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57) (57/268)

057. 어느 실험 (2)

‘이번엔 대체 또 무슨 상황인데!?’

뒤늦게 달려온 채지석은 웅성거리는 마족들의 모습과 영혼이 탈곡된 표정으로 ‘으어어’ 하고 널브러져 있는 마왕 헤르밋을 보며 그대로 멈춰 섰다.

‘……저거 뭐냐?’

채지세가 널브러진 헤르밋을 가리키며 속닥속닥 물었다. 마치 동해의 비쩍 마른 오징어가 생각나는 처참한 얼굴, 허공을 향해 내뱉는 슬픈 신음.

‘끄어…….’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겪었음이 자명해 보였다. 채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현하빈한테 깨진 마왕인 듯?’

‘마왕을 깰 수가 있어?’

역시 보통이 아니라니까.

지세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 마족들의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우와아, 마신님!”

“마신님께서 색욕의 마왕을 처단하셨다!”

“마신님께서 마계를 평정하러 돌아오셨어!”

“얘네, 어디까지 확대해석하는 거야?”

“오오오!”

마족들의 틈바구니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하빈.

설상가상으로, 채지석을 따라 달려온 다른 마족들까지 하빈에게 달려들었다.

“마신님! 여기 계셨군요!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

“마신님께서 여기 계시다고요?”

“마신님!”

“마신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젠장!”

‘이래서 높은 자리는 안 좋다니까! 랭킹 1위든, 길드장이든, 마신이든!’

낭패라는 표정을 지은 하빈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다 마침 멀찍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채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앗, 채씨!’

그를 발견한 하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침 잘 왔어!’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채지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하빈.

뒤이어 그녀가 채지석을 향해 처억, 손을 뻗었다.

“자아, 다들 주목! 저기 내 심복이 보이지? 나는 바빠서 이만 갈 테니 중요한 이야기는 내 심복에게 전달하도록!”

‘뭐?’

그걸 들은 채지석이 귀를 의심했다.

‘이걸 이렇게 나한테 떠넘긴다고?’

아니지?

아니라고 대답해!

그의 간절한 무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족들은 채지석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위대한 마신님의 심복님이시다!”

“다들 줄부터 서도록 해! 우리가 먼저 왔다고!”

‘그럼 뒤를 부탁해, 채씨!’

“아참, 그리고…….”

하빈이 모두에게 들리게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 아아니, 마신이야. 내 심복이든 이프시네든, 혹시라도 또 건드리는 놈이 있으면!”

하빈이 말없이 헤르밋을 스윽 쳐다보았다. 이미 왕창 깨진 본보기.

“재미없을 줄 알아.”

“하하,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놈이 있으면 제가 먼저 혼쭐을 내놓을 테니 걱정일랑 마십쇼!”

크릭샤가 재빨리 먼저 대답했다. 그걸 따라 다들 알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끄으어어-.

그 시각.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몽사몽 하던 헤르밋.

‘가…… 갔나?’

다들 웅성거리는 와중, 헤르밋은 마신이 가는 걸 곁눈질로 확인했다.

‘이 틈을 타서 도망가야 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가 잘 들어가지 않는 힘을 억지로 끌어모아 힘겹게 주먹을 쥐었다.

‘크윽…… 망할. 몸의 균형이 다 망가졌어.’

겨우 한 대 맞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온몸을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엉망진창이었다.

대충 때린 것 같은 동작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치명적인 공격을 했던 거지?

‘기본기부터가 다르다는 건가?’

까드득.

잔뜩 분노한 그가 이를 깍 깨물며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그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살아남아 복수를 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나를 지금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마!’

이번은 방심해서 당했지만, 다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약점이 있는 법.

‘네가 아끼는 이프시네인지 뭔지 하는 년부터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저 옆에 붙어서 살랑거리는 크릭샤도 죽여 버릴 테다!’

마신을 찬양했던 약한 마족들도 사소하게 복수를 할 것이다. 다시는 그 찬양을 입에 담지 못하게 혀부터 자르면 될까.

잔혹한 상상을 하며, 고통 속에서 헤르밋이 설핏 비열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스륵-

그의 목덜미로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

“다행이네. 아직 안 죽었어.”

무심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누구……?”

“알아서 뭐 하게.”

단칼에 잘라내는 대답.

헤르밋은 아직 땅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상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공략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이렇게 막타를 남겨주다니. 정말 오랜만에 현하빈 덕을 보네.”

꾸우욱.

“크헉!”

그가 일어서려는 헤르밋을 가차 없이 밟았다. 헤르밋이 부들부들 눈을 치떴다.

“큭…… 감히! 나에게!”

‘어떤 간 큰 새끼가 감히!’

헤르밋은 상대가 누구인지 추측을 시작했다.

‘혹시 내게 앙심을 품고 있던 놈인가? 아니면 다른 마왕의 심복?’

하도 원수를 진 곳이 많아서 누군지 특정이 어려웠다.

일단 목소리를 들어보니 주변에서 헤르밋을 노리고 있던 다른 마족인 모양이었다. 자신이 약해진 틈을 타 공격하는 거겠지.

헤르밋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래 봬도 마왕으로서 천하를 호령했던 헤르밋이다. 이런 잔챙이에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현혹!’

그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스킬을 시전했다. 아까는 상대가 너무 강해서 안 통했다지만 마왕보다 약한 자라면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시우!]

‘알고 있습니다.’

-성좌 네아이바의 특성, ‘대현자의 평정’으로 인해 정신계 마법을 성공적으로 이겨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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