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67) (67/268)

067. 목숨을 걸 줄 아는 당신을 위한 짜릿한 여행지 (2)

“……누나한테 방금 물어보니까, 피데스 님이 본인 입으로 직접 ‘자기가 공략했다’고 말했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맞다며, 자기도 같이 봤다며 피데스 그 인간이 50층 공략했다고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흐음…….”

본인이 50층을 공략했다고 주장한 피데스.

그 사칭에 대해 채지석이 심각한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아마 뭔가 계획이 있었을 거야. 이유 없이 그러실 리가 없어! 그럴 분이 절대 아니라고!”

그동안 채지석이 지켜본 피데스는 절대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비열한 일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50층이 공략된 이유를 몰라서 그랬던 거면 ‘저도 왜 공략되었는지 모르겠다’라고 솔직하게 말했을 텐데, 굳이 본인이 했다고 한 거라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빅 픽쳐가 있을지도 몰라. 섣불리 판단하긴 일러.’

반면, 하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뭐? 채씨, 지금 가면마법사의 편을 드는 거야? 실망이야!”

그녀가 다 녹아 버린 얼음 컵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한껏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지? 사람은 원래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워낙 비밀이 많은 사람이잖아? 우리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걸?”

채지석이 고개를 저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좋은 분인 건 맞아. 나쁜 의도로 그랬을 리가 없어.”

“흠, 가면 마법사를 꽤 믿는 모양이네? 두터운 신뢰야.”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채씨, 가면마법사는 그렇게 잘 믿으면서 왜 나는 안 믿어? 그 녀석 믿는 거 반만큼이라도 나를 믿어 봐라, 좀.”

“내가 언제 너를 안 믿었는데?”

“음…….”

채지석의 반문에, 하빈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굴렸다. 그녀가 컵에 남아있는 작은 얼음 한 개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매번 나만 보면 잔소리하잖아. 그만 좀 놀으라고.”

매번 놀러 가려던 현하빈의 땡땡이는 언제나 채지석의 눈부신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연수원 입소 첫날부터 지금까지. 얼굴만 보면 ‘너 오늘도 연수원 무단결근이지!’라며 지적했던 채지석.

그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야. 나도 이유가 있어서 놀지 말라고 하는 거거든? 연수원 그렇게 빠져서 어쩌려고 그래? 솔직히 나 없었으면 너 재연수 받았어!”

“채씨만 생각이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라구. 나는 다~ 생각이 있어서 노는 거라니까? 믿어봐!”

“그건 절대 못 믿겠다.”

“……이것 봐! 그럴 줄 알았어. 나를 못 믿잖아?”

하빈이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그녀가 앞에 놓인 태블릿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화면에는 피데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오고 있었다. 하빈은 톡톡 화면을 건드렸다.

“……어쨌든 가면 마법사,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봤어.”

[나도 다시 봤느니라. 그동안 정의로운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헤자르가 탄식과 함께 맞장구를 쳤다.

[감히 너의 공적을 뺏다니! 정말 실망이니라! 전사라면 절대 그런 비열한 수를 써서는 안 되는……!]

“아아니? 실망은 무슨? 처음으로 고마워서 그래!”

[……?]

신난 표정으로 대답하는 현하빈.

그녀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태세전환에 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고?”

피데스에게?

‘그동안 원수 보듯 했으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하빈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응, 당연히 고맙지! 정말 완벽한 대처였어. 본인이 했다고 나선 덕분에 내가 의심받을 일이 없잖아? 귀찮을 일이 없다구.”

이제 아무도 하빈이 50층을 공략했다는 걸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빈이 톡톡, 화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흐음, 가면마법사. 내 특별히 가면 벗기는 걸 미뤄주지. 다음에 보면 인사나 해야겠어.”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태블릿을 인벤토리에 마저 쏙 집어넣었다. 그녀가 기지개를 쭉 켰다.

“이제 노을 보러 가야지! 이러다 해 다 지겠어!”

“…….”

* * *

노을로 유명한 킬스크린 선셋 카페의 앞. 해변에 비치된 파라솔 옆, 썬 베드에 나란히 누운 그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이 섬 관광객처럼 보이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특히 현하빈은 언제 샀는지 ‘I♥KI(I love Killscreen Island)’라고 적힌 관광용 티셔츠를 입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크으, 노을 예쁘다.”

수평선을 따라 라벤더색으로 물든 구름과 하늘.

하빈이 옆에 있는 잔을 들어 하늘에 대고 건배했다.

짠-

청량한 파도 소리, 예쁜 하늘. 거기다 상큼한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기분이란!

“……아주 좋아! 사실 버킷리스트에도 있었어.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하기’.”

“몰디브에서 모히또겠지.”

옆에서 칵테일을 마시던 채지석이 끼어들었다. 하빈이 홱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엥? 채씨, 영화 ‘외부자들’도 안 봤어? 재미없긴.”

어깨를 으쓱한 하빈이 허공에 대고 찰랑 잔을 흔들었다. 그걸 흘깃 보던 지석이 물었다.

“애초에 그거 모히또는 맞냐? 색깔이 다른데?”

“복숭아 주스야.”

“모히또 아니잖아!”

“그치만, 진짜 모히또는 시고 쓰단 말이야.”

하빈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쪼록, 복숭아 주스를 마셨다.

‘그럼 버킷리스트엔 왜 적은 건데……?’

말을 말자.

채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 지는 하늘은 꽤 예뻤다.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동안 일하러 방문할 생각만 했지, 제대로 이곳 노을 본 건 처음이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채지석이 모처럼의 낭만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하빈이 지적했다.

“흠, 그런데 채씨는 놀아도 돼?”

“어?”

“채씨는 일이 많잖아.”

하빈은 지난 솔라리스 방문 때, 그들을 향해 돌진하던 서류무더기의 향연을 잊지 않았다.

“나보고 놀지 말라고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저번에 이준휘 비서님이 일 많다고 이를 갈고 있지 않았어? 빨리 안 돌아가면 그분이 채씨를 죽이지 않을까?”

살해 동기는 업무 과중으로 인한 상사에 대한 복수?

살벌한 추측에, 채지석이 급히 대답했다.

“……괘, 괜찮아. 죽이진 않을걸? 죽이면 일손이 하나 더 줄어드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잖아?”

“오, 꽤 합리적인걸?”

“그리고 지금은 여유가 생겨서 쉬는 거야. 떳떳한 휴식이란 거지.”

여유가 생겼다고?

“그 많던 서류, 설마 다 처리한 거야? 말도 안 돼!”

대충 봐도 인간이 처리할 분량이 아니었는데.

하빈이 선글라스를 내리며 물었다. 채지석이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자, 내가 지금 당당하게 놀 수 있는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 번째는-”

“첫 번째는?”

“누나가 복귀했다는 거야.”

“아하!”

그러고 보니 채지세가 킬스크린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이제 누나도 킬스크린에 머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을 활용해서 실시간으로 재빨리 업무를 처리해서 준다더라고.”

공략 마무리 회의, 보도자료 준비에 솔라리스 업무까지.

그것도 킬스크린에 다녀와서 쉴 틈도 없이 바로 임무에 투입된 채지세. 정말 여러모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와, 역시 언니!”

“덕분에 일이 장난 아니게 줄었어. 이준휘 비서님은 아주 신나셨고.”

“그럼 두 번째는 뭐야?”

하빈이 나머지 한 손가락을 눈짓했다. 채지석이 깊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네 덕분에 나도 킬스크린에서 일을 했다는 거지.”

이프시네가 마련해 준 완벽한 호캉스 컨디션.

덕분에 몬스터와 싸울 필요도 없었고, 야영할 필요도 없이 푹 쉬어가며 채지석은 업무를 틈틈이 처리할 수 있었다.

“진짜로 킬스크린에서 업무를 다 해보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배를 잡고 구릅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아마 이건 아무도 못 믿을 거라며, 킬스크린에서 영화 보는 사람이나 업무 처리하는 사람이나, 똑같다고 말합니다!]

“안 똑같거든요. 저는 중요한 일이라서 한 거거든요?”

솔라리스가 걸린 일인데!

메시지에 대꾸하던 채지석, 그는 갑자기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떠오른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 이제 비서님이 ‘거봐요! 던전에서도 일할 수 있잖습니까, 하하!’ 하고 매번 일 주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큰일인데…….

채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결론을 내렸다는 듯 덧붙였다.

“일단 완료된 서류들을 지금 바로 전송하지는 않고, 검토 후 내일쯤 전송하려고. 킬스크린에서 일을 이렇게나 많이 한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오, 채씨가 꼼수를 부리는 날도 다 있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냐. 누가 봐도 의심할 일처리 속도니까.”

여기까지 두 번째 이유.

그것을 모두 들은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이따 야시장도 같이 가게?”

“응. 가려고. 거기서 저녁 먹는 게 오늘 일정 아니야?”

“맞아! 보니까 유명한 맛집 정말 많던데, 그중에서 저녁으로 뭐 먹지……?”

하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늘 저녁은 뭘로 정할까.

누가 보면 마치 세계의 존망이라도 걸린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듯 인상을 찡그린 무거운 얼굴.

“로제 스리라차 치킨도 엄청 맛있을 것 같고, 클로디드 크림 블루베리 케이크도 장난 아닐 것 같아. 흠, 역시 이 케이크는 디저트로 먹거나 인벤토리에 넣고…… 아니다, 그냥 거기 메뉴 다 사서 인벤토리에 넣어야지! 그래도 오늘 먹을 메뉴는 하나로 정해야 할 텐데……!”

그녀가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을 때.

채지석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이걸로 넘어가 주는구나.’

지금 그는 마지막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채지석이 지금 놀고 있는 세 번째 이유.

그건-

‘지금은 현하빈을 지켜보는 일이 다른 것보다 더 급선무일 것 같단 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장 커다란 변수.

무려 킬스크린에서 홀로 50층을 공략해 놓고도 지금 모른 척 시침을 떼고 있는, 미스터리한 세계 최강자.

‘혼자 놀게 뒀다간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저번 26층에도 혼자 뒀다가 단신으로 보스를 잡아버렸고, 이번에도 50층에서 혼자 보스를 잡아버렸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얘 맨날 혼자 놀겠다고 핑계 대면서 보스 족치고 다니는 거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

꼭 의심이 아니더라도, 일단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그가 썬 베드에 등을 기대며 저물어가는 노을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도 설마 이틀 사이 큰일이 생기진 않겠지?’

야시장이나 면세점 같은 곳에서 일이 생겨봤자 얼마나 큰일이 생기겠냔 말이다.

* * *

……라고 생각한 지 한 시간 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이걸 왜? 그것도 왜 이렇게 많이……?”

“인생은 모 아니면 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채지석은 자신의 예상을 철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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