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74) (74/268)

074. Continue? (3)

-어, 어쩐 일로…….

달달달 떨리는 황마로의 목소리. 그것에 가장 크게 당황한 건 박민수였다.

‘화, 황마로 님이 왜 이렇게 놀라신 거지?’

그동안 언제나 고압적인 리더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황마로. 심지어 민수와 계약할 때조차도 황마로는 당당했다.

‘너 말고도 들어오려는 사람 줄섰어.’

‘뭐? 수익 분배? 다 우리가 해준 게 있으니 그만큼 가져가는 거야.’

그랬던 그가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모습이라니.

그걸 보고 놀란 이는 또 있었다.

‘황마로랑 현하빈,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 게다가 황마로가 당황하고 있는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채지석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하빈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어색한 표정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별거 아니고. 그냥 민수가 전화 연결해 주길래…….”

-그, 그랬나요? 아, 하하. 민수랑 아는 사이셨구나.

“네. 오늘은 그냥 쇼핑!”

-…….

짧은 하빈의 대답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 어색해. 이게 뭐야.’

하빈이 삐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26층의 일은 대외비니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전화하면 서로 할 말이 없다. 보는 눈이 있으니 황마로에게도 깍듯하게 대해야 하고.

게다가 둘은 그렇게 훈훈한 사이도 아니지 않는가.

황마로는 강태서와 현하빈을 죽이려고 했고, 현하빈은 황마로를 때리고 묶었으며, 저주까지 걸었다.

“…….”

-…….

정적.

그들 사이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견딜 수 없었는지, 황마로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 쇼핑이면 컨티뉴겠네요. 민수 그 녀석이 제 심부름을 가서…… 만났나 본데.

“음? 심부름?”

-주문제작한 아이템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내서…….

“…….”

그 말에 삽시간에 굳어지는 민수의 표정.

‘마, 망했다!’

“흐음?”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아이템이 잘 보이게 화면을 조정했다.

방금 민수가 자랑하던 아이템들. 방금 그가 주문한 포션들과 보호구, 무기들. 하빈이 물었다.

“혹시 이거, 민수한테 사 오라고 심부름 맡기신 건가요?”

-네. 그런데요? 제가 가지러 가기에 시간이 안 맞아서 맡긴 건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문제는 없어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 갑자기 전화 받아서 놀라셨겠다. 저 용건 끝났으니 편하게 끊으셔도 돼요!”

-지, 진짜 끊어도 되죠? 용건이 진짜 그게 다……?

“네네. 앞으로는 착하게 사시고. 지켜보겠슴다.”

-네, 그건 물론이죠! 드, 들어가세요!

딸각.

찔린 듯 말을 더듬다가, 기다렸다는 듯 끊긴 전화.

전화가 완전히 끊어진 걸 확인한 하빈이 민수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민수야!”

“…….”

“횡령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냥 심부름이었구나!”

“……윽.”

“나도 모르게 걱정한 거 있지.”

“……으윽!”

이젠 빼도 박도 못 하고 거짓말을 걸려 버린 민수. 그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어쨌든 현하빈 네 말이 맞았네……. 우리 길드장님이랑…… 아는 사이였구나.”

꾸역꾸역 말을 뱉는 민수. 하지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현하빈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뿐이라고!’

황마로야 뭐, 현하빈이 강태서와 아는 사이니 오다가다 만났다 치자.

그런데 솔라리스의 채남매하고까지 친하다고?

‘허, 대체 그런 인간이 한국에 몇이나 된다고? 대통령도 못 한 일인데!’

한국의 양 날개.

칼리고와 솔라리스 수장들이랑 다 친하다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누가 들어도 허풍투성이니까, 다른 말도 다 못 믿게 되는 거잖아!’

민수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채남매랑 친하다는 말은 내가 믿을 수가 없잖냐? 어. 그러니까 네 말을 듣다 보니 신뢰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실수했다.”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

민수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입을 연 건 현하빈 쪽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선글라스를 낀 남자.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얼굴을 가린 채 허접한 관광객 티셔츠를 입고 있던 현하빈의 친구.

스윽.

그가 손가락을 뻗어 슬쩍 얼굴에 걸친 선글라스를 끌어내렸다.

“……!”

헉.

주변에 있던 셀러 두세 명이 조용히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민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나는 선명한 금빛 눈동자.

성좌, ‘가장 가까운 빛’과 계약한 채남매의 트레이드마크, 머리와 눈동자에 금빛이 맴도는 효과, ‘태양의 광휘’.

누가 봐도 진짜 채지석이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하빈이랑 저 진짜 친하거든요.”

“…….”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민수에게 채지석이 덧붙였다.

“그러니 괜한 말씀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그, 어, 네, 그러니까, 어…….”

말을 잇지 못하고 뻐끔뻐끔하던 민수.

“…….”

털썩, 꼴까닥.

“엥? 민수야! 이번에도 기절한 거야? 민수! 정신 차려 봐!”

민수는 그렇게, 이번에도 기절하고야 말았다.

* * *

“……안타까워. 역시 갱생의 길은 멀구나. 갱생민수가 되었나 했더니, 횡령민수를 거쳐 허세민수가 되었어.”

쓰러진 민수를 셀러들에게 양도한 뒤,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민수는 어쩜 그렇게 허약한지. 저번에도 픽 쓰러지더니…… 애가 참 기절을 잘해.”

“저혈압인 거 아냐?”

“그럴지도?”

스탯이 높아도 저혈압은 조심해야 하는 거다. 슬픈 진리를 되새기며 하빈은 앞으로 걸었다.

뚜벅뚜벅.

방금 지나친 공방의 여러 시설들. 그 너머에는 제작 완료된 아이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흐음, 어디부터 둘러보면 좋으려나?”

마침 옆에 있던 셀러가 재빨리 대답했다.

“혹시 아이템을 구매하기 전 시간 여유가 되신다면, 약초 온실이나 보석관을 구경하시는 것도 꽤 재미있으실 거예요!”

“오, 보석관이요?”

“아직 정제되지 않은 상태의 광석들을 보관해둔 곳인데 정말 아름답답니다. 저쪽에 있는 약초 온실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던전의 희귀 식물들을 심어 놓았어요. 재배가 어려운 희귀 품목들도 있답니다!”

신이 난 셀러의 설명. 보석관과 온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럼 당연히 둘러봐야죠!”

눈을 반짝인 하빈이 셀러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이동했다.

처음으로 들른 건 보석관이었다.

“와, 인테리어 봐.”

보석관은 언젠가 박물관에서 봤던 자수정 동굴처럼 벽면에 빼곡히 반짝이는 보석들이 들어차 있었다. 투명하게 빛을 흘리는 보석들로 인해, 답답하기는커녕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는 곳.

“완제품 아이템을 사가시는 분도 계시지만 여기서 재료를 구입하시는 분도 계시죠. 아시다시피 이곳은 재료도 최상등품만 취급하니까요.”

“오, 그렇군요.”

하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판매 물품들은 유리벽에 감싸여 따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모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빈은 옆에 놓인 무지갯빛 보석을 쳐다보았다. 옆에 설명이 적혀있었다.

[비색조의 오팔]재료 아이템

킬스크린 17층의 희귀 몬스터 비색조의 서식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오팔입니다. 아이템 제작 시 높은 확률로 환각 및 혼란 효과를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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