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삼자대면(三者對面) (2)
“SPES에서 나온 안건이 뭔데?”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주제에, 채지석도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시키지 않아도 방음 아이템까지 알차게 설치 완료. 채지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그 정도로 기밀은 아니야.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도 하고 오늘 저녁쯤에 보도자료로 뿌려질 거거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이번 50층이 공략 완료되었잖아? 그걸로 인해 발생한 부가적인 현상이 있어.”
50층 공략 완료.
원래는 27층을 공략해야 하는 인류가 편법을 써서 50층을 공략해버렸다.
“보통 한 층을 공략하면 바로 위층이 오픈되잖아? 26층을 공략하면 27층이 열리는 것처럼.”
“그렇지?”
“그럼 50층을 공략했으니, 이번엔 몇 층이 열렸을까?”
이번에는 하빈이 대답했다.
“51층?”
“놀랍게도 그게 아니었지!”
채지세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27층부터 51층까지 모두 동시 개방되었어!”
“……!”
“아마 탑의 시스템이 가진 오류인가 봐. 한 층씩 공략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50층이 공략되었으니, 그 아래층들도 모두 다 열려 버린 거지. 그래서 SPES에서도 이게 앞으로 가져올 영향에 대해 논의했고.”
채지석이 격하게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엄청난 사건이네. 51층까지 한번에 다 개방되다니. 그동안 인류가 5년 동안 열심히 공략했던 게 26층까지였는데, 그만큼의 층이 한번에 다 열려 버린 거잖아?”
“맞아. 그러니 앞으로 각국에서 헌터 양성을 위해 어마어마한 투자가 들어갈 거야. 각 층에 있을 수많은 아이템과 자원들을 선점해야 하니까!”
“그래서 연수원 기간을 줄이려는 거구나?”
원칙적으로 연수생은 특별한 사유나 거대 길드의 보장이 없이는 킬스크린 투입이 어려웠다.
하빈이 그동안 킬스크린을 방문한 건 칼리고의 보증을 받아서 한 번(26층), 무단으로 한 번(50층) 방문한 게 전부.
당시에는 꼭 연수생의 인력이 갈급한 상황이 아니었던 사회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지. 27층부터 51층까지 탐사하고, 자원을 가져오고, 그걸 또 가공하거나 연구하거나 보조할 인력까지 생각하면 헌터 인원이 모자라! 연수원 인원들까지 다 끌어와야 한다고.”
각 국가들 사이에서도 헌터 자원에 대해 서로 경쟁하는 눈치 싸움이 존재했다.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헌터를 배출해서 더 안전하고 앞서나가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에.
헌터 인력이 곧 국력!
“지금으로서는 게이트 사태 이래 최대의 특수 케이스니까 국가 입장에서도 연수원 기간을 단축시키고 빨리 헌터 인력을 배출하길 원해.”
‘정치계 쪽에 심어놓은 정보원에게, 확실하게 들은 정보였어. 그러니 확실해.’
지세의 말에 하빈이 이해했다는 듯 정리했다.
“특별한 날에 해주는 가석방 같은 거구나!”
“왜 교도소에 비유하는 거냐?”
채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야 교도소랑 다름없잖아? 맛없는 밥을 꼬박꼬박 주지, 마음대로 도망도 못 가, 잠도 거기서 자야 하고 시키는 대로 훈련도 해야 하고. 으윽.”
지세가 물었다.
“하빈이 그동안 연수원 생활 한 달은 채웠지?”
“어…… 간당간당하게?”
“그럼 바로 조기 수료 가능해질 거야!”
“정말?”
하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자유인가!’
이제 억지로 연수원에 갇혀서 힘 조절해 가며 힘 숨기는 짓은 그만해도 된다는 거잖아?!
“뭐야? 왜 이렇게 좋은 소식들만 들려온담?”
하빈이 딸기 케이크의 생크림을 포크로 뜨며 흠흠 콧노래를 불렀다.
노래 부르던 딸기 뷔페도 왔고, 이제 연수원 생활도 청산할 거고!
“오늘은 그야말로 최고의 날이야!”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안한 기분이 든다만…….]
“뭐? 잘잘이 너까지 초를 칠 셈이야?”
[아니, 나는 그냥 해본 말…….]
“그런 복선이나 플래그 같은 거 함부로 꽂으면 큰일 나! 말이 씨가 된다고!”
하빈은 포크에 찍힌 딸기를 휘휘 허공에 흔들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니 좋은 말만 하자! 나는 앞으로 연수원을 평화적으로 수료해서, 집에 박혀 아늑하게 드라마 정주행을 할 거야. 못 해본 수팀 게임들도 다 다운받아 해볼 거고! 또 뭐 하려고 했었더라…….”
턱을 괸 하빈의 모습을 보며 지세가 물었다.
“집에서 놀 거야? 그럼 나도 하빈이네 집에 놀러 가도 돼?”
“물론이지! 언니는 언제나 환영이라고. 내가 언니 집에 놀러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저 디저트를 들었다.
현하빈에겐, 정말로 완벽한 하루가 따로 없었다.
아마도.
* * *
한편.
SPES 회의가 끝나서 여유가 생긴 건 채지세뿐만이 아니었으니.
[갑자기 웬 피자를 포장해 간대?]
“지금 점심때잖아요. 가서 먹으면 딱 맞을걸요?”
SPES회의가 끝난 이틀 뒤, 현시우는 피자를 들고 집에 가고 있었다.
그의 진짜 집. 현재 현하빈이 살고 있는 본가로.
거추장스러운 가면도 다 벗고 오늘은 진짜 ‘현시우’로 집에 가는 것이다.
‘이 길은 아무리 오랜만에 와도 익숙하단 말이지.’
집으로 가는 길이란 언제나 그런 법인가 보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몇 안 되는 안식처.
그가 천천히 길을 걷던 중, 네아이바가 뒤늦게 알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 알겠다! 저번에 피자 먹었던 것 때문에 미안해서 사주는 거지?]
그가 다 안다는 말투로 지적했다.
[왜, 저번에 아헤자르 놓고 갈 때 냉장고에 있던 피자 데워 먹었잖아.]
‘뭐, 그것도 있긴 하고요.’
현시우가 흘긋 피자 박스를 쳐다보았다. 상표는 모니도피자, 그중에서도 포테이토 피자를 골랐다.
[저번에 냉장고에서 먹었던 그 피자도 포테이토였지! 딱 똑같은 메뉴라니까! 크, 나의 눈썰미와 기억력을 봐라. 내 눈은 못 속여!]
‘저희 남매는 원래 피자는 포테이토로 시켜 먹습니다.’
[뭐? 왜?]
‘모르겠네요. 어쩌다가 그랬는지?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이 메뉴만 시키다 보니 국룰처럼 굳어졌는데.’
현남매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그들의 부모님은 맞벌이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이 둘만 남겨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배고프지? 피자 시켜 줄 테니 동생이랑 싸우지 말고 나눠 먹어라.’
“그때 부모님이 자주 시켜 주시던 메뉴가 포테이토여서 그랬나?”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현시우는 다른 손에 들린 1.5리터짜리 콜라병에 눈길을 주었다.
“근데…… 둘이서 먹으면 문제가 항상 생겼어요.”
[문제? 아, 너희 설마 싸웠냐?]
어린애들이 피자 가지고 싸웠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아이바의 추측은 빗나갔다. 현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싸운 건 아니라…… 그땐 저희가 너무 어려서 콜라를 못 뜯었거든요.”
두 명이서 열심히 낑낑대도 잘 열리지 않던 콜라병.
그때는 악력도 부족하고 요령도 부족했다.
“당시 콜라 뚜껑이 지금보다 더 뻑뻑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잘 안 열렸어요. 둘이서 어떻게든 콜라 한 모금 마시려고 힘을 합쳐 애를 썼었죠.”
……하지만 지금은.
열리지 않는 콜라병을 두고 부모님을 기다렸던 어린 시절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젠 기다려도 올 부모님이 없다. 이제 둘 다 콜라병 여는 것쯤이야 너무 쉬웠다.
‘오히려 힘을 너무 많이 줘서 콜라병이 폭발한다면 모를까.’
현하빈이면 그럴지도?
현시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띡띡띡띡-
5년이 지나고도 바뀐 것 하나 없는 비밀번호를 눌렀을 때였다.
사라락.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현시우의 시야에 아주 익숙한 금발이 비쳤다.
“……?”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분명 그곳은 그의 집이 맞았다. 익숙한 현관, 아늑한 거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하빈아! 누가 오셨는데?”
“엥 누구? 올 사람 없는데…… 설마 현시우인가?”
“…….”
현시우는 들어가다 말고 현관에 우뚝 멈추어 섰다. 거실에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있었다. 평범한 가정집 소파도 모델하우스나 화보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셀럽.
“안녕하세요? 혹시 하빈이 오빠 되시는 분?”
채지세.
그녀가 떡하니 집 쇼파에 앉아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채지세가 왜 여기 있냐!]
* * *
“…….”
“…….”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현시우와 채지세.
‘아, 어쩌다 이리 됐냐.’
솔직히 말하면 현시우에게 채지세는 아주 복잡미묘한 관계다.
함께 던전을 공략할 때는 든든한 동료.
반면 사업 투자자로서는 경쟁자였다. 익명으로 서로 지분 싸움한 적도 있었고.
그리고 회의장에서 만날 때는 서로 다른 단체의 수장으로서 미묘한 긴장감과 존중, 견제의 대상.
즉 동료이자 경쟁자.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로 겪어 볼 일은 다 겪어 본 상대.
너무 오랜 시간 피데스로서 알고 지낸 사이이다. 게다가 채지세는 보통 눈치가 빠른 인간이 아니었다. 트레이드마크가 예지력일 정도면 말 다했지, 뭐.
[야, 잘못하면 우리 정체 들키는 거 아니냐? 말실수하면 안 된다. 피데스 때 하던 습관 다 버려라!]
그러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마침 채지세가 현시우를 향해 물었다. 이 상황이 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하빈이 오빠라고요? 친오빠……?”
“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당신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이쪽은 또 왜 지켜보는데?’
“…….”
일단 침착하자.
현시우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성좌라고 해도 자신의 계약자가 아닌 이상 사람을 일일이 구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거니 괜찮을 거다. 피데스로 가장할 때는 네아이바의 힘을 빌려 성좌들의 인식을 교란시키기도 했고.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현하빈에게 혈육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며, 혹시 이쪽도 대단한 강자 아니냐고 호들갑을 떱니다!]
[오, 맞췄다? 저 녀석 꽤 감이 좋네?]
‘조용히 해주시죠, 네아이바.’
역시 네아이바도 도움이 안 된다. 왜 이쪽도 신이 나 있는 건지…….
[야, 내가 도움 안 된다고? 너 말 다 했냐?]
‘크흠…….’
솔직히 말하면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베스트이긴 한데.
‘그렇다고 피자까지 들고 왔는데 바로 나갈 수도 없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가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어느새 주방에서 컵을 가져온 하빈이 입을 열었다.
“원래 오늘은 언니랑 둘이 놀려고 했었는데!”
‘젠장. 그래서 채지세가 우리 집에 왔던 거구나.’
이제야 진상 파악이 되었다. 현하빈은 벌써 채지세를 집에 초대할 정도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긴장 풀어, 오히려 편하게 해. 너 피데스일 때 엄청 각 잡혀 있었잖아? 그러니 평소 집에서 하던 대로 하면 더 딴사람 같을걸?]
‘제가 평소에 집에서 어떻게 했는데요?’
[양말 벗고 소파에 발라당 누워서 턱 괴고 TV를 보던가?]
‘처음 보는 손님 왔는데 갑자기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그건 미친놈 아닌지?’
[아, 그른가? 그럼 아예 더럽고 깨는 스타일로 가자. 채지세가 볼 때 슬쩍 코를 후벼! 그럼 더러워서 잘 쳐다보지도 않을걸?]
‘그냥 솔직하게 말하시죠. 제 사회적 이미지를 매장시키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