇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던 녀석이었는데.’

현하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

-게옹, 게에옹…….

강태서는 지금 현하빈의 손길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필사적으로 고양이인 척하는 까만 괴물을 쳐다보았다.

-게웨오오옹! 게에옹!

‘이제 제법 고양이처럼 우는군.’

-게, 게오옭!

나름 고양이인 척 쭈우욱 기지개도 켜보고, 살랑 꼬리도 흔들어 보는 까만 괴물. 심지어 배를 건드려도 내색 없이 발랑 드러눕고, 발바닥 젤리도 선뜻 내주었다.

‘고양이는 원래 저렇게 배를 안 내주는데…….’

허술한 고증에 강태서는 짐짓 인상을 찡그렸다.

“태서야, 얘 이름은 뭐야?”

하빈이 물었다. 한창 괴물의 어설픈 연기에 한눈이 팔렸던 강태서는 그만 무심코 익숙한 이름을 댔다.

“……까망이.”

-겡? 게에? 게에에에에?(까, 까망이? 까망이?! 인간, 나는 마왕의 집무실에서 태어난 그림자다! 그렇게 성의 없는 이름은 받아들일 수 없다!)

퍽퍽!

기분이 상한 듯 태서를 향해 곧장 냥냥펀치를 날리는 까망이.

태서는 별 반응 없이 그걸 무시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하빈의 반응이 묘했다.

“까망이라고……?”

고양이를 향했던 하빈의 손이 멈칫, 하고 멈추었다.

“그거, 네가 예전에 구했던 고양이 이름이잖아.”

“…….”

“지금 보니까 털이 까만 게…… 닮긴 했네.”

짧은 침묵 뒤에 하빈이 아차 싶은 얼굴로 덧붙였다.

“앗, 혹시라도 안 좋은 기억 떠올리게 했다면 미안!”

“…….”

강태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망이는 현하빈의 말대로 예전에 강태서가 발견한 고양이었다. 아픈 고양이를 살려보겠다고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던 사건.

그걸 현하빈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야.”

강태서는 고개를 저었다.

치료를 끝낸 검은 고양이를 집에 데려와서 키웠던 시간들. 그건 굳이 따지자면 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좋은 기억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 없겠지만 말이다. 그때 그 까망이는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이 까망이도 너무 예쁘다! 정말 순하고.”

개냥이가 따로 없네!

하빈이 새로운 까망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 얘는 중성화 했어?”

-게엥……?(주, 중성화?!)

불길한 단어에 까망이가 주춤했다. 슬슬 뒷걸음질 치는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얘는 수컷이야, 암컷이야?”

-게, 게에옹! 게에옹!(그림자한테 성별이 있을 리 없잖냐, 인간!)

경계하듯 하악질을 하는 까망이.

‘하악질은 또 언제 배운 거지?’

“……중성화 했어.”

혹시라도 현하빈이 까망이를 자세히 볼까 싶었는지 강태서가 곧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그림자라 수컷도 암컷도 아니니 선천적 중성화라고 치자.’

-게옹!(잘했다 인간!)

신이 난 까망이가 왜옹왜옹 울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그걸 조용히 지켜보던 채지석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반려묘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

“어, 그러게? 저번에 태서네에 놀러 갔을 땐 못 봤어!”

그 말에 하빈도 궁금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서는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최근에 데려온 거라서.”

“그렇구나! 갑자기 데려온 거면 이번에도 태서가 구출한 건가? 냥줍? 간택?”

하빈이 까망이를 토닥거리며 흐뭇한 얼굴로 덧붙였다.

“까망이가 운도 좋지! 좋은 집사를 만났네.”

-게? 게엥? 게에에!(뭐? 뭐라? 절대 아니다! 저놈은 똥 멍청 답답이란 말이다!)

그 말에 펄쩍 뛰고 바동거리며 억울함을 피력하는 까망이. 격렬한 반응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심통이 났지? 어디가 불편한가?”

아니면 배가 고픈가?

“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망아, 혹시 너 츄르 좋아하니?”

-게옹?

하빈은 인벤토리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에 츄르 두 개가 딸려 나왔다.

“혹시나 싶어 사두길 정말 잘했지!”

다음에 킬스크린 가면 켈베한테는 개껌을, 다른 고양잇과 마수들에겐 츄르를 먹여보겠단 계획으로 사둔 것이었다.

"태서야, 얘 츄르 먹여도 돼?"

하빈은 먼저 강태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태서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옹, 에옹……?(츄르? 그게 뭐냐?)

까망이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하빈이 찌익 츄르 입구를 뜯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