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Continue? (2)
민수가 의문을 표하고 있었지만, 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이쪽이 채지석이라고 말해줄 필요는 없지.’
지금 얼마나 힘들게 정체를 숨겼는데 말이다. 혹시라도 놀란 민수가 큰소리를 내거나 해서 괜히 상황이 소란스러워지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대신 하빈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민수는 요즘 잘 지내?”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민수가 턱을 치켜들었다.
“나? 나야 뭐, 당연히 잘 지내지. 아, 저번에 솔라리스 면접 붙은 건 내가 거절했는데……! 더 좋은 길드에 스카웃 제의가 와서.”
민수가 으스대듯 눈을 내리깔았다.
솔라리스를 거절했다고?
‘엥, 채씨. 진짜야?’
하빈이 채지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채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속닥속닥 답을 했다.
‘응? 나도 몰라. 면접에선 못 본 얼굴 같으신데? 내가 기억을 못 했나?’
‘박민수라고, 몰라?’
‘처음 듣는데?’
둘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민수가 열을 냈다.
“또 둘이서 뭘 속닥대고 있는 거야?”
“앗 미안, 민수! 내가 널 외롭게 했구나!”
“누가 외롭대?! 사람 앞에 두고 무시하지 마! 그럼 도와주려다가도 마음 식는다고.”
“민수! 웬일이야? 진짜 도와주는 거야?”
‘안 본 사이에 정말 갱생민수 된 건가?’
하빈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 도와주긴 무슨.’
다른 놈들은 다 도와준대도, 현하빈은 절대 도와줄 일 없었다. 저번 술자리에서의 굴욕을, 그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적당히 도와주는 척 기를 죽여 놔야지. 다시는 무시할 생각도 못 들도록.’
“안 그래도 나 여기서 검집 골라보려고 했어.”
하빈이 입을 열었다.
“검집?”
민수가 스윽 하빈의 아헤자르를 훑었다. 지금의 아헤자르는, ‘기만자의 소망’으로 위장된 평범하고 낡은 철검의 모습.
‘뭔 저딴 잡템의 검집을 여기서 골라? 여긴 컨티뉴인데?’
민수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 여기 가격은 알고 있어?”
“모르는데?”
‘그럼 그렇지!’
민수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현하빈. 여긴 가격대 시작이 무조건 억부터야 억! 무려 전설적인 제작자 ‘코니’님의 공방이라고.”
“역시, 비싸긴 하네.”
하빈이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아헤자르는 놀라서 속삭이고 있었다.
[뭐, 뭣이? 뭐가 그리 비싸단 말이냐? 그냥 나는 돈으로 다오! 그걸로 카카페 캐시를 충전하면 대대손손 결제할 수 있을 텐데!]
‘아, 뭐래 잘잘. 왜 주는 사람 성의를 무시하고 그래?’
[받는 사람의 취향도 고려해다오!]
‘잘잘이는 사람 아니잖아.’
[받는 성좌의 취향을 고려해다오!]
‘엥. 어제는 복권 당첨금이 10억밖에 안 되니 뭐라 하더니만 정작 본인 선물 사준다고 하니까 계산 핑핑 돌리는 것 좀 봐. 잘잘인 돈 계산을 죄다 카카페 캐시 기준으로 하냐?’
아헤자르와 틱틱대느라 조용한 하빈. 그 모습을 보며 민수는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놀라서 얼어붙었나 보네.’
민수가 알만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네겐 좀 비쌀 수 있어.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듣자 하니 너 아직 연수생이라던데, 네가 좀 경력 쌓고 레이드 많이 뛰면 언젠가 또 살 일이 있겠지.”
‘이제 겨우 연수생인데, 어느 세월에 살지는 모르겠지만.’
민수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며 주변의 물건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가 슬쩍 턱을 치켜올리며 옆의 셀러에게 말을 걸었다. 느릿하고 여유로운 말투였다.
“저는 아까 말씀드린 보호구 3개랑, 특수 제작 물약 5개, 침묵의 지팡이, 잔상검으로 챙겨주세요.”
말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처억 카드를 꺼내는 민수. 그가 현하빈을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물론, 계산은 일시불이요.”
“네, 알겠습니다.”
‘봐라. 이게 너와 나의 격차라고.’
사실 박민수에게도 그렇게 많은 아이템을 결제할 큰돈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길드 심부름으로 대신 주문만 해주러 온 것이다.
그러니 전부 회삿돈. 회사 물건!
전부 민수 것도 아니다.
‘뭐 어때? 그걸로 생색 좀 내보겠다는데.’
하지만 민수는 이런 일에는 도가 터 있었다.
예전 길드에서는 회사의 법인용 차량을 타고 여친이랑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고. 평소 회사 소유 아이템을 촬영해서 헌터 커뮤니티에 자랑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남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고 말이다.
‘와, 민수야. 이 차 뭐야? 대단하다.’
‘저 아이템은, 한국에 4개밖에 없는 아이템 아닌가요? 클라스가 다르시네요!’
‘오오, 형님. 이거 다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선망과 감탄, 부러움의 눈길.
이번엔 현하빈이 그렇게 놀랄 차례였다. 마침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수, 많이 주문하네?”
그 말에 민수가 으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아, 원래 헌터 일 하다 보면 아이템 쓸 일이 많아. 그리고 아이템들도 날이 갈수록 발전하니까. 나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바꿔주는 편이야.”
“어? 이거 다 네 거라고?”
움찔.
그 질문에서 찔린 민수.
‘사실 길드장님이랑 부길드장님, 아이템, 그리고 회사 공동 소유 포션들이지만…….’
이 중에서 그의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멈추어서는 안 되었다.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밀어붙여야지.’
“당연히. 다 내가 쓰려고 주문하는 거지.”
“……?”
하빈이 손가락으로 슬쩍 민수의 카드를 가리켰다.
“저거 법인 카드인데?”
“!”
‘어, 언제 본 거야!’
그 말에 안색이 새파래지는 민수. 아헤자르가 물었다.
[법인 카드가 무엇이냐?]
‘회사 카드! 회사에서 쓰는 회삿돈 담긴 카드. 저기에 ‘MARO길드’라고 쓰여진 거 보니까 저건 민수 게 아니라, 쟤네 길드에서 쓰는 법인카드인데?’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민수야, 너…….”
꿀꺽.
민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크게 울렸다. 하빈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지금 횡령하니?”
“회, 회회, 횡령은 무슨!”
민수는 그만 꼬리에 불붙은 닭처럼 튀어올랐다. 하빈이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횡령은 나빠. 잘못하면 감옥에 간단다?”
“아, 아니라고!”
“이건 아무리 나라도 도와줄 수 없다구.”
“아니라니까!”
“자수하고 갱생 찾자.”
“……이잇!”
창피함과 당황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민수가 뒷걸음질 쳤다.
‘하필 법인카드인 걸 들키다니! 내가 안일했어!’
현하빈이 그것까지 볼 시력이나 머리가 있을 거라고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도 둘러댈 구석은 있지!’
거짓말엔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놔야 하는 법이다. 오랜 기간 허세를 부려 온 민수는 이런 분야라면 아주 빠삭했다.
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현하빈, 네가 뭔가 단단히 오해했나 본데, 난 애초에 내 돈으로 산다는 말 안 했어. 이건 다 길드 측에서 나 쓰라고 허락해 준 거거든?”
“오, 정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믿는 눈치였다. 민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크게 외쳤다.
“그래! 내가 이번에 들어간 길드가 신생이긴 하지만 꽤 좋은 곳이라고! 게다가 날 스카웃하면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기로 했지. 그래서 이런 개인물품도 길드 돈으로 막 살 수 있는 거야.”
“앗, 그럼 내가 오해했나 봐. 미안해, 민수.”
재빠른 하빈의 사과.
거짓말 덕분에, 고작 ‘길드장 아이템 심부름’이었던 행위는 ‘대단한 인재 민수에 대한 MARO길드의 복지’로 둔갑하게 되었다.
하빈이 쭈욱 아이템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최소 가격이 10억대부터 시작되는 고가의 장비들.
“그나저나 수십 억대 물품을 펑펑 지원해 준다니. 정말 좋은 길드네?”
“엄청 좋지!”
민수가 즉답했다.
‘아마 현하빈은 들어가지도 못할걸?’
그가 코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여유를 한껏 되찾은 얼굴.
“너, 랭커 황마로 님이라고 알지? 원래 칼리고의 이인자였던 분인데, 이번에 새로 길드를 만들면서 나를 스카웃하셨어!”
“황마로……?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하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민수가 답답해서 외쳤다.
“그분 이름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얼굴 보면 너도 알걸!”
민수가 탁탁 핸드폰을 두드려 사진을 찾았다. 요즘은 갑자기 순위가 쭈우욱 떨어졌다고 들었지만 한때는 6위에 있었던 인물. 게다가 칼리고의 이인자기도 했던 거물 랭커!
“자, 이분이야. 너도 TV에서 봤겠지?”
하빈이 사진을 보고 손뼉을 탁 쳤다.
“아, 나 이 사람 알아!”
“알지?”
“만났어!”
킬스크린 26층에서.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황마로 이 사람, 그때 그 아저씨네!
‘강태서 뒤통수 친 아저씨잖아!’
26층에서 강태서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 하빈이 비엔나소시지 매듭으로 묶어버렸던.
하빈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민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야, 네가 황마로 님을 봤다고? 어디서?”
“아, 그게…….”
킬스크린 26층에서 본 건 대외적 비밀. 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칼리고에 방문했을 때 만났지.”
“하, 야 너도 참…… 아깐 솔라리스 채지석 님이랑 친하다고 우기더니, 황마로 님도 봤겠다? 아주 우리나라 온갖 랭커랑은 다 아는 사이라고 하지 그래? 아, 맞아. 채지세 님이랑은 안 친하냐?”
“친해!”
하빈이 즉답했다.
“언니와 나의 우정을 의심하지 말라고!”
“……크, 채지세 님보고 언니라니. 가지가지 한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민수가 헛웃음과 함께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하빈이 볼멘소리로 덧붙였다.
“그치만 진짠데. 저 아저씨도 나 기억할걸?”
물론 안 좋은 쪽으로.
하빈이 황마로의 사진을 건너다보며 팔짱을 꼈다. 민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그럼 어디 전화 연결해 볼까?”
“전화?”
“내가 황마로 님께 연락해 보면 바로 해결될 일 아냐? 네 말이 진짜인지. 진짜 네가 황마로 님을 만났는지.”
민수가 핸드폰의 ‘영상통화’ 버튼 위로 손을 올렸다.
‘이쯤이면 쫄리겠지, 현하빈?’
그도 거짓말을 해 봐서 안다. 막상 검증이 들어가게 되면 쫄리게 되는 게 사람 심리.
‘설사 얘가 황마로 님을 진짜 만났다 해도 별일 아니었을걸? 황마로 님은 기억도 못 할 텐데. 아마 지금쯤 허세부린 걸 후회하고 있을 거다!’
때마침 하빈이 대답했다.
“음, 난 저 아저씨랑 별로 통화하고 싶지 않은데.”
‘저것 봐, 벌써 쫄았잖아?’
민수는 가차 없이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보고할 게 있으니, 현하빈과 모르는 사이라면 그냥 보고를 위해 연락드렸다고 하면 될 일.
뚜르르-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민수는 현하빈의 기색을 살폈다.
“뭘 진짜 전화씩이나.”
잔뜩 귀찮다는 표정. 그러나 그 얼굴은 민수가 보기에 낭패한 얼굴로 읽혔다.
딸각.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야?
거친 말투와 함께 날아온 물음. 민수가 기다렸다는 듯 현하빈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아, 길드장님, 다름이 아니라 길드장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혹시 아는 사람이신지…….”
-뭐? 내가 누굴 알아?
황마로가 짜증난 말투로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민수가 카메라를 틀자, 화면 안에 현하빈의 모습이 잡혔다.
-뭐, 무슨……!
현하빈의 모습을 발견한 황마로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황마로가 입을 열었다.
-허억,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사,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