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3) (83/268)

083. 현하빈과 마법사의 돌 (1)

“노트랑 필기구는 안 사?”

“거기 공부도 해? 나 안 할 건데.”

“하는 시늉이라도 해라.”

“……귀찮아.”

하빈의 말을 무시하고 툭툭 노트를 카트에 던져 넣는 현시우.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꼭 처음 고등학교 입학할 때 같네.’

입학하고 얼마 안 가 게이트 사태가 터졌지만, 적어도 현하빈의 첫 고등학교 입학은 상당히 평화로웠다.

걱정되던 건 반 친구를 어떻게 사귈지, 수능을 어떻게 치고 어느 대학을 갈지. 그 정도뿐이었던 그 시절.

그때는 부모님이랑 현시우까지 다 함께 왔었다. 당시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현시우가 툴툴거리며 카트를 밀었고.

‘현하빈, 고등학교 가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나처럼 대학 잘 가려면 1학년 때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고.’

‘와, 재수 없어. 본인 대학 잘 갔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지?’

‘오빠로서 진짜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까 들어라. 아, 스터디 플래너도 좀 쓰고. 이거 도움 많이 돼.’

옆에 있던 엄마도 거들었었지.

‘오빠 말 들어. 저래도 다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일걸.’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살아봤잖아. 적어도 나는 혹독한 고3 수험생활을 겪어 봤거든? 내 조언을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러고는 어쨌더라.

“자, 담요랑 물병도 챙겨. 고등학생 필수품이지?”

……이건 엄마가 했던 말이었는데.

‘담요랑 물병도 챙기고. 물병은 아침에 차 끓여서 넣어 줄게…….’

“…….”

달그락.

하빈은 현시우가 내민 담요와 물병을 말없이 카트에 담았다. 마침 다음 블록을 확인한 현시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 여기 있네. 삼선 슬리퍼. 무슨 색 할까?”

“하늘색이랑 보라색.”

“삼선 슬리퍼는 검은색이 국룰이지!”

“엥?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취향 존중 좀. 난 하늘색이랑 보라색!”

“그럼 하늘색, 보라색이랑 검은색까지 해서 세 개 사. 예비용으로. 더러워지거나 찢어지면 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착착 카트에 슬리퍼를 담은 현시우가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다.

“노트, 필기구, 휴지. 음……. 방석……도 필요한가?”

하빈은 슬쩍 눈을 굴려 현시우 쪽을 보았다. 그가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이 하빈의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입학 준비물 TOP10! 이거면 나도 새 학기 걱정 끝!

‘저걸 검색해서 보고 있었던 거야?’

“……웬일로 열심히 챙긴대?”

5년 전, 첫 고등학교 입학 준비물 사러 왔을 땐 현시우는 잠깐 봐주다가 갑자기 친구랑 약속 있다며 중간에 빠졌다. 하빈과 부모님 셋이서 나머지를 골랐고 말이다.

“내가 안 챙기면 넌 귀찮다는 이유로 교복만 입고 달랑 학교 갈 것 같아서.”

“그게 뭐 어때서?”

“칫솔 골라.”

현시우는 대답 대신 칫솔 진열대를 가리켰다. 각양각색의 칫솔이 빼곡하게 들어찬 진열대를 보며 하빈이 으음, 하고 손을 턱에 올릴 때였다. 뒤에서 현시우의 뒤늦은 말이 들렸다.

“어쩌다가 들어가게 된 학교지만, 혹시 고등학교 다니면서 하고 싶은 거 있었으면 해봐.”

“뭐래.”

[야, 너 웬일로 감성적이다?]

네아이바가 깐족댔다. 현시우는 대꾸하지 않고 반대편의 치약 묶음을 집어 들었다.

[왜, 현하빈이 너 찾으려고 자퇴했다는 거 들어서 좀 찔렸냐?]

“…….”

이번 회차 현하빈은 집 대출금을 상환하고 홀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현시우를 찾으려고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어차피 1회차 때도 현하빈은 자퇴했어요. 그땐 세상 구해보겠답시고 굴렀던 거지만.’

이랬든 저랬든 고등학교를 맛보기로 조금 다녔던 현하빈.

‘처음 고등학교 입학할 때 쟤 그래도 좀 들떴었는데.’

현시우의 스터디 플래너 고르라는 말에 한참 노트 코너를 노려보고 있던 현하빈을 기억한다.

‘그래. 그래도 내 꿈을 이루려면 가야 하는 대학이 있으니까! 더러워도 공부는 해야지.’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스터디 플래너를 집어 들던 그녀였다.

[……현하빈한테 꿈이 있었어?]

‘네. 뭐였더라, 변호사였나? 법조계였는데.’

[뭐? 뭐라고?! 거짓말하지 마! 쟤가? 쟤가? 저 무법자처럼 사는 애가?!]

‘게이트 사태 전에는 꽤 성실했어요. 1회차 때도…… 노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좀 결이 달랐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 싫다고 말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막판에라도 끝내고야 마는?’

[…….]

현시우는 고개를 돌려 하빈의 뒤통수를 보았다. 여기 홈풀러스는 게이트 사태에도 무사히 망가지지 않고 남은 몇 안 되는 추억의 장소였다. 어쩐지 이 장면만 보고 있으면 5년 전이라 해도 믿을 만큼 똑같은 광경.

‘아, 고등학교 가면 매점 있다던데! 난 꼭 쉬는 시간마다 매점 갈 거야!’

라고 말하던 현하빈의 뒷모습이 떠오를 만큼.

현시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매점에서 군것질도 해 보고…….”

좀 더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어 봐도 좋을 것이다. 수많은 책임감과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1회차나, 쉴 틈 없이 돈만 벌던 지난 5년 간의 시간보다는.

그리고 하빈은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이번에야말로 학교 담을 넘어봐야지.”

“?”

“유급도 해봐야겠어! 땡땡이는 당연히 쳐볼 거야. 시험지엔 백지를 내고 오엠알 카드에 별을 그려본 다음……!”

[쟤는 애초에 평범하게 생활할 생각이 없구나?]

“…….”

엄청난 스케일에 둘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들어가자마자 자퇴하진 않겠네요.’

거기에 위안을 삼아야 하나?

울림국제고는 과연 현하빈을 받은 게 축복일까, 불행일까?

[나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

“뭐어?”

“하빈이가 학교에 간다고?”

“현하빈이?”

“학교에?”

“……뭐야? 반응 왜 이래?”

솔라리스 집무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채지세와 채지석 사이. 소파에 앉아 있던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내가 학교 가는 거 불만이야?”

“……아니, 생각해 보니 의외로 영리한 방법이야. 학생은 각성자관리법에서도 상당히 자유롭지.”

채지세가 잠깐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이 물었다.

“네가 생각한 방법이야?”

“아니, 오빠가 추천해 주던데.”

“그래? 오빠라면 저번에 말했던 그 ‘현시우’라는 분을 말하는 거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저번에 하빈이네 집에 갔을 때 현시우를 봤다며 아는 척을 합니다!]

“누나, 저번에 하빈이 집에 갔다며? 그때 본 거야?”

“응. 하빈이 오빠분, 역시 하빈이를 닮아서 그런지 엄청 잘생기셨더라.”

“프큽.”

오렌지 주스를 쪽쪽 빨고 있던 하빈은 사레가 들렸다.

“코, 콜록! 누가 누굴 닮아? 하나도 안 닮았거든?”

‘닮았나 보네.’

채지석은 알만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세한테 조용히 물었다.

“설마 성격까지 닮았어?”

현하빈이랑 성격까지 닮은 인물이 또 하나 있다면 정말 감당 안 될 텐데.

“성격은…… 차분하고 경계심이 많아 보였지.”

지세가 서류를 팔락 넘기며 중얼거렸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우리 계약자한테 그 정도로 경계심 드러내는 인물은 피데스 이후로 처음이라며 속상해합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우리 계약자가 어디가 어때서 믿지 못하는 거냐며 가슴을 칩니다!]

‘믿지 못한다기보단…… 뭐, 들킬까 봐 지레 긴장한 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는데.’

현시우.

‘뭘 숨기고 있기에 그렇게 경계했던 거지?’

지세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시우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꽤나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우선, 지나치게 깨끗하다.

실종된 5년 동안 여기저기서 A급 헌터로 열심히 일했다는 자료들이 남아있지만…….

‘이건 작정하면 조작할 수 있는 영역이고.’

무엇보다 수상한 점은 현시우에게 예지 능력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이제껏 지세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예지력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사람은 딱 세 명이다.

피데스, 현하빈, 그리고 현시우.

피데스야 워낙 강자이기도 하고 가면으로 가리고 다닐 정도로 신상 보호가 철저한 데다, 지세가 모르는 스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치자.

현하빈 또한 피데스를 넘을 만한 강자이니 예외적인 무언가가 적용되고 있다고 치고.

‘그럼 현시우는?’

단순히 현하빈의 혈육이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느낌이 묘했단 말이야.’

“음……. 아무리 봐도 뭔가 있는데.”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자기가 보기에도 어딘가 수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런데 현하빈, 네가 들어가는 게 울림국제고라고?”

“응.”

[울림 국제마법학교라고 들었다! 마법학교라니! 굉장히 흥미로운 장소 같아서 나도 많이 공부하고 있지!]

“공부?”

갑자기 끼어든 아헤자르의 말에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헤자르는 평소 웹소설 어플을 사용하던 것과는 다르게 핸드폰으로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봐로 공부다!]

영상에서는 검은 망토를 두른 인영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지팡이로 레이저를 쏘는 익숙한 광경이…….

“김잘잘, 지금 뭐 봐?”

[마법학교라고 하면 해X포터라고 다들 추천하길래 해X포터를 보고 있다!]

“…….”

“…….”

아헤자르의 말에 집무실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빈이 뒤늦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미안하지만 해X포터랑은 많이 다를 텐데, 여긴 현대 한국이라서.”

[물론 그것도 안다! 그래서 한국의 하이틴 드라마도 보고 있다. 보다 보니 이곳의 학교는 아주 재미있는 곳이더군, 부잣집 아들딸들이 꼭 등장을 하고 로맨스가 넘치고 즐거운 수학여행이…….]

“아냐, 김잘잘. 그건 틀렸어. 한국의 현실 하이틴은 그쪽이 아니란다?”

하빈이 나긋나긋 다정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웬일로 상냥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톡톡, 핸드폰을 두드려 다른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슥하이캐슬>

제목과 함께 진중하고 비장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위올라이~!

“이게 봐로 찐 코리아 하이틴이지! 김잘잘은 이걸 보고 예습을 하도록 하자!”

[이, 이게 무어냐?]

“슥하이캐슬!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현주소!”

“야 뭘 저런 걸 추천……. 아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그만두는 채지석.

그렇게 아헤자르는 입학 전까지 슥하이캐슬을 내리 정주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충격 받아서 울었다.

* * *

“……잘잘아?”

[…….]

“잘잘아, 삐졌어? 슥하이캐슬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니?”

[삐지지 않았다!]

발끈해서 대답하는 아헤자르.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하지만 난 그 슥하이캐슬인지 하는 드라마를 믿지 않는다! 그건 허구니까! 현실과는 다른 구석이 있겠지. 그리고 여긴 마법학교지 않느냐?]

그들이 있는 곳은 울림국제고의 교문이었다. 순식간에 일 처리를 끝내버린 현시우에 의해, 현하빈은 아주 순조롭게 입학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울림 국제마법고등학교.

‘확실히 때깔은 좋네.’

교문에 적힌 교명을 확인하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림국제고의 교문은 헌터 양성을 위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만들어져서 그런지 그동안 보아 왔던 교문과는 차원이 달랐다.

높이 뻗은 고급스런 석재의 기둥과 희귀 속성 재료로 양각했는지 은은한 빛이 감도는 학교명.

멀리 보이는 학교의 외관도 상당히 멋스러웠다.

[마법학교에 마법 관련 클래스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니, 분명 다른 학교와는 다를 거라고!]

마침 그들을 앞질러 누군가 뛰어가고 있었다. 울림국제고 재학생인 모양이었다. 다급히 뛰어가는 소녀의 어깨로 펄럭, 하고 망토 같은 천 자락이 날렸다. 무척 낭만적인 광경이었다.

[저 망토를 봐라! 정말 마법사답지 않느냐!]

“아냐, 자세히 봐, 잘잘.”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저건 망토가 아니라 담요라고. 저번에 말한 고등학생의 필수품. 오늘 아침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그냥 두른 거야.”

[……?]

“자고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란 그런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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