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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7) (87/268)

087. 현하빈과 마법사의 돌 (5)

시무룩하게 대답하던 하빈은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서윤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정작 성실한 납세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얘네가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멀쩡한 애를 울리려는 거야?’

물론 납세자라 해도 그런 막말을 허용해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단지 현하빈은,

“세금도 안 내면서 납세자 사칭으로 불링하는 거, 참아줄 수 없다!”

“……뭔 이런 또라이 X끼가!”

“우, 우리 그냥 화장실 가자.”

눈치 보던 서윤이 기겁한 목소리로 몰래 속삭였다. 그녀가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빈에게 조언했다.

“쟤네는 원래 시비 잘 걸기로 유명한 애들이야. 정말 안 엮이는 게 좋아. 괜히 우리만 벌점 받을 수도 있어…….”

하필 청력이 좋았던 상대편도 그 말을 다 들었다.

“야, 말 다 했냐?”

“뭐? 우리가 시비를 잘 걸어?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윽……!”

당황한 서윤이 달팽이처럼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 기세를 몰아 학생들이 기세등등하게 그들을 몰아세웠다.

“F반 애들끼리 발끈하는 수준이 딱 그 정도지, 뭐. 실력이 안 되니까 인성으로 물고 늘어지는 거.”

“벌점 무섭다고 핑계 대는 것도 웃기네.”

“난 벌점 안 무서워.”

“그래 안 무섭…… 뭐라고?”

자연스럽게 비아냥거리던 학생이 멈칫했다. 벌점 안 무섭다고 한쪽은 다름 아닌 현하빈이었다.

하빈이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벌점 안 무섭다고. 난 자퇴각을 재고 있거든!”

“뭣, 무슨?!”

“자, 자퇴?”

“허세 부리지 마!”

예상치 못한 발언에 그들이 발끈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입학식 첫날에 자퇴각을 잡는 미친놈이 어딨어? 그것도 울림국제고인데!”

[정말 놀랍게도, 그게 너희들 앞에 있는 자다…….]

이 인간은 진짜다.

사정을 다 아는 아헤자르만 체념한 채 중얼거렸다.

“하하, 자퇴.”

자퇴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B반 학생이 헛웃음을 지으며 하빈을 노려보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너는 자퇴하는 게 답일 수도 있겠다. 쪽팔리게 F반으로 다닐 바에 자퇴하고 일반고 가지 그러냐?”

“왜?”

“F반에 있을 정도면 무능력에 가까운 F급일 텐데 굳이 여기 다닐 필요가 있어? 과욕이지.”

과욕.

“…….”

그 말에 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냥 여기서 헌터 관련 공부를 더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수련을 더 한다거나?”

“수련? 어차피 네가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난 못 넘어. 올해, 아니 이 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발끝도 못 따라올걸.”

B반 학생이 어깨를 으쓱했다. 명찰에 적힌 학생의 이름은 송제희. 열일곱의 나이에 B급을 받은 제희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B급과 F급의 격차라.

이 나이에 B급의 스탯을 이룩한 건 정말 굉장한 성취도였다.

‘올해 입학생에 A급이랑 B급이 좀 많이 있어서 그랬지, 내가 배치고사 한 문제만 더 잘 받았어도 A반에 배정되었을 실력인걸.’

울림국제고의 반은 헌터 등급과 동일하게 배정되는 게 아니다.

등수별로 줄 세우기를 해서 A반부터 D반으로 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S급도 A반, A급도 A반. 자리가 남으면 B급도 A반에 들어올 수 있고, 자리가 없으면 A급이라도 B반으로 밀려날 수 있고.

‘어쨌든 나 정도면 이 학교에서 최상위 클래스.’

그에 비해 저쪽은 F반.

다른 반과 다르게 F반은 좀 예외였다. 여긴 오직 F급 학생들만 모아 배정한다. 그러니 F반에 있으면 무조건 F급이라는 의미.

F급에서 B급까지는 고작 고등학교 3년 안에 따라잡을 격차가 아니다.

‘그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다 B급이 되었게?’

“알아들어? 너흰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 넘어.”

“만약 넘으면?”

하빈이 물었다.

“흠, 3년 안에 날 넘는다고? 네가? 나를? 나 B급인데?”

“넘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재차 던져진 질문에 제희는 귀찮다는 듯 답했다.

“야, 중2병 망상도 정도껏이지. 그런 건 되고 나서나 말해. 진짜 그게 되면 내가 뭐든 해준다. 뭐, 발이라도 핥아?”

비아냥이 섞인 말에 하빈이 진심으로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에엥! 미안하지만 그건 더러워서 싫어! 그보단 평범하게 매점 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운동장 네발로 돌기? 물론 그전에 이쪽한테 사과는 당연히 해야 하겠지만.”

‘이 자식은 뭘 믿고 이렇게 태연하지?’

기묘할 정도로 태연한 현하빈의 반응에 제희는 문득 위기감을 느꼈다.

‘설마 다른 등급인데 일부러 F반에 있다거나. 그런 반전이 있진 않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었다. 제희는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학생들을 배치고사 때부터 다 외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여자애는 입학식 때부터 F반에 서 있는 걸 봤고 말이다.

‘게다가 강자라면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마력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녀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F급이란 뜻이지.’

아무리 봐도 F급이 확실했다. 제희가 숨을 돌릴 때였다.

“거기,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탁탁탁.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다급한 발걸음.

“잠깐 기다리라고 했더니 설마 싸우고 있는 거야?”

아까 입학식에 참석했던 선생님들 중 한 명이었다. B반과 C반 학생들이 곧바로 모르쇠를 했다.

“아, 저희 그냥 화장실 가려던 중이었어요.”

“네. 그냥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 보고 인사한 것뿐이라고요.”

기다렸다는 듯이 변명하는 그들. 놀랄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선생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다가, 현하빈을 보는 순간 딱, 멎었다.

“아니! 그쪽은 설마 현하빈 학생?”

“……맞는데요?”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저기요.”

하빈이 척, 하고 F반 교실을 가리켰다. 선생님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흔들렸다.

“왜 거기에…… 혹시 안 왔나 싶어서 현하빈 씨…… 아니, 현하빈 학생을 찾고 있었어요! 방금 온 건가요?”

“입학식 때부터 있었는데요.”

“아, 이런! 반 배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혼선이 있었나 봐요.”

재빠르게 팔락팔락 팔에 든 출석부를 넘긴 그녀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최근에 특례입학을 한 거다 보니 반 배정 과정에서 누락이 된 건가 보네요.”

“특례입학……?”

그걸 듣고 있던 송제희와 그 일행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뭔가 굉장히 쎄한 단어인 것 같았다.

‘특례입학’도, ‘반 배정 과정에서 누락’도.

“…….”

그들이 불길한 기분에 서로를 바라보고 꿀꺽, 침을 삼키는 순간.

선생님이 쐐기를 받았다.

“A급 헌터로 특례입학한, 현하빈 양 맞죠?”

“……!”

‘A급?!’

‘헌터?’

‘특례입학?’

차례로 얼굴이 창백해지는 학생들. 현하빈은 똥 밟았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느릿느릿 대답했다.

“네…….”

“하빈 양, 괜찮다면 같이 교무실에 잠시 따라오겠어요?”

“네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터벅터벅 선생님을 따라가는 현하빈. 그녀가 등을 돌리려다가 슬쩍, 다시 학생들을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너네 이거,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죽는다?’

“…….”

‘내가 A급이니 헌터니 특례입학이니. 쓸데없는 정보 알리고 다니면 끝이야 끝!’

그리고 하빈은 송제희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너는 약속을 지켜야지?’

그녀가 입모양으로 덧붙였다.

약속대로.

네발로.

기어라.

“……!”

‘네발제희야! 기대할게!’

충격 받은 그들을 내버려둔 채 하빈은 삼선 슬리퍼를 끌며 선생님을 뒤늦게 따라갔다.

“앗, 선생님! 저 근데 화장실 좀 들렀다 가도 돼요?”

“어? 갑자기?”

“네, 사실 아까 가려다가 미루고 있었어요!”

“그럼 다녀와야죠.”

“네! 감사합니다!”

* * *

그렇게 교무실에 도착한 그들.

마침, 탁 하고 하빈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하빈 양은 정식 헌터라면서요?”

“네.”

“다시 고등학교에 오는 걸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학구열이네요.”

“하하…….”

[학구열은 무슨! 법망 피해서 온 거면서!]

“흠흠, 제가 원래 학구열이 좀 있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하빈은 앞에 놓인 화려한 찻잔을 들었다.

교무실은 채광이 잘 드는 위치였다. 아늑하게 꾸며진 빈티지 테이블과 의자. 찻잔도 꽤나 고급스러운 게 마법학교스러운 환상을 심어 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차는…….’

후루룹.

‘율무차잖아?!’

과거 종종 교무실에 갔을 때 수학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권하곤 하던 인스턴트 율무차.

이게 여기도 있을 줄은 몰랐다.

‘으음, 이건 아직도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어.’

하빈의 입꼬리가 주르륵 내려갔다. 어쩐지 솔라리스 집무실에서 내주던 하겐더즈 아이스크림과 착즙 오렌지주스가 무척 그리워졌다.

물론 꼭 다과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는 가시방석이었다.

“이력이 화려하시더라고요! 킬스크린 방문하신 적도 있으시다고.”

“아, 그 어쩌다 보니…….”

어색하게 웃는 현하빈. 그녀는 찔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근데 선생님……. 왜 아까부터 존댓말을 쓰세요…….’

부담스러워……!

그랬다. 아까부터 현하빈을 향한 선생님의 눈빛은 이미 학생을 향한 시선이라기보다 ‘킬스크린까지 다녀왔으면서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고등학교를 선택한 용기와 열정이 있는 동료 헌터’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마 이곳의 학생들보다 경험도 많고 실력도 뛰어나실 텐데 학생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고요.”

“네에…….”

거기다 대고 차마 ‘저는 학적만 이용하고 땡땡이칠 겁니다!’라고 말할 엄두는 안 났다.

하빈의 대답에 선생님은 만족스럽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온 출석부를 펼쳤다.

“자아,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일단 하빈 양은 배치고사가 끝난 이후에 추가편입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반 배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요?”

“아직 반이 없는 상태죠.”

고개를 끄덕인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하빈 학생은 애초에 A급 헌터이기 때문에 모든 반에 들어갈 자격이 있어요. 배치고사를 보지 않아도 공식적으로 검증된 등급이 있으니까 반발도 없을 거예요.”

선생님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말없이 그냥 A반에 넣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특수 케이스이다 보니 교무회의 끝에, 하빈 양이 원하는 반에 넣기로 했어요.”

어느 반에 들어가도 된다라. 아무리 자격이 있었다지만 꽤 좋은 특혜인 건 맞았다.

사실 이 뒷배경에는 현시우의 입김도 살짝 있었다. 반이라도 원하는 반에 들어가야 현하빈이 자퇴할 확률이 낮아질 것 같아서 내린 판단. 물론 지금 시점의 현하빈으로서는 그걸 알 리 없었지만 말이다.

“반이라……. 제가 원하는 반은요.”

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 조언을 덧붙였다.

“나는 A반을 추천해요. 비록 표면상으로 A반부터 F반까지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다고 홍보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커리큘럼 수혜는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거든요. 고급 과정을 듣는 A반에게 더 많은 혜택과 지원이 갈 수밖에 없죠.”

“그럼…….”

“역시 A반이 좋겠죠?”

“엥? 아뇨?”

하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가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F반이요!”

“네?”

“F!"

“아니 왜?!”

[왜?!]

‘당연한 거 아냐?’

[또 힘을 숨기니 마니 하려고 그러느냐? 아까처럼 무시하는 녀석들을 놀려주려고?]

‘뭐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뭐하러 굳이 그런 짓을 해? F반에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있어!’

그러자 아헤자르가 왠지 감복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구나. 아까 그 여서윤이란 학생, 그 친구가 마음에 쓰여서 그랬구나. 이 녀석, 사실은 따뜻한 마음을……!]

‘엥? 그것도 아닌데?’

[뭣이? 그럼 뭣 때문이냐!]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아까 복도에서 애들이 떠든 말들. 거기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F반 애들은 다칠까 봐 대련 수업도 못 한다며?’

F반에서는 대련 수업이 빠진다.

‘와, 이런 개꿀이 있다니!’

실수로 대련 비스무리한 거라도 했다가 힘 조절 잘못해서 남의 귀한 집 아들딸 다치게 하면 어쩌나. 그 부분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다!

하빈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뻔히 보이는 꿀밭이 있는데 절대 마다할 필요 없지.

[하아……. 그럼 그렇지.]

아헤자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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