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어느 날 갑자기 마계를 양도받은 사람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3점)
“시바.”
현하빈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그러쥐었다.
대체 어쩌자고 이걸 나한테 넘겨?
심지어 넘기자마자 이렇게 쏙 내뺐어?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외국인 선배에게 맵닭볶음면 문화체험 시켜줬다가 쓸데없이 굉장한 반지를 떠맡게 되어 버렸다.
“이 자식, 다음번에 잡히면 가만 안 둔다!”
하빈이 깊은 빡침을 억누르며 이를 갈았다.
“내가 어떻게 그동안 조용히 살았는데!”
‘현하빈, 정체 들키는 게 어지간히 싫나 보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시우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청력이 좋을 테니 방금 헌터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다 들었을 것이다.
이제 헌터들이 마족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것도 알았을 테고, 이 광경을 다 지켜봤다는 것도 알았을 테지.
안 그래도 헌터들은 현시우에게 달려와 묻고 있었다.
“피데스 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공략 완료라니요?”
“혹시 저희가 모르게 뭔가 하셨습니까?”
“그게…….”
현시우는 흘깃 현하빈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려야지.”
“…….”
여전히 이를 갈고 있는 현하빈의 살벌한 표정. 네아이바가 재미있다는 듯 깐죽댔다.
[하하, 어지간히 당황했나 보네. 그럼 그렇지. 힘 숨기는 게 어디 쉽나? 애초에 저렇게 질색할 거면 뭐 하러 킬스크린까지 따라왔대?]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이번엔 여기 또 왜 왔는지?’
역시 현하빈, 노는 척하면서 몰래 활동하려는 계획일 듯.
현시우는 그쪽에 추측을 더 실었다.
[야, 나 좋은 생각 났다! 이참에 그냥 쟤가 했다고 찔러버려. 그럼 바지사장 행세도 끝 아니야? 귀찮고 오글거린다는 월랭 1위, 단물도 다 빨았는데 현하빈한테 넘겨주자!]
‘그랬다간 바지사장 행세가 끝나는 정도에 그칠 게 아니라, 제 인생도 같이 끝날 것 같은데요?’
현시우는 하빈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구든…… 내 평온한 일상을 망치면 가만두지 않아.”
으드득.
[…….]
“…….”
[그, 그래도 넌 혈육이니까 봐주지 않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
네아이바가 유쾌한 목소리로 합리화를 시전했다. 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혈육이니까 한 번쯤은 넘어가 줄 수 있겠죠?’
[그래, 그러니까…….]
‘저도 한 번쯤은 더 도와주죠, 뭐.’
현하빈, 넌 나한테 빚진 거다.
현시우는 헌터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굉장히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급하게나마 제가 50층을 공략 완료시켰습니다. 정석 루트는 아니고 편법을 쓴 거라 반지는 얻지 못했지만요.”
“역시 피데스 님!”
“믿고 있었습니다!”
헌터들은 다행히 그의 말을 믿어 주었다. 편법으로 공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지만, 애초에 그들이 50층에 온 것부터가 이미 편법이었으니.
현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다들 진짜 공략자인 현하빈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겠지.’
그러는 와중에도 헌터들의 감탄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피데스 님이야. 클라스가 달라. 어떻게 50층을 편법으로 공략하신 거지?’
‘50층에 올 수 있다는 것부터가 믿기지 않았는데, 공략까지 해내시다니.’
‘그래서 회의 때도 안전한 방법으로 50층에 다녀올 수 있다고 강조했군요!’
‘정말로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공략을 마치다니!’
‘오오, 피데스 님!’
50층 공략으로 인해 한층 더 높아진 피데스에 대한 신뢰. 단지 월랭 1위를 향한 경이가 아니라, 정말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우러르는 듯한 존경.
‘윽…….’
현시우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채지세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뭐? 본인이 공략했다고?’
마침 멀리서 그 꼴을 지켜보던 채지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공략은 현하빈이 한 건데?’
채지세도 이미 지석에게 들었기 때문에 지금 저 마신이 현하빈인 걸 알고 있었다. 방금 현하빈이 반지를 얻었기 때문에 50층이 공략됐단 사실도.
그러니 50층 공략자는 명백하게 현하빈이 맞다. 채지세가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는데.
‘왜 피데스는 본인이 한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지?’
“흐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
채지세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현하빈의 공을 본인이 다 가로채려는 수작인가?’
물론 그게 ‘현하빈’이 이뤄낸 성과인 건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이 공략한 것이다.’라고 저렇게 대범하게 말할 정도라니.
‘이상해.’
채지세는 그동안 피데스에 대해 꽤 안다고 자부했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헌터들을 이끌고 종횡무진 활약한 피데스.
그 과정에서 최상위 랭커이자 솔라리스 길드마스터인 채지세 또한 그와 여러 번 협업을 해왔다.
‘누군가의 공을 가로채다니, 그 정도로 비열한 사람처럼은 안 보였는데 말이야.’
오히려 공명심과 명예에 딱히 관심 없어 보일 정도였다. 필요할 때만 결정적으로 한 번 나서고, 사사로운 일들에는 간섭하지 않는 게 그의 스타일.
온갖 정·재계 인사들이 그와 친해지기 위해 달라붙어도 선을 지키며, 어떤 세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깨끗하고 청렴한 모습까지.
채지세 또한 그 점들을 좋아했기에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던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지? 진짜로 본인이 공략에 성공했다고 착각한 건가?’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쁠 리는 없는데.
피데스는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언제나 냉철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로 유명했다. 때로 채지세가 위기감을 느낄 만큼.
‘가끔 솔라리스가 가진 비밀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꿰뚫고 있는 게 아닌지 소름이 끼치더란 말이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어. 채지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채지세 님! 이제 공략 끝났으니 함께 돌아가야죠.”
마침, 근처에 다가온 다른 헌터가 지세한테 속삭였다. 지세는 상념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고마워요. 잠깐 한눈을 팔다가.”
“이제 공략이 끝났으니 자유자재로 탑을 나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같이 이동하는 게 좋으니까요, 하하!”
헌터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지세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완전히 걸음을 떼기 전, 멀리 있는 하빈을 돌아보았다.
화를 다 내고 지쳤는지, 현하빈은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씨, 난 모르겠다. 내가 이런다고 마계를 덥석 맡아줄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이야! 난 집에 갈 거라고. 그냥 딸기 뷔페 가버릴 거임.”
“…….”
돌아가면 잊지 말고 좋은 딸기 뷔페부터 예약해야겠다.
지세는 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걸음을 옮겼다.
* * *
“다 갔어?”
피데스가 헌터들을 이끌고 다 사라진 후, 하빈이 지석에게 물었다.
“다 간 것 같은데…….”
지석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채지세한테 전해 들은 헌터들의 인원수와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킬, ‘꿰뚫는 눈’을 사용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킬스크린 밖으로 나갔어.”
“아, 들키는 줄 알았네.”
현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연회 중간 즈음부터 헌터들이 여기 들어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반갑다며 손을 흔듭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며, 본인한테만 슬쩍 이야기해 달라며 눈을 빛냅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귀에 손을 갖다 대고 당신을 쳐다봅니다!]
라고, 전부터 계속해서 울렸기 때문이었다.
채지석이 ‘현하빈=마신’이라는 사실을 불어버린 후부터 그랬다. 참 호기심이 많은 성좌였다.
그걸 놓치지 않고 그때 당시 현하빈은 ‘가장 가까운 빛’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던 것이다.
‘여기 지세 언니가 있어서 온 거지? 그럼 다른 헌터들도 왔어?’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다른 헌터들도 연회장에 왔다며, 자신이 비밀을 알려줬으니 현하빈도 비밀을 알려줘야 한다고 조릅니다!]
물론 현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안 알려주면 주변 헌터들에게 다 알려 버릴 거라며 으름장을 놓습-.]
‘<찬탈자의 기개>!’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빛을 잃고 사그라듭니다!]
‘이거 꽤 효과가 있었네?’
아헤자르보다 낮은 급의 성좌를 무력화시키는 특성.
그걸 쓴 이후에는 ‘가장 가까운 빛’도 미안하다고, 안 물어볼 테니 다신 그걸 쓰지 말라며 부탁했다.
너무 심했나.
하빈이 뒤늦게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미안, 나도 어떻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는걸. 더 잘 알게 되면 알려줄게.’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번만은 넘어간다며 삐진 듯 고개를 돌립니다.]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연회장 안에 헌터들이 있었다’는 사실.
“앗, 그러고 보니 이걸 글리치한테 써먹어 볼걸 그랬어. 생각도 못 했다!”
현하빈이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찬탈자의 기개>가 성좌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스킬이라는 것.
대놓고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글리치가 성좌인 걸 깜빡 잊고 사용하지 못했다.
“뭐, 어차피 본래 목적은 핵맵닭볶음면 소스 체험이었으니 결과는 같았겠지만.”
“흠흠, 마신님.”
때마침, 근처에 있던 크릭샤가 손을 비비적거리며 말을 붙였다.
“음? 크릭샤?”
“저…… 아까 뿌리시던 붉은색의 독은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인지요?”
“새빨간 독?”
“그, 있잖습니까! 방금 침입자한테 가차 없이 뿌렸던! 위험한 용액…….”
크릭샤의 말에 지석도 궁금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네가 뿌리던 거, 그거 맞고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던데. 대체 뭐야?”
그 발언에 크릭샤가 지석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아니! 감히 이분께 반말을 하다니! 나도 못 하고 있는데!”
“…….”
“어쨌든 그 찰찰 흔들던 병! 거기 든 게 뭐냔 말이죠.”
“이거?”
하빈이 핵맵닭볶음면 소스를 들어 보였다.
“……핵맵닭볶음면?”
그걸 확인한 채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먹인 거야? 그걸로 보스를 리타이어시켰다고?!”
글리치의 무위 때문인지, 채지석은 글리치를 50층의 보스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채지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병에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 이거, 라벨만 이렇고 안에 든 건 독이라던가 그런 거 아니지?”
“냄새 맡아 봐. 맞거든?”
“진짜잖아? 스킬 써서 확인해봐도 그냥 핵맵닭볶음면인데?”
“내가 뭐랬어? 맞다니까!”
둘이 한창 실랑이를 하고 있자 크릭샤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아니, 두 분만 알지 말고 저한테도 알려줍쇼! 이건 어디서 전해지는 비급입니까? 재료과 배합법은……!”
흥분했는지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크릭샤.
“뭐어? 재료? 배합법? 그게 궁금하다고?”
“넵!”
“으음, 크릭샤가 그동안 친절하게 해준 거 생각하면 가르쳐 주고 싶기는 한데…….”
하빈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크릭샤가 안달을 냈다.
“앞으로도 더 친절하게 굴 것이니 걱정 마십쇼! 이 정도는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빈은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 그래도 곤란할 것 같아.”
“……어째서죠?”
크릭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설마, 마신이 꽁꽁 감추고 싶어하는 전설의 비급인 것인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에 궁금증을 가져버린 것일까?
‘역시, 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굉장한 것을 노려버린 것이다.
잔뜩 긴장한 크릭샤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조사가 쌈양식품이야.”
“예?”
하빈은 뒷면에 적힌 ㈜쌈양식품. 이라고 된 글씨를 척 가리켰다.
“그리고 대기업이지.”
“제작자를 아시는군요! 그럼 제작자를 족치면 되는데! 아, 혹시 제작자가 입을 열지 않는답니까? 감히! 그렇다면 제가 직접 손톱을 뽑아서!”
하빈이 뚱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크릭샤야, 네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데, 대기업은 절대 건드리는 게 아니야. 물론 소기업도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대기업은 특히나 아주 더 위험한 곳이란 말이지.”
“위험하다니요? 대체 마신님에게 위협이 되는 곳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이야! 남의 영업 비밀 알아내는 건 산업 스파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산업 스파이는 불법인걸! 철컹철컹.”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말하지만 빨간 줄 그이는 건 절대 안 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