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6) (86/268)

086. 현하빈과 마법사의 돌 (4)

“……네가 왜?”

에라타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강태서를 보았다.

“평소엔 하라고 해도 빼던 놈이 웬일로 먼저 하겠다고 하지?”

“한다고 해도 불만인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군.”

“…….”

‘진심인가?’

에라타는 태서를 곁눈질했다. 강태서는 무심하다 못해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에라타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태서가 이어 말했다.

“솔라리스와 칼리고는 서로 은근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참여한다고 해도 의심을 사지 않아. 그래서 직접 참여하기에 좋다. 나는 국적도 한국이라서 문화 적응에도 좋을 테고.”

“그런 사람을 구해서 시켜도 되잖아. 네가 꼭 직접 갈 필요가 있어?”

“그래? 그럼 다른 사람을 시킬까?”

강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직접 참여하는 성의를 보이려고 말을 꺼낸 건데.”

“직접…… 참여하는 게 제일 낫긴 하지…….”

‘……음? 아닌가?’

에라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별 상관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걸 보니 별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에라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좋은 제안인데 왜 기분이 찜찜한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강태서가 간만에 멀쩡하고 호의적인 소리를 해서 그런가?

에라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도무지 강태서 저놈이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한데.’

갑자기 다른 마이너 패치의 인원들이 움직이면 꽤 티가 날 것이다. 울림국제고와 전혀 연고도 없던 마이너 패치 일원이 갑자기 그 학교에 손을 뻗는다?

피데스랑 채남매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그 학교에 어설프게 접근했다간 오히려 꼬리를 밟힐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끄나풀을 보내자니 사안이 사안인지라 마음이 놓이지 않고.

“내가 보기엔 좋은 의견인데?”

마침 ‘다섯 번째’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웬일로 고고한 ‘첫 번째’님이 나서주나 싶지만, 나서주면 좋은 거지, 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찜찜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야?’

에라타가 꾸욱 인상을 쓰며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 걸지도 몰라.’

살면서 배신만 당하고 살았더니 습관처럼 굳어진 의심들이다. 솔직히 이제껏 강태서가 뻣뻣하게 굴었을 뿐 그들에게 딱히 해를 가한 적도 없고, 방해를 한 적도 없지 않은가? 모임에도 나오라면 일단 나오고.

계속해서 드는 찜찜함은 기우인지도 모른다.

‘강태서처럼 깨끗한 이미지의 멤버가 필요하기도 하고.’

쓸 수만 있다면 좋은 패다.

쓸 수만 있다면.

에라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가봐, ‘첫 번째’. 먼저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꽤 자신이 있나 보네.”

그녀도 결국 동의의 사인을 보냈다.

‘맞아, 괜한 걱정이지. 어차피 한배를 탔는데.’

그들은 애초에 어설픈 신뢰 따위로 뭉친 이들이 아니다. 혹여라도 다른 꿍꿍이를 가졌거나 배신을 했다간 시스템 관리자가 직접 바로 소멸시켜 버릴 테니, 그들의 목숨 자체가 걸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관리자님에게 징계나 엄청난 패널티를 받을 것이다.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닐 테니까.’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파해.”

에라타는 딱, 손을 튕기며 회의의 마지막을 알렸다. 그녀가 강태서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좋아, ‘첫 번째’.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이번 기회에 기대해 보지.”

“네 기대 따위 필요 없어.”

“하.”

역시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라니까. 강태서를 노려보던 에라타는 고개를 저었다.

* * *

‘장학생? 웬 장학생이야!’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당황했던 현하빈. 그녀가 얼굴을 구길 때였다.

-……아, 방금 착오가 있었군요. 장학생 명단을 잘못 받았습니다. 다시 부를게요.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을 향해 누군가 달려와 새로운 파일을 건넸다.

-다시 부르겠습니다, 김세영, 서아린…….

새로 받은 명단은 아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빈의 이름이 쏙 빠진 채였다.

“……흐음?”

‘진짜 착오가 났던 건가?’

어쨌든 단상에 나갈 일은 없으니 안심이다. 하빈은 출구를 향해 돌렸던 발걸음을 다시 원위치시켰다.

“저, 울림국제고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마침 옆에 있는 서윤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녀가 소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F급이라서 고민 많이 했는데. 일반고 갈지 여기 다닐지. 그치만 혹시라도 여기서 강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좋으니까. 한때 난 헌터가 꿈이었거든.”

서윤이 부러운 눈빛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장학금을 수여 받는 학생들은 모두 S급 아니면 A급들.

“……부럽다. 난 왜 F급일까.”

“음…….”

하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나이에 S급과 F급의 격차가 나는 건 각성할 때부터 그 능력치를 타고난 것. 그 간극을 따라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현하빈이 비각성자였던 시절, 수도 없이 벽을 느꼈던 것처럼.

서윤이 말을 이었다.

“아, 아니지. 각성한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일인데 내가 실언했어. 사실 각성한 날 부모님이 얼마나 축하해 줬는지 몰라. 걱정도 많이 하셨지만…….”

“걱정할 만하지.”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직업이 각광받는 것과는 별개로, 자식이 던전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부모는 드물었다.

부모님 세대에게 가장 선호 받는 직업은 거대 길드 소속 제작계 헌터. 혹은 포션과 아이템을 제작하고 고액 연봉 꼬박꼬박 타가는 직장인 헌터가 인기가 높았다. 게이트 전으로 따지면 약사 포지션이 아닐까?

그다음은 병원 상주 힐러.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병원에 오는 사람들만 치료해 주기 때문에 의사를 대체할 신의 직장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쪽은 긴급 상황 시 던전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제작계보다 선호도가 조금 떨어진다.

물론 제작계 헌터와 힐러 클래스라고 해서 꿀만 빠는 건 아니다. 이쪽 랭커들은 힐러든 제작계든 던전에 들어가서 전투와 보조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투계 못지않게 강력하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일도 비일비재. 대표적으로 딜러이자 힐러인 채지세가 있다.

이러한 길드 소속 제작계와 병원 상주 힐러는 대부분 B급에서 D급이 차지하는 직업.

물론 상위 클래스 헌터들도 몸을 사리는 사람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다. 전투계 헌터들도 돈 좀 벌었다 하면 바로 은퇴하고 놀러 다닌다고 욕을 먹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

하빈이 대답을 해주자, 서윤은 마음의 거리가 좀 가까워졌는지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울림국제고는 직접 와보니 더 좋은 것 같아. 건물 정말 멋지지 않아? 여기 예전에는 고급 아파트 부지였다던데.”

합정역 근처에는 원래 레세나폴리스와 푸름지오 아파트가 있었는데, 게이트 사태를 거치며 황폐화되자 울림국제고 부지로 재탄생된 것이었다. 서윤이 종종거리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교복도 마음에 들어!”

하빈은 흘긋 학생들의 교복 차림을 둘러보았다. 울림국제고 교복은 짙은 네이비와 은색 조합으로 만들어진 멋진 제복 스타일의 디자인이었다.

자수로 정교하게 장식된 학교 인장은 물론, 넥타이 위에는 고급스러운 펜던트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굉장히 예쁜 디자인이겠지만…….

현하빈이 보기에는…….

‘역시 어그로를 너무 끄는 디자인이야!’

진짜 ‘마법학교’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마법학교’스럽다. 솔직히 당장 아이돌그룹 ‘갤럭시 걸’의 ‘이루어지리라’ 무대에 올라도 위화감이 없을 차림새. 그걸 신난다고 입고 있는 여서윤을 보니.

‘이 친구, 의외로 관심받는 걸 꽤 즐기는 타입인가?’

그 와중 여서윤은 얼마나 내적 친분을 쌓은 건지 벌써 같은 방 쓰자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우리 나중에 기숙사 쓰면 같은 방 할래?”

“나 통학 생각했는데.”

“통학생도 방 하나씩 준대! 같은 방 하자!”

순수한 제안일 수도 있었지만 하빈은 왠지 의심이 앞섰다.

‘……이 친구, 꽤 머리가 좋은걸?’

자신이 기숙사에 안 들어가면 기숙사를 서윤 혼자 쓸 수 있을 테니 상당히 괜찮은 선택지다.

‘혼자 2인실 같은 1인실을 쓸 수 있는 큰그림!’

현하빈은 그 빅 픽처에 무심코 감탄했다.

‘꼭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기숙사에 잘 들어갈 일도 없고, 딱 봐도 애가 얌전한 게 같은 방 써도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흠, 그래. 좋아.”

하빈이 대답하는 사이, 어느새 입학식이 모두 끝났다. 마침 학생들은 삼삼오오 열을 맞추어 선생님의 인솔에 따르고 있었다.

“이제 반으로 돌아가려나 봐!”

그들이 안내받은 곳은 F반이었다. 학생들을 F반에 데려다 놓은 선생님은 잠깐 교직원 회의가 있다며 모두를 남겨놓고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서로 인사들 하고 있거라!”

다급하게 나가는 걸 보니 무언가 급한 연락을 받은 모양새였다.

“뭐야?”

“우리 그냥 여기 있으면 돼?”

처음에 웅성거리던 학생들은 빼꼼 교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각 반의 선생님이 다 빠지자 옆반 교실도 이미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몇몇 학생들은 서로 알은체를 했다.

“어? 너도 울림국제고 왔네! 너 몇 반이야!”

“나 D반!”

“점심 같이 먹자!”

“엥 넌 언제 C반 갔어? 중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잖아!”

“너도 빨리 C반 오던가! 4월 모의고사 잘 보면 되지.”

학생들끼리 남겨놓는 상황에서 자정적으로 통제가 될 리 만무했다. 한번 대화의 물꼬를 트자 복도에 나와서 떠드는 학생들도 삼삼오오 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앉아 있으라고는 안 했잖아?”

“오면 들어가지, 뭐.”

“학교 끝나고 피방 가쉴?”

“반에 아는 애 있냐?”

같은 헌터중학교 출신 인원들은 이미 친한 학생들이 많아 벌써부터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물 만난 듯 떠드는 아이들. 거기까지는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F반 앞을 지나가는 몇몇 아이들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저기가.”

“그 F반이지?”

“F 정도면 일반인이랑 별 다를 바가 없다던데.”

“대학 노리고 학교 들어온 건가 보네.”

“헌터학교에 들어와서 적응하느라 힘들겠어.”

“다칠까 봐 대련도 함부로 못 한다며?”

대부분 걱정이 담긴 말투였지만 은연중에 으스대는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다. 말을 한 인물들은 각각 B급과 C급.

절대 F반으로 떨어질 일 없다는 것에 스스로 안도감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F급과 자신들의 격차에 흐뭇함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흐음?”

그걸 듣던 하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어?”

곁에 있던 서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다급하게 하빈에게 속삭였다.

“쟤, 쟤네가 하는 말은 무시해! 그냥 심심해서 시비 거는 거니까. 괜히 부딪혔다간 선생님한테 벌점 받아!”

꼬오옥 하빈의 소매를 잡는 서윤.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화장실 가려는 건데?”

“아…….”

“급해!”

“아……. 미, 미안!”

머쓱해진 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그럼 같이 가자…….”

“그러던가?”

‘화장실 같이 가는 건 고등학생의 국룰이지!’

그럼그럼.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복도로 나갔다.

드르륵.

“……!”

갑자기 열린 뒷문에 밖에서 뒷담을 하던 학생들이 흠칫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뒷담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들으라는 듯 말을 이었다.

“……쟤가 여서윤이지?”

“알아?”

“내가 각성 전에 같은 중학교 다녔는데 쟤 3학년 중간에 각성했다고 신나서 우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거든.”

“울 정도였는데 F급?”

“개웃기지? 그래도 그게 한계인 걸 어떡하겠어?”

흠칫. 이야기를 들었는지 여서윤의 발걸음 속도가 늦어졌다. 그걸 눈치챈 학생들은 멈추기는커녕 보란 듯 키득거렸다.

“한계라고 할 것도 없어.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사실상 일반인이랑 다름없는 능력치로 울림국제고 왔잖아?”

“아, 그렇네.”

“우리 학교 시설 봐. 지원도 빵빵하고 세금 엄청 들어갔는데 F반 학생까지 지원해 주는 건 솔직히 너무하지.”

“이게 바로 세금 날먹, 대학 티오 날먹.”

“이런 최약체 애들한테까지 우리랑 동급의 지원을 해준다니. 역시 선진국 코리아.”

“……얘들아.”

그 순간, 하빈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서윤이 황급히 하빈을 붙잡았다.

‘나, 나서지 마! 나는 괜찮다니까!’

“아니, 그 문제가 아니야.”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하빈이 입을 열었다.

“얘들아, 너희 세금 내봤니?”

“어?”

“에, 에엥?”

“내봤냐고.”

“……?”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떠들던 아이들이 주춤, 물러섰다.

후우…….

하빈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인생의 쓰디쓴 고초가 느껴지는 듯 깊은 한숨. 그 모습을 보던 무리의 아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우, 우리가 어떻게 세금을 내!”

그 말에 하빈이 해맑게 대답했다.

“그래. 안 내봤으면서 생색내는 척 헛소리하지 말자?”

물론 내봤다고 해도 막말을 정당화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하빈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교육세 내는 건 안 아까웠었는데…… 후.”

그러자 녀석들이 발끈 대꾸했다.

“뭐라는 거야!”

“그러는 너는 냈냐! 너도 부모님 돈으로 세금 내고 온 걸 거면서!”

“엥, 아닌데. 내가 냈는데.”

“내면 얼마나 냈다고 그래!?”

“많이 냈는데…….”

하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벼룩의 간을 뽑힐 정도로 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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