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원래 타지에서 아는 사람 보면 괜히 반갑고 기쁜 거다. (1)
‘저 마신, 어쩐지 현하빈을 닮았는데.’
현시우와 채지세 사이, 강태서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 순간.
-게에엥!(저 무서운 여자가 또 나타나다니!)
태서의 망토 뒤에 숨어 있던 작고 까만 괴물이 하빈을 보며 몸을 떨었다.
얼핏 봐서는 주먹만 한 크기의 까만 덩어리 정도로 보이는 그림자 괴물. 그것은 고개를 갸웃했다.
-게에…… 게에에?(진짜 마신인가……? 어울리는 직업이다!)
괴물은 마왕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발라 버리던 하빈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게엥.(무시무시한 검술이었지.)
마왕을 손쉽게 꿇려버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괴물이 계속 망토 밖에 얼굴을 내밀며 겡겡거리자, 태서가 표정을 굳혔다.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겡겡! 게엥! 끼에엥!(그렇지만! 저 여자다! 마왕을 쓸어버린 게 저 여자라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태서는 마신과 괴물을 번갈아 보았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까만 괴물은 마신이 나타난 이후부터 오들오들 떨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상식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게엑! 게에엑!(답답! 인간! 똥멍청!)
괴물은 자신의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답답함을 표현했다.
“……!”
생각보다 괴물의 외침 소리가 컸다. 태서는 재빨리 주변 헌터들과 마족들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마신에 팔려 아무도 괴물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태서는 스킬 ‘그림자 갈무리’를 써서 괴물에게 손짓했다.
‘무서우면 여기 들어가. 망토보다 안전하니까.’
-겡! 겡겡!(멍청! 너! 머리! 쓸모없!)
‘……말이 안 통하는군.’
-껙! 께엑!(그것은! 내가 할 소리!)
“어쩔 수 없지.”
꾸우욱.
태서는 괴물의 입을 꽉 눌러 그림자 안에 욱여넣었다.
-게엥! 게에엥! 엑!(놔라, 멍청한 인간! 당장 이걸 놔라!)
결국 괴물은 바동거리며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 * *
“저, 마신님!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저번에 제가 갓난아기였을 때……!”
“비켜 봐! 마신님, 저는 기억하십니까? 제가 예에……전에…….”
하빈의 주변으로 구름 떼처럼 마족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하빈이 전혀 모르는 이들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소개하는 마족, 춤 신청을 하는 마족, 무언가를 부탁하는 마족들까지.
온갖 잘 보이려는 아부와 무언가를 탐내는 기색들. 하빈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글쎄, 오천 년 만에 다시 왔더니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미안.”
“아…… 넵. 그럴 수도 있죠……. 넵…….”
‘와 현하빈 미쳤다! 변명 최고다!’
‘아 채씨, 조용히 해봐. 집중이 안 되잖아.’
[내가 지켜본 현하빈은 언제나 변명이 준비된 자였지! 그간의 화려한 땡땡이 경력을 보면 모르겠느냐!]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삐이, 삐!
옆에서 고기를 뜯고 있던 리베가 신이 난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연회의 음식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베가 냠냠챱챱 뜯어먹는 고기에는 육즙이 가득 넘치고 있었고, 곁에 있는 포도알은 때깔 좋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배고파지는데? 나도 한 입만 먹어볼까?’
덩달아 식욕이 돈 하빈은 근처에 있는 카나페 비슷한 음식을 집으려고 했지만.
“마신님!”
“마신님! 몹시 외람되고 송구스럽지만…… 사실 저희 가문에 1만 년 전에 약조해 주신 일이 있다고 전대 가주님께 전해 들었는데, 혹시 기억이 나시는지.”
“글쎄…….”
주변의 마족들은 그녀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기억 안 나. 애초에 1만 년 전인데, 내가 기억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너희는?”
‘1만 년 전이라니, 그건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공룡은 몇 년 전에 있었더라?
하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저희를 알아 가시면……!”
마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몰려들었다. 하빈은 그 모습에 의문이 생겼다.
‘얘네는 내가 안 무섭나?’
그녀가 주변에 몰려온 마족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빈이 손짓할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것을 보면 눈에 경외와 두려움이 가득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겁이 없거나,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빈은 다시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마왕성에 도착해 있던 일곱 마왕은 각자 자신의 심복들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마족들은 하빈에게 다가왔던 것과 달리 마왕들에겐 벌벌 떨며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었다.
‘마신이 더 높은 지위인데도 불구하고, 마왕보다 덜 무섭다는 건가?’
그것참 희한한 상황이다.
자세히 보니, 각 마왕들의 성깔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음식 더 가져와! 당장! 이게 다야? 이게 최선이냐고! 주방장 목 잘라 버린다?”
밥 더 내놓으라고 깽판 치는 탐욕의 마왕이나.
“뭘 더 가져와? 이거 다 낭비야! 마왕성 예산 거덜 나면 누가 책임져? 누가 책임지는데! 여기 있는 촛불도 당장 꺼! 양초 아까워! 안 끄면 너네 목숨부터 꺼질 줄 알아!”
그 옆에서 난리 치는 인색의 마왕이나.
“쯧쯧, 저 머저리들. 역시 다른 마왕들은 나보다 급이 낮다니까. 역시 내가 다 죽여 버리고 마신의 자리에 오르는 게 낫겠어.”
라며 비열한 웃음을 짓는 교만의 마왕 크릭샤.
……크릭샤?
‘어, 크릭샤다!’
저번 26층의 보스였던 마왕.
하빈이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여기까지 왔는데, 알은체 좀 해볼까?’
하빈이 간만에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저어, 마신님.”
곁에 있던 이프시네가 조심스럽게 하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 맞아. 이프시네가 있었지?’
하도 마족들이 많이 몰려와서 잠깐 잊고 있었다. 하빈이 생각났다는 듯 주변의 마족들에게 말했다.
“자자, 다들 잠깐 주목.”
하빈이 탁탁. 손을 치자 주변의 마족들이 입을 합 다물었다.
잔뜩 몰려든 시선과 순간적으로 찾아온 정적. 하빈은 한 손으로 스윽 이프시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내가 아끼는 아이인데, 다들 친하게 지내고. 응?”
뭔가 유치원 선생님이 할 법한 대사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가볍게 던진 말.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마, 마신께서 후견인이 되어 준 마족이라니! 앞으로의 마계의 판도를 바꿀 인물이다!”
……그 정도야?
“이프시네 님, 어떻게 마신님을 만나셨나요!”
“이프시네 님, 저와 함께 춤을!”
“비켜, 내가 먼저야!”
하빈에게로 쏟아지던 관심이 단번에 이프시네에게 향했다.
앞다투어 이프시네를 향한 춤 신청과 관심에, 이프시네는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가, 곧이어 볼을 붉혔다.
그녀가 하빈에게 작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마신님. 이 정도로 도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역시 상냥한 분이시네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담담한 어투였지만 어쩐지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치맛자락을 들어 살포시 마지막 인사를 한 이프시네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연회장 가운데로 나섰다. 꽃처럼 펼쳐지는 드레스와 사뿐사뿐 내려앉는 춤사위.
모두가 그 시선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이때다! 난 간다. 채씨, 리베와 함께 뒤를 부탁해!’
‘뭐? 어디 가? 야! 현하빈!’
나보고 어쩌라고?!
당황한 채지석을 남겨둔 채, 하빈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 *
크릭샤는 오늘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마왕성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마신이 등장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교만의 마왕. 그 이름에 걸맞게 크릭샤는 코웃음쳤다.
‘마신이 오든 말든, 저 머저리 같은 다른 마왕들이 바보짓을 하든 말든, 난 반지나 차지할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결국 반지는 크릭샤,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여기서 가장 똑똑하고 위대하기 때문이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과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지는 크릭샤.
그걸 뒷받침할 강대한 마력과 실력이 있었기에 이제껏 그 자존심은 지켜져 왔다.
그가 살면서 이제껏 누군가에게 굽혀 본 적은 살면서 딱 한 번뿐.
바로 26층에서의 일.
현하빈이라는 인간에게 얻어맞고 꼴사납게 기절한 뒤,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고 비굴하게 수발을 들었던 치욕스러운 과거.
“쯧,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야. 그때 그 미친 인간…… 인간이 맞긴 했는지.”
크릭샤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얼굴 한가득 인상을 썼다.
“큼, 어쨌든 다시 볼 일은 없으니.”
비록 당시, 그 인간이 50층까지 올 수 있다고는 했었지만. 크릭샤는 다 계획이 있었다.
“하하, 그건 그 여자가 뭘 잘 몰라서 그래. 마계가 얼마나 넓은데? 내가 잘 피해 다니면 되지. 위대한 내가 그 정도 피하는 것도 못 할까 봐?”
그 미친 인간 여자는, 생각을 잘못한 거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쉽게 그를 찾기는 어려울 것!
크릭샤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손에 든 음료수를 까닥였다. 청량한 음료수의 출렁거림이 그의 기분을 더 들뜨게 했다.
“게다가 그 여자, 괜히 빨리 오지는 않겠지? 딱 봐도 귀찮음이 많은 성격이던데 뭐 하러 여길 오겠어?”
크릭샤가 기억하는 현하빈은, 세상만사가 다 귀찮단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네모난 액정화면을 보던 모습이었다.
‘데이터 안 터지잖아!’
라며 실망한 표정을 짓던.
“그래. 그 인간에게 데이터란 것이 아주 중요해보이던데 여긴 그런 게 없으니까 딱히 오고 싶지 않겠지?”
적어도 몇 년은 안심해도 될 것이다. 크릭샤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이거 맛있는데. 어디 더 없나?”
이내 생각에서 빠져나온 크릭샤가 빈 음료잔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흠흠. 거기 너! 왜 우두커니 서 있어? 이 음료 더 가져와! 빨리 안 움직이면 사형이야, 사형.”
‘묶지 말고 사형에 양보하세요!’는 여전히 그의 모토였다.
“…….”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목된 마족이 알아서 크릭샤의 특성을 알고 빠릿빠릿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 이 순간 크릭샤가 지목한 마족은-
“……네.”
마족이 아니라, 마족으로 위장한 상태의 강태서였다.
강태서는 무표정으로 까닥 대답하고 음료 잔을 확인했다. 절도 있지만 무심한 태도.
“뭐? 이 자식, 대답이 왜 그 모양이야?”
그게 크릭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제껏 크릭샤의 수발을 들던 마족들은 모두 비굴하거나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허어억,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전하의 수발을 들게 되어 영광입니다.’
‘넵, 분부 받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에 비해 강태서는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고, 두려움에 떠는 것도 아니고.
특히 저 차가운 눈빛은 크릭샤와 본인이 동등하다 생각이라도 하는 듯 건방졌다. 크릭샤는 그게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요즘 아랫것들 군기가 이렇게나 빠졌나?’
저 녀석은 본보기로 처리할까.
크릭샤는 손에 마력을 실었다. 새까맣고 불길한 기운이 그의 주위로 넘실거렸다. 그가 막 강태서의 뒤통수에 대고 공격을 하려는 찰나.
“크릭샤!”
“……?”
그를 부르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바로 옆, 무척 가까운 곳에서.
크릭샤는 곧바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새카만 가면을 쓴 여자.
굉장히 오랜만에 나타났다는 전설 속 ‘마신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