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0) (80/268)

080. 삼자대면(三者對面) (3)

“아 맞아! 나 이번에 오빠 기념품 사 왔어!”

깍듯한 ‘오빠’ 호칭에 현시우는 문득 생각했다.

‘옆에 채지세가 있어서 오빠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나 보다.’

[현하빈도 나름 이미지를 신경쓰나 보네.]

‘그러니까요. 쟤도 이미지를 신경 쓰는데 아까 그 조언은 뭡니까?’

[미안미안. 인간들은 역시 이미지에 목숨을 건다니까? 쯧.]

네아이바의 말을 흘려넘기며, 현시우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기념품? 뭔데?”

“기다려봐.”

자연스레 피자를 먹게 된 셋. 잠깐 자기 방으로 달려갔던 하빈이 부스럭 쇼핑백을 가져왔다.

“이거. 킬스크린 섬에서 샀어!”

하빈이 쏙쏙 쇼핑백에서 박스를 꺼냈다. 이국적인 포장지에 적힌 제품명은 현시우도 익히 하는 것이었다.

“와, 나란 동생. 그 와중에도 오빠 줄려고 기념품도 사오고. 많이 컸다. 현하빈!”

사토리아 비누, 첼라 꿀. 킬스크린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자주 사는 제품들.

여기서 무난하게 ‘고맙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왜?]

‘킬스크린 섬에서 산 거니까요!’

킬스크린 섬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현하빈은 연수생. 보통의 가족이라면 현하빈이 킬스크린 다녀온 것에 놀라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래서 현시우는 놀란 척을 하기로 했다.

“킬스크린 섬? 거긴 어떻게 갔어?”

“친구 따라.”

“킬스크린 섬인데? 거길 친구 따라 간다고?”

“허, 오빠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몰라? 강남도 따라가는데 킬스크린도 따라갈 수 있지!”

“…….”

그럴 리가 있겠냐.

아무튼 억지 논리로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뭐 있다니까?

하빈을 도와주고 싶었는지 곁에 있던 채지세가 말을 거들었다.

“솔라리스와 관련된 일로 킬스크린 섬에 잠시 다녀왔어요. 그때 겸사겸사 하빈이도 따라간 거예요. 큰일은 아니고, 킬스크린 섬 구경을 해보고 싶다길래, 하빈이는 관광 목적으로만 다녀왔죠.”

그에 지치지 않고 하빈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는 오빠는 말도 없이 유럽 여행 다녀왔으면서?”

“……!”

[……유럽 여행?]

네아이바가 당황해서 침음을 삼켰다.

[야, 우리 유럽 갔던 거 어떻게 알았지? 수시로 유럽에도 출장 가잖아!]

‘피데스’가 안 가는 지역은 없다시피 했다. 매일 전 세계 곳곳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러 전세기와 텔레포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그의 일상.

‘지, 진정하세요. 그것 때문은 아닐 겁니다. 지금 현하빈이 저러는 이유는.’

[이유는?]

‘제 카톡 프로필 사진이랑 상태메시지 보고 그러는 걸 거예요.’

현시우는 일부러 킬스크린 가기 전에 카톡 상태메시지에 유럽 여행을 간다고 적어두었다. 킬스크린에 들어가고 나면 통신이 안 되니까.

‘장기적으로 통신이 어려워질 때, 해외여행만큼 괜찮은 핑곗거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게 되레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현시우는 일단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나도 갑자기 친구 따라간 거여서 그래. 바로 전날에 ‘비행기 한 자리 비는데 내일 바로 출발할래?’ 해서 따라갔다니까.”

“흐음…….”

“최저가로 갈 수 있대서.”

“최저가는 못 참지!”

그런 거면 인정!

다행히 하빈은 곧바로 납득했다. 그녀가 처억 현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신 기념품은 별개야. 내놔.”

“나한테 맡겨 놨냐?”

“난 줬는데?”

“…….”

[야, 어쩔래? 너 기념품 없잖아? 애초에 여행을 안 다녀왔으니!]

핀치에 몰린 현시우.

네아이바가 재밌다는 듯 깐죽댔다.

‘이럴 땐…….’

스윽.

현시우는 말없이 피자를 한 조각 덜어 현하빈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자, 여기 널 위한 기념품.”

“이건 방금 들고 온 피자잖아?”

“피자는 이탈리아의 특산품이란다.”

“뭐어?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간다 그거지?”

“싫으면 먹지 말고…….”

“앗, 치사하게 도로 뺏냐? 잘 먹겠습니다!”

잽싸게 피자를 집어 드는 현하빈. 알차게 핫소스를 뿌리고 콜라 컵을 든 그녀가 쭈욱 늘어나는 치즈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마음이 넓어서 그 정도는 당연히 넘어가 줄 수 있어.”

‘역시 잘 먹네.’

피자를 두 판 사 오길 잘했다.

많으면 냉장고에 넣어놓고 배고플 때마다 데워 먹으라고 넉넉하게 샀는데, 예상치 못한 채지세까지 끼었다. 세 명이서 한 판을 먹었다면 모자랐으리라.

[엥? 세 명이면 피자 한 판으로 충분한 거 아니냐?]

‘……네아이바. 모르면 가만히 있으세요. 쟤가 얼마나 잘 먹는데. 1인 1판도 가능할걸요?’

[……뭐?! 지, 진짜?!]

기겁하는 네아이바는 일단 뒤로 하고.

“어쨌든 기념품 고맙다.”

현시우가 뒤늦게 감사 인사를 하며 현하빈의 선물을 챙겨 넣었다. 하빈은 피자를 우물거리느라 대답이 묻혔는데, 대충 ‘알면 잘해’라고 대답한 것 같았다.

그 사이.

‘네아이바, 지금 현하빈 손에 반지 없죠?’

[없는데?]

현시우는 피자를 집어 올린 현하빈의 손을 다시 한번 흘끔 보았다.

역시나 ‘마신의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기만자의 소망을 썼나 보네요.’

[그것밖에 답이 없긴 하지?]

‘귀속 아이템인데 버렸을 리도 없고.’

1회차 현하빈의 트레이드마크, ‘기만자의 소망’.

지금 아헤자르를 평범한 철검처럼 보이게 한 것도 그 기술의 영향일 테다.

‘알차게 잘 쓰고 있네?’

피자를 먹느라 잠깐의 침묵이 감돈 뒤.

방금의 기념품 싸움으로 다소 어색함이 풀어졌는지, 채지세가 자연스럽게 하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빈아, 그런데 너 연수원 조기 수료 하는 거 말인데.”

“……?”

한창 피자를 먹던 하빈이 눈만 들어 지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궁금하다는 표정.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 수료에 문제가 생긴 건 아냐. 조기 수료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현하빈이 조기 수료를 한다고?’

현시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름 생각에 잠겼다.

‘킬스크린이 갑자기 개방되어서 생긴 일이구나.’

듣자 하니 현하빈이 연수원 땡땡이치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던데, 그녀에게 좋은 소식인 모양이다.

[연수원 나오면, 이제 대놓고 집에만 박혀 있으려나?]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그동안도 저희 몰래 던전을 공략하고 다녔잖아요.’

과연 현하빈의 연수원 조기 수료는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채지세가 말을 이었다.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내가 평소에 잊고 있어서 깜빡하고 말을 못 했는데, 연수원 수료하고 나면 현하빈 너는 정식 면허증을 받게 되거든. 국가에 정식 각성자, 그러니까 정식 헌터로 등록이 된단 말이지.”

“그런데?”

“정식 헌터가 되면 그에 따른 책임이 생기게 돼.”

“책임……?”

‘아!’

현시우는 그 말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다.

‘헌터특별법 6조 때문이구나!’

헌터특별법 6조.

헌터는 반드시 게이트 관련 응급요청에 응하고 비상사태에 나서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없다.

이건 과거 의료인들에게도 있었던 법률이었다. 마침 채지세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의사나 간호사와 같은 의료종사자도 응급 상황에서 의료를 요청받거나 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 의료를 해야 해. 이걸 법적으로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거든. 그것과 비슷한 조항이 헌터에게도 있어.”

“…….”

“헌터 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게이트와 관련된 비상사태에 동원되어야 하지. 정당한 사유 없이는 거부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거야.”

“그럼, 만약에 주변에서 게이트가 터졌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무조건…….”

“맞아. 일단 무조건 나서야 하는 게 의무야. 때로는 국가적인 사업에도 강제적으로 동원되기도 해”

“뭐? 그럼 비상사태가 아니라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 아냐?”

“그런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건 어쩌다 제정된 법이야? 설마 이번에도 피데스인가! 피데스가 또?”

쿨럭.

별생각 없이 콜라를 마시던 현시우는 사레가 들렸다.

“쿨럭 컥, 콜록!”

“……?”

“탄산이, 큽, 세서…….”

[가지가지한다.]

“저기, 괜찮으세요?”

채지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손에서 따뜻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힐링 스킬.

그 꼴을 본 네아이바가 감탄했다.

[이야! 너 2회차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힐을 받아본다야. 근데 그게 사레들려서 받는 힐이라니?]

“…….”

현타와 긴장감 사이에 현시우의 사레가 멎었다. 채지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피데스 의견은 아니었어. 그냥 국가 수뇌부들과 대중들의 민심이 모두 모여 결정한 일에 가깝지.”

“흐음, 가면마법사의 짓이 아니로군, 봐준다.”

‘가면마법사?’

[가면마법사?]

현하빈이 뱉은 단어에 현시우와 네아이바가 흠칫했다.

가면마법사라니.

‘설마 그게 피데스를 부르는 호칭은 아니겠지?’

[맞는 것 같은데? 너 맨날 가면 쓰고 다니잖아. 마법사고.]

‘……!’

반박할 수가 없다!

거기다 네아이바는 말을 더 얹었다.

[야, 그리고 이건 내 촉인데, 혹시 현하빈…… 피데스 싫어하는 거 아니야?]

‘네?’

[아까 ‘가면마법사’라고 할 때 분위기가 영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설마, 착각이겠죠.’

[그런가?]

전세계 사람들을 다 붙잡고 물어봐도 열에 아홉은 피데스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정적이거나 질투심.

그러니 확률상으로도 현하빈은 피데스에 대해 큰 호감은 아니더라도 평타 이상의 이미지를 가지지 않을까?

그러나 그 추측은 하빈의 다음 말에 깨어졌다.

“흠, 그래도 언젠가 가면마법사를 만나면 가만두지 않아야지. 매번 생각이 바뀐단 말야.”

[저것 봐! 현하빈 피데스 싫어하네!]

‘대체 왜!’

[난들 아냐?]

‘큭…….’

마음 같아서는 ‘대체 무슨 일 있냐?’ ‘피데스를 왜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냐!’라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채지세가 있는 상황. 괜한 오해 살 일은 사양이었다.

‘네아이바, 제가 피데스일 때 현하빈한테 잘못한 거 있습니까?’

[아니? 둘이 만난 적도 없지 않냐?]

‘그럼 대체 뭔데?’

네아이바와 현시우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채지세가 말을 끝맺었다.

“어쨌든 간에 연수생은 괜찮거든. 연수생 신분으로는 국가의 비상상황이나 응급 요청에 응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제 연수원을 수료하고 나면 정식 헌터니까, 하빈이 네게도 책임이 적용된다는 거지.”

“이 사람들이 진짜! 결국 집에 있으면 강제로 끌어내서 일 시킨다는 거잖아! 소중한 헌터를 그렇게 다뤄도 되냐!”

“그 소중한 헌터가 집에서 뒹굴거리는 건 봐줄 수 없는 거겠지.”

“하…….”

하빈의 인생은 또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어쩐지. 잘 풀린다 했어!’

피자 먹다 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하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얼음 가지러. 속이 타서!”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부엌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벌컥- 달그락, 달그락.

냉장고의 얼음 챙기는 소리와 함께 간헐적으로 하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미친 자들아……. 왜 나를 내버려 두지를 않아……!”

“…….”

“…….”

‘어지간히 빡쳤나 보군.’

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디핑 소스를 꺼냈다. 동생이 빡쳐 있지만 지금 당장 법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피자는 먹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가 피자에 알차게 갈릭디핑소스를 쿡 찍을 때였다.

“……?”

누군가 그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야, 현시우! 지금 채지세가 너를 지켜보고 있어!]

네아이바가 속삭였다. 현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채지세와 딱 눈이 마주쳤다.

‘왜 저렇게 보는데?’

[들킨 거 아니냐?]

심상치 않은 표정의 채지세. 아까의 웃음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현시우씨, 마침 단둘이 있으니까 묻죠.”

“…….”

[야! 들켰네! 쟤 눈치 깠다!]

‘아, 아닐 겁니다!’

현시우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가면을 쓰고 대하는 데에 익숙해서 그런지 민얼굴을 다 내보이고 있는 지금이 꽤나 어색했다.

‘그래도 그동안 포커페이스는 수도 없이 했단 말이지.’

여차하면 아니라고 우겨야 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현시우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뭔데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채지세가 마침내 질문을 했다.

“……하빈이에겐 언제 솔직하게 말할 셈인가요?”

“…….”

[이야아!]

기다렸다는 듯이 네아이바가 비명을 질렀다.

[야, 들켰나 봐! 들켰어! 우리 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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