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멀쩡한 학연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1)
몰려오는 마족들을 피해 하빈은 홀로 발코니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에휴……. 제발 한숨만 좀 돌리자.”
덧문으로 연회장과 분리된 공간이었다. 난간 너머로 정원과 마계의 하늘이 보였다.
‘마신님!’
‘마신님은 어딜 가셨어?!’
여전히 안쪽에서는 그녀를 찾는 마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낼 것 같은 저 뜨거운 열기! 어쩐지 오싹한 위기감을 느낀 하빈이 문고리를 턱, 잡았다.
“문도 잠가야겠어!”
끼릭, 끼릭.
성공적으로 문까지 잠근 그녀가 지친 듯 난간에 걸터앉았다.
“……으으, 기 빨려.”
그녀가 손에 챙겨온 카나페를 조심조심 난간에 내려놓았다.
“휴우. 이제야 뭐 좀 먹어보겠네!”
아까부터 이상하게 뭘 먹어보려고만 하면 다들 말을 붙이고 난리였다. 다행히 중간에 친절한 크릭샤가 먹을 걸 챙겨주려 했었는데.
“막상 크릭샤가 대령해 준 음식 먹으려고 하니까 또 헤르밋인가 뭔가 하는 놈이 갑자기 이프시네를 괴롭히고!”
그래서 아까부터 한 입도 못 먹었다!
이 정도면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 세계의 법칙이라도 적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빈은 푸욱 한숨을 쉬고 턱을 괴었다.
“어제 이프시네 집에서 대접받은 경험으로는, 마계 음식이 꽤 별미였어. 여긴 마왕성이니까 그 이상으로 굉장한 음식을 차렸겠지?”
하빈이 눈앞에 놓인 카나페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색 크림치즈 위에 검고 동그란 알갱이가 올라간 음식.
“이것 봐. 이건 마계상어의 알로 만든 카나페래! 지구로 따지자면 캐비어 아니야? 이런 걸 맛볼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신나서 한 입 베어 문 하빈이 곧이어 인상을 썼다.
“으, 비려!”
퉷퉷.
아무래도 메뉴 선정에 실패한 모양이다. 하빈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리베는 잘만 먹던데. 역시 용이랑 인간 입맛은 다른가 봐.”
[아니, 고작 음식을 먹겠다고 여기로 도망까지 온 것이냐?! 그게 뭐라고!]
“뭐어? 나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거든? 인간은 말야, 자고로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거야!”
꼬르륵.
마침 뱃고동이 울렸다. 하빈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을 꺼냈다. 유사시를 대비해 출발 전 집에서부터 챙겨 온 비상식량!
“마침 딱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뜨거운 물 붓고 3분 뒤에 넣어두었지. 원래 여행 와서 입맛 안 맞을 땐 컵라면이 최고거든.”
자고로 한국인의 해외여행 필수품은 고추장과 매운 컵라면이다. 꼼꼼한 하빈은 그것을 잊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딱 부러뜨린 그녀가 라면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빨리 먹고, 지세 언니를 찾아봐야겠어. 아까 보니 채씨 옆에 붙어 있는 마족이 지세 언니 같아 보이던데……. 나가면 채씨에게 물어봐야지. 집에 어떻게 돌아갈지도 생각해 보고.”
달아나는 와중에도 하빈은 채지석과 그 주변을 살핀 모양이었다.
채지석과 쑥덕대던 마족, 그녀를 대하는 지석의 표정이 꽤나 친근했다. 무엇보다 그 마족, 하빈을 향해 짓는 뿌듯한 표정까지.
‘딱 지세 언니 표정이랑 똑같았는데.’
그녀의 추측에, 아헤자르가 의외라는 듯 끼어들었다.
[나름 그 와중에도 생각이란 걸 하고 있었느냐?]
“엥? 날 뭘로 보고! 난 원래 계획적인 인간이야! 이것 봐. 마계에 시네빔이랑 컵라면까지 챙겨왔잖아. 이렇게까지 준비해 온 헌터 있으면 나와 보라 해!”
[애초에 마계에 올 때 그런 걸 챙기는 인간이 어디에 있냐!]
“그치? 다들 준비성이 없다니까! 나만 한 사람이 없어요!”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앗, 빨리 먹어야지. 맛있겠다!”
아헤자르와 툭탁대던 하빈은 이내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재빨리 컵라면으로 눈을 다시 돌렸다.
‘경치 좋고, 바람 좋고. 라면도 딱 알맞게 익었고.’
마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의외로 꽤 장관이었다. 노을처럼 펼쳐진 선홍빛 하늘을 배경으로.
그녀가 마침내 첫 젓가락을 후후 불어 후루룩 입에 넣는 순간.
달칵.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그리고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까지.
[현하빈, 누군가 여기로 들어왔다!]
‘아! 왜 또! 누군데!’
나 라면 좀 먹자!
하빈이 잔뜩 속이 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누가 나의 즐거운 라면 타임을 망치러 왔지?’
이제 겨우 한 젓가락 먹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빈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그녀가 몸을 돌렸다. 마침내 발코니에 들어온 마족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온 이는 무도회장에 있는 여러 시종 중 한 명이었다.
칵테일 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 은발의 머리와 붉은 눈의 마족. 아마 음료를 권하려고 온 모양이었다.
하빈은 다시 나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음료 필요 없으니 나가 봐.”
[근데 라면 먹다 보면 목마를 수도 있지 않느냐?]
‘어? 웬일로 김잘잘이 그런 중요한 조언을?’
그거 무척 일리가 있는걸? 그냥 한 잔만 달라고 할까?’
하빈이 고민에 빠져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였다. 은발의 마족은 우아한 동작으로 들어온 문을 다시 닫았다.
달칵.
문이 잠긴 걸 확인하듯, 흘깃 문고리를 쳐다본 마족이 입을 열었다.
“아니. 음료 때문이 아냐. 난 너 보러 온 거니까.”
“……뭐?”
마족의 말투를 들은 하빈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재차 확인하듯 아헤자르에게 물었다.
‘방금 쟤, 나한테 반말했냐?’
[반말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도 들었다!]
“……흐음.”
하빈의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시종이 마신에게 반말을 한다고?’
딱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건방지거나 하는 감정이 든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하빈은 진짜 마신이 아니니까. 누가 어떻게 대하든 알 게 뭐람.
그러나 ‘시종’이 ‘마신’의 직급에게 반말을 한 이 상황 자체가 마계에서는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마계의 사회.
덕분에 그동안 하빈이 지켜본 다른 마족들은 마왕이나 마신 앞에 납작 엎드려 기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헤르밋 같이 마신에게 대드는 놈도 있었지만, 그 녀석도 ‘마왕’ 수준의 강자였기 때문이고, 위계를 역전하려는 ‘도전’의 의도에서 했던 거니까.
애초에 마신에게 도전할만한 강자는 마왕급이 아니면 어렵겠지.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한 마왕은 없었어.’
하빈은 채지석이 보여준 일곱 마왕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답은 두 가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은 은발의 마족을 보며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첫 번째, 그냥 간덩이가 부은 마족이거나.
‘그게 아니면.’
진짜 그 정도의 강자거나.
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마족, 뭔가 있었다. 여유로운 걸음도, 알 수 없는 아우라도. 그냥 가볍게 넘길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헤자르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때마침 은발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누가 감히 내 사칭을 하나 궁금해서 지켜봤는데.”
남자는 딸각. 쟁반을 난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가볍게 걸린 미소와 다르게 눈빛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어쩐지 그 순간, 하빈은 무심코 마신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씩 웃었다.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더라고.”
“…….”
“감히 날 사칭하는 머저리인가 싶어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금 보니 사칭범이 아니라, 후배 같아서.”
“뭐?”
‘뭔 개소리야 저거?’
후배라니.
난 님 같은 선배를 둔 적이 없는데?
시시각각으로 썩어들어가는 하빈의 표정과 달리, 남자는 ‘후배’라는 어감이 마음에 드는 듯, 입가에 손을 올리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오천 년 동안 후계자감이 어디 없나 생고생을 했더니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은.”
‘하, 망했네.’
이쯤 되면 하빈도 이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사칭했다’는 발언, ‘오천 년 동안 후계자감을 찾았다’는 발언.
이건 누가 들어도 이 작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을 거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래. 이런 알림창 따위 띄우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진짜, 마신이 나타났다.
하빈은 알림창 너머로 웃고 있는 마신의 눈을 노려보았다.
* * *
마신 글리치가 하빈에게 정체를 공개한 직후.
“……아하, 그러셨어요? 그 전설의 마신님이셨어요?”
마침내 정적을 깨고 하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시 라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사칭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나름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일단 라면부터 좀 먹을게요!”
“……?”
[……?]
정적.
그녀의 말을 해석하지 못한 듯 그대로 조용히 하빈을 주시하는 글리치.
그는 짧은 침묵 끝에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날 앞에 두고도 그…… 라면을 먹겠다는 말이 나오나?”
후루룩.
하빈은 대답하지 않은 채 라면을 한 젓가락 더 입에 넣었다.
“에(네).”
“…….”
[현하빈, 뭐 하는 거냐! 지금 이 상황에서 라면을 먹다니? 아무리 네가 강하다지만 마신을 무시하는 행동은 분명 실수하는 거다! 놈은 마계의 지배자, 마계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으니.]
‘내가 언제 무시한대?’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마신의 발언을 되짚었다.
‘……지켜보니 후배 같다고 했었지.’
지금의 마신은 하빈에게 호의적이다. 후계자감을 찾고 있었다고 했고 그래서 ‘후배’인 하빈을 죽일 마음이 없다고 어필까지 했다.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지? 아까 헤르밋한테 허무의 전염 스킬을 썼던 걸 봐서?’
아니면 하빈이 살아있는 오류인 것을 눈치채서?
아, 머리 아파.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니 일단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너무 배고픈 상태고, 또…….
‘김잘잘, 그동안 내가 알바하면서 선배라고 나서는 분들을 많이 만나봤거든?’
[음? 갑자기 또 그게 무슨 말……?]
‘십중팔구 앞뒤 꽉꽉 막힌 꼰대더라고.’
먼저 짐꾼 일을 하던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선배랍시고 사사건건 신입에게 꼽을 주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군기 잡거나 성격 더러운 선배는, 있느니만 못해!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지금 가까이하고 말고의 아니다! 이자는 마계의 지배자, 마신이다! 그렇게 간단히 적으로 돌려서는…….]
다급한 아헤자르와는 달리 하빈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니? 적으로 돌린다는 말은 안 했는데?’
선배랍시고 꼽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배랍시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험한 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고마운 분들.
‘밥 잘 사주고 챙겨주는 선배님이시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내가 전에도 말했잖니? 세상은 혈연, 지연, 학연이라고!’
그러니 이쪽은 어느 쪽인지 보자구.
두 번째 면발을 꼴깍 삼킨 하빈이 젓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에이, 선배님!”
“……!”
느닷없이 나온 ‘선배’ 단어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마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빈이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원래 선배가 후배한테 밥도 사주고 족보도 알려주고 그러는 게 이쪽 문화잖아요. 그럼 적어도 후배 밥 먹는 거 방해는 하지 말아주셔야죠.”
“……뭐? 하.”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하빈의 태도. 마신 글리치는 기분이 상하진 않았는지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하빈은 멈추지 않고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저도 선배님과 대화를 할 수 없어 정말 안타깝지만, 지금 당장 이걸 먹지 않으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엄청난 참사라.’
글리치가 고개를 기울였다. 수천 년 동안 마계를 지배했던 글리치다. 그 이름만으로도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렸던 몸이거늘. 그런 본인 앞에서 ‘엄청난 참사’라니?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걸 먹지 않으면? 어떤 참사가 일어나지?”
“라면이 불어요.”
“…….”
다시 정적.
멍하니 있는 마신에게 하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아, 혹시 선배님은 라면이 붇지 않게 하는 스킬이 있으신가요!”
“아니…….”
“없죠? 그럼 일단 그전에 먹을게요!”
“…….”
후루루룩.
곧장 면발을 흡입하는 하빈을, 글리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오든 전설 속 마신이 오든. 그 누구도 배고픈 배를 채워주지 못하며, 소중한 라면이 붇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