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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92) (92/268)

092. 교장 선생님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4)

“채씨! 여긴 어쩐 일이야?”

“겸임교원으로 왔지.”

하빈은 무심코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움찔, 하고 그 자리에 멎었다.

주변에서 그들을 향한 시선이 너무 많이 느껴진 탓이었다.

‘뭐야, 뭐야?’

‘헉, 채지석…….’

‘저 학생, 방금 학생인데도 채지석 님한테 채씨라고 부른 거야?’

‘선생님이라고 안 하고?’

‘반말도 하는데?’

‘원래 친한 사이인가?’

‘서로 무슨 사이지?’

놀람과 의심이 섞인 눈초리들.

“제, 젠장! 여기서 말 걸지 마!”

하빈은 급한 대로 후다닥 그곳을 벗어났다.

탁탁탁,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옥상까지 직행한 현하빈.

당연히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특성상 옥상은 잠겨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현하빈은 그냥 힘으로 열어버렸다.

쾅-!

‘스탯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거지!’

인류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21억 스탯’은 잠긴 옥상 문을 여는 데 알차게 사용되었다.

“현하빈!”

“으아아 따라오지 말라고!”

“야, 진정해! 너무 빨리 와서 다들 같이 올라온 걸 못 봤어!”

“앗, 그래?”

그 말에 솔깃한 하빈이 채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제대로 인사할게. 안녕! 어쩐 일로 왔어?”

“너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옥상 문을 철컥, 하고 다시 잠근 채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이목 쏠릴까 봐 그런 거지? 저번에 야시장이랑 컨티뉴에서도 그러더니.”

이목이 쏠리는 채지석의 어그로를 벗어나기 위해 매번 모자와 관광객 티셔츠 선글라스를 착용하길 권했던 현하빈. 그녀가 팔짱을 끼며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학교가 얼마나 소문이 빠른 곳인데?”

“무슨 소문을 경계한 건데?”

“채씨랑 친하다는 소문 나면…….”

“친한 거 싫어?”

“…….”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현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딱히 그런 뜻은 아니고.”

이때다 싶었는지, 채지석이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다분히 웃음기가 섞인 놀림조였다.

“뭐야? 저번에는 그 민수인가 하는 분 앞에서 대놓고 친하다고 그랬잖아. 마음이 바뀌었어? 이번에는 내가 친구비 입금해야 하냐?”

“윽…….”

하긴 그도 그랬다. 그동안 현하빈은 군중 속이나 언론 앞처럼 귀찮은 상황만 아니면 솔라리스의 채남매와 친하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았었다.

주변에서 안 믿어준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여긴 다르지!”

“여긴 왜?”

“학교잖아!”

하빈이 심각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쉰 다음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채씨.”

“어.”

“난 학생이고, 넌 선생이야.”

“그거 대사 반대로 된 거 아니냐?”

“어쨌든 그래!”

“그래……. 그래서 그게 왜?”

하빈이 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녀가 아주 엄청난 비밀을 말하듯 눈썹을 찡그렸다.

“채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선생님과 학생이 사적으로 친하면 의심을 많이 사.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채지석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빈이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입시 비리 의혹에 휩싸일 수 있지.”

“!”

“친한 학생한테 수행평가 점수를 더 퍼준다거나, 시험문제를 더 알려준다거나! 김영란법을 위반했다거나!”

“……!”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을 살 수 있어. 그러니 이런 사적인 관계가 학교에서 드러나면 곤란해.”

“듣고 보니 의외로 맞는 말이다?”

“나는 성적 조작 필요 없는 착실한 유급 인생을 살 거야! 그런데 그런 논란이 따라붙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 그래. 엄청 억울하겠네.”

“채씨도 경각심을 가져야 해. 슥하이캐슬 봤어?”

“봤는데 오래되어서…….”

“김잘잘이랑 둘이 손잡고 정주행해. 그리고 다시 새기도록 해. 학교는 던전과 같은 곳이야. 잠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

그렇게 한참 열변을 토한 현하빈은 채지석을 변장시킨 후에야 다시 옥상에서 나올 수 있었다.

* * *

“이 정도 변장이면 충분하겠지?”

염색 스킬과 컬러렌즈는 물론, 존재감을 지우고 인식을 흐리게 하는 아이템까지 쓴 채지석.

‘옷도 바꿔야 해!’

현하빈의 철저함으로 인해 입고 왔던 옷 대신 다른 옷으로 바꿔 입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가 지나다녀도 학생들은 전처럼 놀라서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곧 수업 시작할 시간인데 너 안 가봐도 되겠어?”

“채씨, 날 뭘로 보는 거야?”

현하빈이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수업을 들을 리가 없잖아?”

“……연수원이랑 똑같이 살고 있었구나?”

또 땡땡이치고 다니나 보다.

‘확실히 아까 유급 운운할 때부터 평범하진 않았지.’

“그래서 그동안 안 마주쳤나 보네? 우리 겸임교원 된 지 좀 되었는데. 애들이 떠드는 거 못 들었어?”

“그건 들었어.”

피데스에 이어 채남매가 특강을 하러 온다는 소식에, 학생들끼리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학교 진짜 이게 무슨 일이냐.’

‘뭐? 피데스 님 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솔라리스 길마님이랑 부길마님도 온다고?’

‘몇 달간 잠깐씩 특강만 한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우린 울림국제고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학년이 아닐까?’

‘축복받은 기수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측이 오가기도 했다.

‘솔라리스와 칼리고에서 다 나서는 걸로 봐서는, 미리부터 길드에 가입시킬 인재들을 찾는 건가 봐!’

‘그럼 잘 보여 놓으면 솔라리스 들어갈 수 있는 거야? 대박!’

물론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하빈은 몸을 사렸지만 말이다.

“젠장. 학교가 너무 소란스럽잖아?”

간만에 평화로운 일상인데 피데스니 솔라리스니 칼리고 같은 거 끼얹지 말라고!

안 그래도 학생들끼리 난리가 났는데 채남매와 아는 척이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학교의 슈퍼스타가 될 가능성이 100%다.

‘채지세 님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채지석 님이랑은 어떻게 알아?’

이 질문부터 시작하는 건 물론, 온갖 기념일마다 선물 공세에 시달릴 것이다.

‘이거 채지세 쌤께 전해 줘! 부탁이야!’

‘나 너무 팬이거든!’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건 이미 현시우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겪었다고!’

뚱한 표정을 지은 하빈이 지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들 어쩌다 온 거야? 나한테 말도 없이!”

“그게…….”

채지석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눈을 굴렸다.

시작은 지세가 ‘현하빈 보러 학교 가보자!’라고 먼저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나름 웃긴 이벤트 같아서 덩달아 껴볼까 고민한 게 다였는데.

어째서인지 피데스 님도 온다고 하고.

강태서까지 온다고 하고.

판이 커져 버린 이상(?) 도대체 이 학교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꼭 봐야 하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채지석은 공식적인 이유를 대답했다.

“교육부에서 권고했어. 학생들에게 특강 하는 거.”

“근데 굳이 우리 학교?”

“겸사겸사.”

“게다가 언니랑 채씨는 마법 계열이 아니잖아?”

“마법 과목 말고도 게이트에서의 실전 상황에 대한 과목, 힐링 계열과 관련된 각성자나 암살자 계열과 관련된 각성자를 위한 과목들도 많아서. 그쪽 특강을 맡았지.”

“아하!”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입학한 하빈도 ‘마법사’ 직업이 아닌, ‘마검사’ 직업으로 들어왔다. ‘마검사’가 바로 대표적인 ‘마법+검술’의 듀얼 클래스.

이외에도 치유 스킬과 마법계 주술 스킬을 혼용해서 쓸 수 있는 ‘주술사’ 같은 직업이나 마법계열 스킬과 암살계열 스킬을 혼용해서 쓰는 듀얼 클래스 학생들도 분명 있을 테고.

그걸 다 제치더라도 솔라리스의 채남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경험담과 지식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언니는 지금 어디 있어?”

하빈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안 그래도 언니한테 인사했어야 했는데!”

“지금 수업 중일걸?”

“채씨는 안 해?”

“난 방금 끝났지!”

채지석이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바로 퇴근을 앞둔 직장인의 여유다.

채지석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지금쯤 누나가 저쪽에서 수업하고 있을 텐데 보러 갈래?”

“오? 좋아.”

‘언니가 강의를 한다고?’

하빈이 신청한 게 교양 과목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채지세를 강의에서 만나게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종종 열어주는 특강은 선착순 신청이라 0.5초 컷으로 마감 행진.

‘내가 그걸 들을 수나 있겠어?’

그래서 아예 논외로 두고 있었는데.

‘복도에서 구경하는 건 되는구나!’

고개를 끄덕여 하빈은 동의를 표했다. 그렇게 둘은 슬금슬금 채지세의 교실을 찾아 발을 옮겼다.

그들이 지나는 길목마다 각 교실의 수업 내용들이 들려왔다.

“자, 이걸 보세요. 이 약초는 정주성 던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뿌리제비인데, 원래는 상품 가치가 없었지만, 탈모 치료 포션으로 쓸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현재 멸종 위기에…….”

“하급 정령은 하급 던전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나중에 여러분이 헌터가 되어 상급 던전에 가면 정령을 만나도 계약을 할 때 상당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어어, 피데스 님! 그럼 저부터 발표할래요!”

세 번째 교실을 지날 때쯤, 하빈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피데스?”

방금 학생이 피데스를 불렀는데.

“어, 진짜 이 교실은 피데스 님 수업 중이시네! 뭐 하는지 볼까?”

채지석이 교실 창문을 흘끔거렸다. 마침 그 교실의 칠판에는 커다랗게 과목명이 적혀 있었다.

‘헌터물 웹소설 연구.’

“웹소설 연구……?”

그러고 보니 하빈은 웹툰과 웹소설 감상 교양을 들을 때 ‘헌터물 웹소설 연구’ 과목도 잠깐 들을까 고민했었다.

다만 저 과목은.

강의 이름은 비슷했지만, 어쩐지 교양이 아니라 전공으로 편성된 걸 보고 느낌이 쎄해서 피했었다.

‘뭐 하는 과목이더라?’

마침 곁에 있던 채지석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알다시피 헌터물이 우리 현재 상황을 예측했다는 평가가 우세하잖아. 그래서 헌터물을 읽으면서 현재와 비교하는 학문이랑 헌터물을 읽고 던전에 대한 지식을 미리 알아가는 강의가 활발하대.’

‘아하.’

헌터물 중에서도 현재 현실과 상당히 비슷한 소설들은 던전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학생들에게 미리 읽도록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상황을 보니 그냥 자신이 읽었던 헌터물이랑 겜판소들에 대해 한마디씩 말해보는 시간이네.’

* * *

그렇게 ‘헌터물 웹소설 연구’의 강의를 맡은  현시우.

사실 맡으려고 했던 강의는 아니었다. 원래 이 과목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오늘 병가를 내셔서 그냥 현시우가 잠깐 맡아주겠다고 했다.

‘그냥 애들한테 웹소설 발표나 시켜야지.’

“오늘은 각자 읽었던 판타지 소설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이랑 명대사 한마디씩 소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땜빵으로 온 거니 여유 있게 할 생각이었다.

“쌤! 꼭 헌터물이어야 하나요?”

“헌터물 아니어도 됩니다.”

“꼭 명대사 말해야 해요? 기억 안 나는데.”

“그럼 말 안 해도 됩니다.”

쉽게 가자, 쉽게.

마침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첫 줄 가운데에 있는 학생이 호기롭게 손을 들었다.

“어어, 피데스 님! 그럼 저부터 발표할래요!”

“네, 편하게 말해보세요.”

그 학생을 시작으로 각자 재미있었던 판타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교과서로 배웠던 무난한 헌터물의 이름과 명대사를 댔다.

“……저는 ‘나 혼자만 역대급 천재 무한회귀 EX급 헌터로 귀환해서 레벨업!’을 인상 깊게 읽었고요, 명대사는 역시 ‘상태창!’이었습니다!”

“네, 그럼 다음.”

“저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난 다음 학생. 그는 피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고전 명작으로 손꼽히는 ‘빛길’을 읽었습니다!”

“……!”

빛길.

그 제목을 듣는 순간 회귀자인 현시우는 본능적으로 흠칫했다.

“그, 그래서?”

“명대사는 역시 ‘형님, 이 X끼 웃는데요?’랑…….”

‘아, 안 돼. 멈춰!’

“‘냅둬,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입니다!”

“……큭!”

현시우는 그만 크나큰 정신적 대미지를 입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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