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63) (63/268)

063. 멀쩡한 학연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6)

콰앙!

“모두 물러서세요!”

현시우는 주변 헌터들을 뒤로 물렸다.

글리치와 현하빈의 공방은 일격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강력했다. 까닥 잘못 휩쓸렸다간 아무 관련 없던 제삼자 헌터들이나 마족들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도저히 끼어들 틈이 안 나.’

쉴 틈 없이 치열하게 몰아치는 둘의 싸움.

그나마 현시우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하빈의 본 실력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1회차 때는 네아이바를 주 무기로 삼아, 마법 위주의 공격을 했던 현하빈.

하지만 이번에는 아헤자르가 주 무기가 되었으니 근거리의 검술 위주 공격이 주가 되었다.

“이전 생엔 마법사 포지션이라, 검사 포지션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째 이쪽을 더 잘하는 것 같다?’

누가 보면 몇십 년간 검술만 수련한 사람인 줄 알겠네.

충격파로 날아오는 바람 사이로, 현시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잘하면 어쩌잔 거야?’

* * *

그리고 같은 시각, 현시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또 있었으니.

키잉!

‘……이걸 막는다고?’

한발 물러선 글리치가 인상을 찡그렸다.

마계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마법(魔法)의 대가(大家)다.

그러니, 그 정점에 선 마신은 말해 무엇하랴.

지금 그가 쓰는 마법 하나하나가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주술이고, 공격이었다.

웬만한 힘이 아니고서는 상쇄조차 할 수 없는 힘.

혹시라도 썼다가 상대가 죽을까 봐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면 꺼내놓지도 않던 것이었는데.

챙-!

그것들이 지금 저 인간의 검격 하나에 상쇄되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랬다. 문제는 현하빈이 지금 한 손으로 그 모든 것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글리치 또한 전력으로 공격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저 인간은 아예 보란 듯이 한 손만 사용해서 그와 싸움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조그마한 소스 통을 들고 있었으니까.

글리치는 하빈의 왼손에 들린 의문의 소스를 노려보았다. 싸우기 전부터 각오하라며 꺼낸 빨간 소스 통.

‘핵맵닭볶음면 소스’

라고 적힌 걸 보니…….

“…….”

설마 그가 생각하는 그런…… 용도의 소스는 아니겠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컵라면’의 알싸한 맛. 어쩐지 식은땀이 흐른 글리치가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아직도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있나 봐?”

현하빈이 살벌한 표정으로 다른 한 손에 들린 소스 통을 흔들었다. 리드미컬한 동작과 충격파로 인해, 뚜껑이 반쯤 열리며 매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향기.

“…….”

일단 저걸 먹으면 엄청난 고통이 엄습한다는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글리치는 그의 마생(魔生)처음으로 미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하?”

그가 기가 차다는 듯 감탄사를 흘렸다.

고작 그런 걸로 이 글리치가 두려움을 느낀다니, 정말 다른 성좌나 시스템 관리자가 알면 영원히 비웃을 감일 것이다.

‘상황을 우습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매운 소스통으로 상대를 협박하며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내다니. 그것도 마신의 공격을.

이 정도면 아예 상황을 우습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갖고 노는 수준이다.

‘그럴 수 있는 여유 또한, 그만큼의 실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글리치는 현하빈이 그의 다음 마법을 깔끔하게 잘라내는 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게다가 저 기술…….’

마신의 일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검기. 그리고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간단히 상쇄하는 특유의 검술까지.

이건 웬만한 성좌도 해낼 수 없는 경지다.

‘한때 인간계에서 아주 유명했던 전설 속 무신이 떠오르는데. 기분 탓인가?’

잡힐 듯 말 듯한 실마리 때문에, 글리치가 잠깐 회상에 잠긴 순간이었다.

“-한눈팔지 말라고 했지?”

콰직.

“……!”

바로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인 하빈의 공격. 그것으로 인해 글리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진 자세가 되었다.

목 옆에 바로 꽂혀 스윽 살을 스치는 검. 그것을 흘깃 바라본 글리치가 입을 열었다.

“……찌르질 않았네? 나름 선배라서 봐준 거야?”

아직도 기가 살았는지 꽤나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하빈은 그 얼굴을 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니? 봐주긴 개뿔.”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경쾌한 동작으로 소스를 찰찰 흔들었다.

겉포장지에는 화려한 글씨체로 제품명과 홍보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흔들어드세요! 핵맵닭볶음면 소스.

-더욱 강렬한 매운맛을 즐기세요!

뚜둑.

뚜껑을 제대로 뜯자 방금까지 스치던 캡사이신의 냄새가 더욱 위험하고 짙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더 굉장한 걸 경험시켜 드리려고.”

“자, 잠깐.”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글리치가 몸을 굳혔다.

“후배 된 도리로서, 선배한테 어? 귀한 음식 대접해 드려야지!”

“음식……. 저게 음식이라고?”

독 아니고?

검붉은 소스 통을 바라보는 글리치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

하빈은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글리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소스를 푹 찍어-

“다시는 마늘의 민족을 무시하지 마라.”

“크흐악!”

글리치의 눈가에 친절하게 발라주었다.

* * *

“역시, 잔혹한 인간!”

저 멀리 떨어져, 하빈과 글리치의 모습을 보던 크릭샤. 특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글리치의 모습을 보며 크릭샤는 감탄을 흘렸다.

“호오! 그나저나 저건 뭐지? 저런 고문 도구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주 창의적이군!”

26층에서 본인을 고문 전문이라고 소개했던 크릭샤. 그는 처음 보는 검붉은 독-크릭샤는 핵맵닭볶음면 소스가 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의 출처와 재료 배합법에 상당히 흥미를 가졌다.

“다음에 저 인간과 친해져서 꼭 제조법을 알아내겠어……. 아, 아니지. 저 인간이 여기 다시 오지 않기를 빌어야 하는데.”

흠흠.

멋쩍게 헛기침을 하는 크릭샤.

“……그래서 선배님, 생전 처음 느껴보는 캡사이신 맛이 어떠실까?”

한편 현하빈은 글리치에게 핵맵닭볶음면 소스를 상냥하게 입에 털어 넣어주고 있었다.

“큭, 커헉. 이건, 콜록-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쪽도 나한테 너무했거든? 나 죽일 뻔한 거 알지?”

“안 죽었으면 된 거지. 오히려 스킬도 얻었으니 좋잖아?”

“……이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커헉?”

하빈이 병의 각도를 기울였다. 더 가파르게 밀려 내려오는 소스에 글리치가 재빨리 대답했다.

“애, 애초에 네가 나 먼저 사칭했던 걸 잊었어?”

“아, 맞네?”

주르륵.

하빈이 아차, 하는 얼굴로 들이붓던 소스를 멈추었다.

“……2 대 1이야. 이러면 후배님이 선을 넘은 거지.”

글리치가 하빈을 노려보았다. 어지간히 매웠는지, 눈가가 발개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흉한 아우라는 전혀 죽지 않았다.

매운맛에 눈썹을 찡그린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일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을 맺은 그가 마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역시 전설답게 마신님은 이길 수가 없네요!”

방금까지 살벌하게 중얼거리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무해한 목소리.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하빈이 인상을 썼다.

“와아아! 마신님!”

“역시 마신님께서 마계를 평정하러 돌아오셨다!”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던 마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만세를 불렀다. 태연한 얼굴로 그 반응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글리치. 누가 보면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표정의 그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약속대로, 이 반지는 이분에게 줘야겠군요.”

“뭐어?”

‘그런 약속을 했었다고?’

하빈은 발코니에 있느라 듣지 못한 내용이었지만 글리치는 그사이 분명 자신을 꺾으면 반지를 주겠다고 모든 이들에게 말해놓은 상황.

글리치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또 한 번 미안하게 됐네. 네가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건 익히 알았지만.”

글리치가 스윽,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조용히 살기엔 너무 아까운 힘이잖아?”

“…….”

하빈의 눈앞에 띠링띠링 알림창들이 떴다.

[마신이 직접 내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로 반지를 양도받았습니다.]

“……!”

스르륵.

하빈의 왼손 약지에 검붉은 반지가 생겨났다. 50층 공략 조건이었던 ‘마신의 반지’.

[적법한 승계이므로 ‘마신의 반지’가 가진 숨겨진 기능이 해금되었습니다.]

[반지의 숨겨진 기능으로 인해, 성좌를 습득합니다!]

[당신의 두 번째 성좌로, 미등록 성좌, ‘마신 글리치’가 추가됩니다.]

“뭐?”

[제2 성좌: 글리치]

멸망한 첫 번째 세계, 아우라이던, 그중에서도 인간계가 아닌 마계를 관할했던 마신.

알려진 정보가 극히 적다.

[특성]

마신의 경이(글리치가 가진 마법 계열 스킬을 불러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선학의 의리(글리치의 동의하에, 원하는 장소에 글리치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성좌의 내력으로 인해, ‘마계’와 관련된 모든 성좌가 당신을 우호적으로 인식합니다.)

(*미등록 성좌입니다. 기억 연동 및 일부 시스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동문 관계입니다.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힘을 불러오는 데 제약이 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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