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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59) (59/268)

059. 멀쩡한 학연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2)

‘살다 살다 이런 놈은 또 처음이군.’

글리치는 난간에 팔을 기대며 물끄러미 현하빈을 관찰했다.

매번 다른 얼굴로 모습을 바꿔오며 여행을 다녔던 그는 자신을 홀대하거나 친근하게 구는 자들을 꽤 여럿 만나보았다.

그동안 그의 정체를 안 존재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귀결되었다.

‘사악한 존재들의 우두머리여! 내 칼을 받아라!’

적대하거나.

‘뭐? 마신? 네가? 거짓말하지 마라!’

믿지 못하거나.

‘살려주세요!’

‘아이고! 전설 속 마신님이시라니, 귀한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두려움에 떨며 아부하거나.

대부분은 세 번째의 반응이었다.

아부하고 두려움에 떠는 반응이 가장 일반적. 그러지 않는 자가 있어도 힘을 보여주면 모두 간단하게 정리되었고.

그래서 이 녀석도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

놀라서 무릎을 꿇거나,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사칭까지 하다가 들켰으니 꽤나 찔려서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이 상황은 뭘까.’

후루룩. 챱챱.

글리치는 아주 맛깔나게 라면을 흡입하는 현하빈의 모습을 보며 난간에 턱을 괴었다.

그녀는 그가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전혀 긴장감 없이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휘적휘적.

재빠르고 경쾌한 젓가락질과 더불어, 반짝이는 눈빛에서는 소소한 행복감마저 엿보였다.

후룹!

“……크으, 이 맛이야!”

국물까지 깔끔하게 들이킨 하빈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맛있게 먹고 있다.’

일부러 연기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앞에 두고도 밥이 넘어가다니?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단언컨대 이 반응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하빈을 향해 물었다.

“무슨 맛이 나길래 그렇게 맛있게 먹지?”

그의 말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헉, 선배님? 설마 후배의 군것질거리가 탐나신 거예요?”

“…….”

“사실 저, 오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단 말이에요. 인간적으로 이건 지켜 주셔야 됨.”

소중하게 컵라면을 끌어안는 현하빈.

“…….”

‘요것 봐라?’

이제껏 여유롭게 웃던 글리치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먼저 ‘후배’라고 지칭하기는 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까부터 선배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태도라니. 이 인간은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까지 계산하고 이렇게 구는 걸까?’

그의 기세에도 전혀 꺾이지 않고 태평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 그의 대화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는 말투까지.

그의 오랜 경험상, 이런 놈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진짜로 눈치도 없고 간덩이도 부은 또라이거나.

아니면…….

‘일부러 또라이처럼 굴 뿐, 사실 다 알고서 초강수를 두는 중이거나.’

글리치의 미소가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짙어졌다. 이 ‘후배’가 전자면 조금 실망스럽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이보다 더 탐나는 인재도 없을 것이다.

“……농담이에요, 선배님!”

바로 그때였다. 현하빈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그녀를 주시하던 글리치의 따가운 시선. 그 태도에 드디어 백기를 든 것일까?

“제가 너무 무례했죠? 그래. 무례했지, 무례했어. 선배님 오셨는데 라면이나 먹어대고…….”

이제 본론을 꺼낼 셈인 모양이다. 글리치가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 시선을 읽었는지, 현하빈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선배님도 드릴게요.”

“뭐?”

“배고프신 분 앞에서 제가 너무 혼자 먹었죠?”

인벤토리에서 쏘옥 두 번째 컵라면을 꺼내 건네는 현하빈.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면서요? 그렇다면야 이참에 K-라면의 신세계를 구경해보쉴?”

마계엔 봄감자…… 아, 아니, 컵라면 없지?

불쑥 내밀어진 빨간 컵라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미 조리된 상태로 인벤토리에 넣어둔 거라 딱 알맞게 익은 상태였다.

뚜껑 사이로 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라면 특유의 매콤한 감칠맛이 스르륵 허공으로 퍼졌다.

하빈이 속으로 생각했다.

‘마족들은 붉은색 좋아한댔는데. 마신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선물용으로 꽤 괜찮은 상품일지도? 진작 줄 걸 그랬나?’

하빈 또한 먹는 동안 끊임없이 쳐다보는 글리치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분도 배가 고팠을 수도 있는데 너무 나 혼자 먹은 듯.’

사실 배가 안 고파도 라면은 언제나 사람을 배고프게 하는 법이다. 옆에서 먹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덩달아 먹고 싶어지는 음식.

하빈은 문득 피시방 알바 시절을 떠올렸다. 피시방에서 누구 한 명이 라면을 시키면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냄새를 맡고 라면을 따라 시켰다. 줄줄이 들어오는 라면 주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더랬지.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좀 잘못했네. 지켜보는 동안 얼마나 배고팠을까?’

하빈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재차 컵라면을 건넸다.

“선배님. 자고로 남이 끓여주는 라면이 제일 맛있는 거 아시죠?”

“…….”

“자. 어서, 불기 전에 드세요.”

‘아까도 불면 안 된다고 심각하게 이야기하더니.’

그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가?

하빈의 재촉에 글리치는 탁, 하고 컵라면을 받아들었다. 빠른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국물 하나 새지 않았다. 꼼꼼히 컵라면을 살피던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건 뭐지?”

컵라면 뚜껑에 끼워져 있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가리키는 글리치.

“아! 그거 이리 줘봐요.”

따악!

깔끔하게 젓가락을 쪼갠 하빈이 그것을 다시 그에게 처억 내밀었다.

글리치는 골똘한 표정으로 하빈과 자신이 받은 젓가락을 번갈아 보았다.

두 개의 나무막대기라.

인간들 중에서도 몇몇 나라는 이런 도구를 써서 음식을 먹는다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다.

“아, 여긴 젓가락 없어요? 제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하실래요?”

그가 나무젓가락을 너무 오래 응시했는지, 하빈이 물었다. 글리치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도 할 수 있어.”

선배를 뭘로 보고.

이래 봬도 셀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마신이었다. 이런 문화쯤은 간단하게 적응할 수 있다.

어쩐지 오기가 생긴 마신이 어설프게 젓가락질을 따라 했다.

휘적…….

젓가락에 라면 몇 가닥이 빨간 국물을 담뿍 머금고 딸려 올라왔다.

‘어디, 무슨 맛인지나 보자.’

그가 마침내 탱글한 면발을 입에 넣었다.

꼬들한 면발. 그 사이로 들어오는 따끈하고 감칠맛 나는 육수의 맛은-!

“컥!”

큽, 쿨럭. 컵!

“이게 무슨 맛이, 크헙!”

화끈하게 입안을 강타하는 얼얼한 매운맛!

한참 기침을 뱉은 글리치가 살짝 눈물이 맺힌 눈을 쓸며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쿨럭! 독을 먹는 게 취미였나?”

“엥?”

그랬다.

마신은 맵찔이었다.

* * *

[최초로 마신을 울렸습니다!]

[이룰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지 않습니다.]

[레벨이 없습니다. 레벨이 오르지 않습니다.]

[칭호 ‘마신을 울린 자’를 얻습니다!]

띠링띠링.

뭘 이런 걸로 칭호씩이나?

별 도움 안 되는 알림창을 무시한 채,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마신의 등을 토닥였다.

토닥토닥.

“아직도 매워요?”

“쿨럭.”

“에휴……. 참 손이 많이 가는 선배님이시네. 자, 여기 콜피스.”

하빈이 인벤토리에서 쏘옥 콜피스를 꺼내 건넸다. 누군가 본다면 ‘그 소중한 인벤토리에 왜 콜피스 같은 걸 넣어 다니냐!’며 기가 찰 광경이겠지만 하빈에게 인벤토리는 그저 식량 창고로 쏠쏠히 쓰이고 있을 뿐.

종이팩에 톡, 하고 빨대까지 야무지게 끼워 넣은 하빈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마신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자요.”

“……이것도 독은 아니겠지?”

“아, 진짜. 독 아니니까 빨리 마셔요! 이거 마시면 괜찮아지거든요?”

“…….”

“나보고 후배라면서. 하늘 같은 후배 못 믿음?”

“……하늘 같은 선배겠지.”

한마디도 지지 않은 글리치가 쪼록 음료를 빨았다.

한입 만에 깔끔하게 사라지는 매운맛! 그리고 산뜻하게 퍼지는 복숭아향까지.

“흐음, 꽤 괜찮은데?”

음료가 꽤나 마음에 든 듯, 특유의 싱글거리는 미소를 되찾은 마신을 보며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마신이 맵찔이었을 줄이야.’

맵닭볶음면 줬다간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마신을 독살(?)한다는 오명을 쓸 뻔했다!

“진짜 의외다. 마족, 마신이면 마라 맛이나 용암 맛 좋아할 것 같은데 심라면도 못 먹는다니.”

“용암 맛? 후배님은 용암도 먹나 봐?”

“아, 말이 그렇다고요, 말이. 대체 누가 용암을 먹어?”

“내가 할 소리야. 너야말로 마계에 대해 무슨 편견을 가지고 온 거지? 후배님 눈에는 마족들이 용암도 꿀떡 삼키는 괴물로 보이나?”

“으음. 확실히 우리 이프시네는 술이랑 풀만 뜯고 살 것 같긴 한데.”

“…….”

가볍게 이어지는 대화들.

어느새 그가 들고 온 쟁반에서 칵테일 잔을 들고 온 하빈이 짠, 하고 글리치의 콜피스와 건배를 했다.

얼떨결에 덩달아 건배를 한 글리치가 남은 컵라면을 보며 혀를 찼다.

“그쪽이야말로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먹는 문화인가 봐?”

입안을 할퀴듯 지나가는 알싸한 고통의 맛을 회상하며, 글리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미소를 지었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매운 축에도 안 드는데요? 이분 핵맵닭볶음면 드시면 기절하시겠네.”

앞으로 마신을 사냥하려는 용사들에게 꿀팁을 전수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마신의 약점은 맵닭볶음면!

“아무튼 이렇게 매운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문화라는 거지? 정말 무섭군.”

“그럼요. 마늘의 민족을 무시하면 X 되는 거죠.”

“뭐?”

“아니에요, 선배님.”

하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알림창을 곁눈질했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당신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뜨는 알림창.

이건 성좌 메시지다.

하빈이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마신도 성좌로 분류된다는 건가?’

하지만 조금 달랐다.

일단 메시지 색이 다른 성좌와는 달리 어두운색으로 표시된다는 점.

‘이건 뭐 ‘마신’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진짜 문제는 이것이었다.

[경고! 시스템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성좌’입니다. 기존 성좌 시스템과 다른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미등록 성좌?’

[미등록 성좌라는 말은 나도 처음 본다.]

아헤자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빈이 찜찜하다는 듯 물었다.

‘애초에 성좌가 맞긴 한 거야? 저렇게 몸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데?’

그동안 익히 알려진 성좌들은 죄다 간접 메시지로만 소통하고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실체가 보인다 해도 아헤자르처럼 물건이나 정령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인간 아니라 마족이지만-으로 활동하는 성좌는 아직까지 발견된 적 없다.

[아니, 원래라면 성물급 정도가 되는 성좌는 인간형으로 다닐 수 있었다! 과거에는 나도 인간형으로 다녔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그동안 내 화려한 과거 행적들에 대해 듣지 못했느냐?! 그렇게 열심히 설명했건만!]

‘설명이 아니라 자랑이겠지…….’

[자랑이 아니라 전부 사실이었다! 내가 한때는, 대륙을 전부 제패하고 황제니 신이니 추앙을 받았는데,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자면-!]

김잘잘. 이대로 두었다간 또 자신의 화려한 라떼라떼 스토리를 한 시간 넘게 줄줄 읊어댈 게 빤하다!

위기감을 느낀 하빈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은 왜 인간형을 못 하는데? 검이라 알바도 못 하고, 카카페 캐시 못 번다며 저번에 울었잖아!’

[우, 울긴! 내가 언제 울었느냐! 그리고 인간형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나를 포함해 애초에 인간형을 할 수 있는 성좌는 한 손에 꼽을 거다! 나처럼 강력하지 않으면 상상도 못 할…….]

‘그래서 지금은 왜 못 하는데? 약해졌어?’

[약해지긴! 오히려 내가 너무 강해서 관리자가 겁을 먹어 봉인시킨 것이다! 마지막 싸움 이후, 차마 날 소멸시킬 능력까지는 안 되니까 자신의 힘을 모조리 써서 겨우 인간형만 막고, 그 답답하고 더러운 상자에 넣어 숨겨둔 거지!]

‘흐음.’

하빈은 뒤로 이어지는 아헤자르의 말을 흘려들으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자, 그러니까…….

결국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성좌만 인간형이 가능하다.

잘잘이는 너무 강한 나머지 관리자의 견제를 받아서 인간형이 지금은 봉인된 상태.

마신 글리치는 미등록 성좌라고 뜨지만, 인간형 상태니까 잘잘이만큼 꽤 강력한 성좌인 모양.

잠깐. 그러면……?

‘그럼 잘잘이랑 글리치 중에 누가 더 세?’

[당연히 나지! 감히 마신 따위를 나에게 비비다니! 내가 예전에……!]

“선배를 맞은편에 앉혀 놓고 딴생각 하는 것도, 그쪽 문화인가?”

아, 너무 오래 글리치를 혼자 내버려 두었나 보다. 하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서 선배님이 아까 무슨 말을 했더라?”

“여긴 무슨 일로 왔냐고.”

“…….”

마침 글리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빈은 그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빛에 전혀 웃음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글리치가 말을 이었다.

“아까 말을 들어보니 경매에 나온 반지에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그걸 노리고 있나? 내 반지를?”

가까이 다가온 그가 살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게 뭔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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