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1) (81/268)

081. 삼자대면(三者對面) (4)

“……하빈이에겐 언제 솔직하게 말할 셈인가요?”

채지세의 예리한 찔러보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두루뭉술한 떠보기에 넘어갈 짬은 아니다.

현시우는 평소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일단 모른다고 둘러대기!

현하빈이 아헤자르 왜 놓고 갔냐고 할 때도 썼었던 만능 스킬이었다.

“…….”

그들 사이에 잠깐의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감돌았다. 현시우는 슬쩍 부엌 쪽을 건너다보았다.

‘현하빈은 왜 안 오는 거야?’

얘는 무슨 얼음을 만들어서 오나? 제발 이 어색한 상황을 끝내 달라고!

현시우가 절대 입을 열 기세가 아니자, 채지세가 별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현시우 씨, 지난 5년 동안 실종되었다면서요?”

‘다행히 이쪽 질문인가?’

5년 간의 실종.

현하빈과 워낙 친해졌으니 궁금해할 만은 했다.

[에이, 아쉽게. 피데스인 거 눈치챈 거 아니었네.]

‘뭘 아쉬워하시는 겁니까? 지금 누구 편이에요?’

[아, 맞다! 안 들켜서 다행이다. 다행.]

‘……꼭 다행은 아닙니다.’

당장 피데스에 대한 걸 안 물었다고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아직도 떠보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건 함정 질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그전에.

“그건 어떻게 아셨죠? 하빈이가 말하던가요?”

“그러지 않았지만…….”

“남의 사생활을 뒷조사하실 분으로는 안 봤는데.”

“뒷조사는 아니었어요. 우연히 알았습니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실 분으로도 안 봤는데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곧바로 깍듯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채지세. 그러나 재빠른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네, 물론 오지랖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하빈이는 제가 아끼는 동생이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더라고요.”

[와 얘네 엄청 친해졌나 봐! 언제부터 저렇게 아꼈대?]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러면 좀…… 귀찮아지는데.’

그가 아는 채지세는 꽤 정이 많은 성격이긴 했다. 겉으로는 카리스마 있고 능력 있는 천재 이미지였지만 일단 자기 사람이다 여기면 아낌없이 챙기던 인물.

그 챙김 범위 안에 현하빈도 끼어 있다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지금은 안 좋지!]

이렇게 추궁을 당하고 있으니!

네아이바와 현시우가 속으로 한숨을 삼킬 때였다. 채지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TV에서도 종종 보이던 신뢰감을 주는 친절한 미소였다. 그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5년 동안이나 가족에게 연락 없이 지내셨을 정도면 말 못 할 큰 사정이 있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빈이에게 피해를 줄까 봐 입을 다무셨을 수도 있겠죠.”

[정곡이네.]

둘 다 맞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침묵할 생각은 없었다. 현시우는 도리어 날 선 반응을 했다.

“뭐, 만약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칩시다. 그럼 더더욱 이렇게 물어보시면 안 되죠. 현하빈에게 피해를 줄까 봐 입을 다물었으면, 그쪽에겐 당연히 말할 수 없을 테니.”

현시우의 대답에 채지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예상했다는 듯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 그것도 물론 이해합니다. 현시우 씨에게 저는 오늘 처음 만나는 외부인이죠.”

그녀가 딸각,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한 금빛의 명함.

자세히 보니 음각으로 채지세의 직함과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제 개인 직통 연락처입니다. 저를 믿지 않으시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특히 하빈이랑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이요.”

현시우는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정말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명함이 맞았다. 무려 솔라리스 수장의 개인 연락처, 하지만.

[이걸 두 번이나 받게 되네?]

‘그러게요. 이미 인벤토리에 있는데…….’

아마 인벤토리에 쑤셔 박아 놓은 명함지갑 안에도 한 장 더 들어있을 거다. 피데스일 때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현시우가 묘한 표정으로 명함을 내려보는 사이 채지세가 말을 이었다.

“만약 이걸 잃어버리셨거나 제 연락처가 바뀌게 되어 연락이 제때 닿지 않는다면, 솔라리스 아무 번호에 연락해서 ‘데네브(Deneb)는 황도(黃道)를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바로 연결될 거예요.”

“……데네브는 황도를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는 기억하시겠죠?”

처음 듣는 암호였다. 이런 연결방식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현시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영화 킹X맨 보셨는지?”

“그게 뭐죠?”

“아니 그냥 전화해서 암호 말하는 게 비슷해서…….”

“……?”

“아닙니다.”

말을 마친 현시우가 피자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현시우 씨, 그런데 저희…….”

채지세가 다급히 덧붙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살짝 찡그려진 미간.

“저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었나요?”

현시우는 빠르게 답했다.

“제가 좀 흔한 얼굴이죠.”

“아닌데…… 그리고 얼굴이 아니라 느낌이…….”

“현하빈과 느낌이 많이 닮았다고들 하더라고요.”

평소 같으면 서로 닮았단 말에 질색하던 남매였지만 이번만큼은 현시우도 뻔뻔했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피자를 집을 때.

“콜라에 얼음 넣을 사람, 손!”

마침내 현하빈이 총총 거실로 다시 돌아왔다.

‘나이스 타이밍!’

마침 날카로운 질문을 받아 곤란하던 차였다. 현시우는 괜히 늦게 온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는 얼음을 만들어 오냐?”

“응!”

“?”

하빈이 보란 듯이 얼음 트레이를 들어 보였다. 그녀가 다른 한 손을 까닥 흔들자 순식간에 거기 담긴 물이 쩌저적 얼어붙었다.

“처음 써 보는 스킬이라서 좀 어렵더라고. 얼음만 얼려야 하는데 싱크대까지 얼릴 뻔했거든.”

그 광경에 네아이바가 기겁했다.

[저건 마법이잖아! 그것도 수준급의!]

현시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너 마법도 해?”

“아…… 뭐, 그냥 최근에 어쩌다 배웠어.”

“어쩌다가?!”

“성격 별로인 꼰대 선배가 있는데…… 내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가르쳐 주더라고.”

하빈은 흘깃 옆에 뜬 상태창을 보았다.

특성: 마신의 경이(글리치가 가진 마법 계열 스킬을 불러와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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