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90) (90/268)

090. 교장 선생님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2)

한편, 교장실의 현시우.

“교장…… 진짜 교장 돼버렸다.”

[상상도 못한 전개.]

‘아니, 네아이바 님은 왜 자꾸 아까부터 도와주시지도 않고 놀리기만 하시죠?’

[하하! 그치만 너무 웃긴걸? 넌 어딜 가나 대가리만 하는 운명이라도 타고났냐? 어째 가는 곳마다 우두머리야?]

‘1회차엔 전혀 그런 거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회차에서 너무 높은 지위를 얻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과한 대접을 해주는 것 같았다.

이번에만 해도 그렇다.

‘으아닛, 피데스 님!’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시종일관 현시우에게 교장 자리 한 번 주겠다고 난리법석인 학교 관계자들 때문에 고역이었다.

‘저기, 학부모님들 동의도 얻어야 하는 거 아닌지…….’

‘마다할 학부모님 없다는 데 저의 전 재산을 걸 수 있습니다!’

‘학생들 동의는요?’

‘마다할 학생 없다는 데 목숨 걸 수 있습니다!’

‘너무 단호하신 거 아닌지?’

[그래. 저건 위험한 도박인 것 같다. 적어도 학생들 중 현하빈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

어쨌든 쓸데없이 목숨 거는 립서비스를 받아가며 현시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피데스 님은 마법사 중에서도 최강, 아아니, 지구상 최강 아니십니까!’

‘큽…….’

실질적 최강이 현하빈인 걸 아는 현시우로서는 여기서 한 번 찔렸고,

‘이런 분이 학교의 교장을 맡아 주시기만 해도 위상이 올라갈 겁니다!’

‘학생들도 배우는 게 많을 거고요!’

‘윽…….’

여기서는 부담감이 장난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시 머무는 동안이라도 학교에 영향력이 있는 편이 좋겠죠.”

현시우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이면 좋은 지위지.

낌새 이상하면 바로 휴교 때릴 권한…… 같은 건 없나?

사건 터지기 직전에 알아채고 휴교 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은데. 교장이라고 해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일이 터지더라도 교장으로서 교원과 학생들을 대피시킬 권한이 생길 테니 나쁘지 않군요.”

원래 어떤 곳에 속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현시우로서는 큰 결심인 셈이다. 현시우는 갑자기 양도받은 교장실에 앉아 팔짱을 꼈다.

“흠, 그럼 이참에 권력의 맛 좀 볼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어디에 쓸 건데?]

“일단 오늘은…….”

현시우가 책상 위의 컴퓨터를 켜며 말을 이었다.

“학생들 시간표를 확인해 보죠.”

안 그래도 현하빈이 어떤 수업을 신청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이유는 물론 하나.

‘피해 다니기 위해서!’

같은 학교에 온 건 좋지만, 할 수 있으면 마주치지는 말자, 동생아!

네아이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번에 현하빈이 너 싫어해서 그래?]

분명 집에 방문했을 때 현하빈은 피데스를 ‘가면마법사’라고 부르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현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그럼?]

“만나면 일단 모른 척해야 되잖아요?”

[그치?]

현시우가 본인인 건 아직 밝힐 수 없는 상황. 어차피 현하빈과 ‘피데스’는 초면으로 만나야 한다.

[그럼 오히려 좋은 거 아니냐? 서로 예의를 지킬 거 아냐?]

“바로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현시우는 상상조차도 싫다는 듯 손깍지에 이마를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서로 존댓말을 쓰면 오글거려서 죽을 듯.”

[그게 문제였냐?!]

‘아주 중요한 문제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인 현시우가 딸칵,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이제 교장이 된 현시우도 교원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 말은.

현하빈이 신청한 교과목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음, 과연 무슨 과목을 신청했을까?”

[혹시 네가 수업할 과목에 이미 신청되어 있는 거 아니냐?]

‘제발 아니어라.’

동생을 선생과 제자 관계로 만난다니.

어차피 학교에 온 이상 그럴 예상까지는 했다. 그래도 피하고 싶은 건 피하는 게 상책.

띠링-

때마침, 현시우의 소리 없는 기도와 함께 다음 창이 열렸다.

화면 가득히 채워지는 현하빈의 시간표.

‘어…….’

[……?]

그걸 확인한 둘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

[야, 이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냐……?]

잠깐의 정적 끝에 네아이바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음. 10학점 시간표라면…… 그렇습니다.”

[오류 아니고?]

“아, 아닌 것 같은데요…….”

정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당황한 네아이바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 이게 왜 오류가 아니지? 다시 확인해봐!]

‘놀랍게도 아닙니다! 새로고침 해도 똑같아요!’

[마법 과목 하나도 없는데?!]

“왜 교양만 신청한 거야?”

보통 학생들의 기본 신청학점은 20학점. 현하빈은 그 중 딱 절반만 신청했다.

그것도 모두 교양으로.

천천히 시간표를 읽어 내려가는 현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요, 요리, 웹툰 감상, 드라마 감상……만 할 건가 봅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보랬다고 진짜 하고 싶은 것만 했냐?!]

“진짜 하고 싶은 것만 했나 보다!”

[난놈일세!]

“시간표를 저런 식으로 신청해 놨으니 아직 자퇴를 안 한 걸지도?”

현시우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희 괜한 걱정을 했네요. 현하빈을 마주친다니? 잘 피해만 다니면 그럴 일은 없겠군요…….”

[흠, 확실히 저번에 본 현하빈의 마법 실력을 생각하면, 여기 수업 들을 수준은 아니지. 이참에 여기서 교양과목이나 들으며 버티는 것도 현하빈 입장에선 괜찮겠어.]

뒤늦게 그들은 납득인지 체념일지 모른 해석을 내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확인한 현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제 점심시간도 끝났으니 새 교장으로 자기소개하러 가야겠네요.”

끄응.

그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별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그렇다 쳐도, 지석이 네가 웬일로 강사를 같이 지원해? 학교에 관심 있는 줄 몰랐는데.”

솔라리스 집무실.

고개를 갸웃하던 지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지석이 너, 한때 해X포터 열심히 봤었지! 설마 그래서냐? 마법학교 가보려고?”

“내가 해X포터 본 적이 언젠데! 게다가 거기랑 여기랑 같아? 여긴 현대 한국의 고등학교라고!”

“아 왜, 그래도 너 해X포터 기숙사 테스트도 할 정도로 진심이었잖아. 너 그때 기숙사 뭐 나왔었지?”

“뭐였을 것 같은데?”

“음……. 후플X프? 확실히 색깔은 지금이랑 어울리긴 하네.”

금안에 금발. 거기다 노란색 상징인 후플X프라니. 완벽한 깔맞춤이다.

“생각해 보니 금색에 레드도 꽤나 어울리는 조합이야. 그리X도르도 괜찮지.”

“왜 색깔만 보고 골라? 내가 그렇게 특징이 없어?”

“똑똑한 래X클로나 야망 넘치는 슬X데린은…… 흠, 뭔가 너랑은 안 어울려.”

“뭐?”

지금 야망도 없고 안 똑똑할 것 같다고 멕이는 건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는 누나는?!”

“나? 나는 안 해봤는데 뭐가 어울릴까?”

지세의 말에 조용히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길드장님은 확실히, 래X클로나 슬X데린도 잘 어울리시겠군요.”

제일 잘 어울리는 건 역시 두 분 다 후플X프시지만.

“……?”

채남매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비서였다.

“이 비서님도 해X포터 봤어요?”

채지석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혼자 떨어져 기계적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던 이준휘 비서. 그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제 티셔츠랑 슬리퍼 안 보셨습니까?”

이준휘 비서의 아이템에는 항상 ‘도비 이즈 프리’가 적혀져 있었다.

“……아, 맞네.”

“난 그냥 평범하게 자유를 꿈꾸시는 줄 알았지.”

“이게 복선이었다고?”

바로 납득하는 채남매의 사이에서 이준휘 비서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두 분 다 일 안 하시고 잡담만 하시는 것 같은데요?”

채지세는 자연스럽게 곁에 있는 동생을 향해 말했다.

“흠. 역시 이준휘 비서님은 저렇게 성실하고 정의로운 걸 봐선 후플X프야.”

“아냐, 누나. 언제나 퇴사에 대해 용기 있게 말하는 걸 보면 그리X도르가 틀림없어.”

“평소에 은은하게 웃으면서 욕하는 모습이나, 우릴 압박하는 걸 보면 슬X데린도 찰떡이란 말이지.”

듣다 못 한 이준휘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테스트에서 래X클로 나왔으니 두 분 다 조용히 해주시죠!”

“래X클로였구나?”

“래X클로셨어!”

“…….”

탁탁. 말을 마친 이준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서류를 정리했다. 괜한 바보짓에 휘말렸다는 듯 약간의 현타가 온 표정이었다. 채지세가 덧붙였다.

“비서님은 울림국제고 방문하실 생각 없으세요? 나름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주는 마법 계열 헌터신데.”

“그러게. 거기다 해X포터 과몰입하시는 것까지 완벽하신 것 같은데요.”

“셋이나 가면 누가 집무실을 지킵니까?”

게다가 해X포터 과몰입은 저 남매 상사가 다 하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그는 딱 부러지는 말투로 덧붙였다.

“게다가 여기서 학교로 출장업무까지 해야 한다면 저는 역시 퇴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역시 아무리 해X포터에 대한 애정이 있다 해도 업무 과중은 이길 수 없는 거다.

“길마님도 부길마님도 이참에 알아두시죠. 참고로 제가 해X포터에서 가장 응원했던 인물은…….”

“설마 도비입니까?”

“네! 그가 자유를 찾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이었죠!”

“…….”

이 인간, 도비에 진심이다.

채남매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저, 비서님.”

“말씀하시죠.”

“울림국제고 가도 업무는 열심히 할 테니 안심하세요.”

“약속하겠습니다.”

진지하게 약속하는 채남매.

“하하, 두 분 다 갑자기 왜 그러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그 말에 다시 영혼 없는 웃음을 되찾은 이준휘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안 그러시면 제가 알아서 잡으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

이 인간, 사실 노예가 아니라 추노꾼이 천직일지도?

* * *

“……그러니까, 우린 일주일에 두세  시간만 강의하기로 한 거지.”

그 이상 솔라리스 업무에서 빠지면 이준휘 비서를 볼 면목이 안 설 거다.

울림국제고에 도착한 채남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은 그들. 뒷자리에 앉은 채지세가 턱에 손을 올렸다.

“아예 안 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는 없었어. 하빈이를 보러 오는 것도 좋지만. 사실 우리가 오는 이유는 현하빈뿐만이 아니니까.”

“……맞아.”

채지석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현하빈 때문에 울림국제고에 관심을 가졌을지 몰라도 지금 상황은 심상치가 않지.”

“지금 울림국제고 교장이 무려……!”

“피데스 님이니까.”

‘웬만한 일에는 움직일 분이 아니신데.’

심각한 표정의 채지석을 보며 지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야. 이번엔 칼리고의 강태서도 교원으로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 칼리고 측에서도?”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나지?”

지세가 미간을 찌푸렸다. 현하빈과 피데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 두 명이나 모여서 그런지 이번에 대체 무슨 일이 터질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자신도 이번엔 미래가 잘 안 보인다며 답답해서 가슴을 칩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동안 예지력으로 돈밖에 못 벌어주고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별 도움이 안 되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쏟습니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언제나 감사한걸요.”

지세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울림국제고의 교정을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예지력을 쓰지 못해도 감이 온다.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은 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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