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웰컴 대환장 마계여행! (5)
늦은 밤.
채지석은 간식을 까먹으며 서류를 보다가, 졸리다며 자신의 방에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아헤자르와 하빈, 단둘이 남았을 때 아헤자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현하빈 네가 왜 마신과 스킬이 닮았는지 알 것 같다.]
채지석이 ‘마신과 하빈의 스킬도 비슷하고, 하빈의 스킬명도 수상하다’고 지적했던 부분. 그건 하빈도 궁금했다.
“어떻게 알아?”
침대에 누워 있던 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일부러 말 안했지만…….]
오, 그렇단 말이지? 웬일로 얌전히 있다니, 잘잘이도 꽤 눈치가 생긴 모양이다.
잠깐만. 이게 아니지.
혹시 잘잘이, 이 녀석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추궁했다.
“설마 잘잘이 네가 마신이랑 관계있었던 거야? 네가 내 성좌니까 스킬도 불러올 수 있잖아.”
[아니! 아니다! 애초에 마신의 능력들은 나랑 관계있는 스킬이 아니야!]
아헤자르와 관련된 스킬은 모두 <무신의 부활> 특성에만 한정된 것.
<비활성 해제>나 <이공간 진입>, <허무의 전염>은 모두 현하빈 고유의 스킬.
[네 스킬은, 너 자체가 세계의 오류인 것과 관계되어 생긴 스킬이지.]
처음부터 상태창을 볼 수 없었던 참가자. 금지된 플레이어. 살아있는 오류.
[그래서 시스템 관리자도 널 제거하려 드는 것이고. 네 스킬도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종류인 거니까.]
<허무의 전염>은 상대의 스탯 중 하나를 완전히 무시한다.
<이공간 진입> 또한, 세계의 오류 사이로 진입해 존재하지 않는 루트를 발견하는 것.
[이런 류의 스킬을 마신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마신도 너와 비슷한-]
세계의 오류로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살아있는 오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거나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다. 시스템이 가만둘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혹시나 너처럼 살아남아, 그 잠재력을 키워낸다면…….]
‘마신’의 자리까지도, 오를 수 있는 걸까.
그 이야기를 듣던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흠, 그럼 그 마신이란 놈도 나처럼 시스템이 적대하는 존재인 데다가, 비슷한 스킬 계열을 타고났단 말이지?”
[그렇다. 난 그렇게 추측해.]
“…….”
아헤자르의 이야기를 들은 하빈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한참 조용히 있어서 잠들었나, 할 때쯤에서야 하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마신 중에 누가 더 셀까?”
[……?]
같은 희귀 속성 계열을 가진 다른 종족. 다른 테크트리.
“설마 마왕성에서 마주치지는 않겠지?”
그럼 꼼짝없이 마신과 싸우게 될 테고. 너무너무 귀찮아질 거다.
“설마…… 무려 5천 년간 실종이라는데 갑자기 뭐 하러 하필 그 자리에, 그것도 내 앞에 나타나겠어?”
진짜로, 그럴 리는 없겠지.
인상을 찡그리던 하빈은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다시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
* * *
다음날.
“전하! 지난밤은 강녕하셨습니까!”
아침이 되자마자, 복도에 일렬로 늘어서 인사를 올리는 하인과 하녀들.
그 선두에 인사를 올리는 이프시네를 보며 하빈은 짐짓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입을 터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아침부터 ‘그래, 내가 마신이다! 그냥 정체 한 번 드러내봤어!’라며 얼렁뚱땅 공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안 그래도 하빈의 말 한마디에 기겁하는 녀석들인데, 그러면 다들 너무 놀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직은 탐욕의 마왕 차림을 한 상태.
‘그래도 말할 건 말해야겠지.’
하빈은 일단 서두를 던졌다.
“……강녕 못하다.”
그 말에 다들 기겁했다.
“허어어억!”
“어, 어떤 점이 미흡하셨나요!”
“역시 간식을 더 드렸어야 했을까요!”
“아침 식사가 별로셨습니까?!”
이프시네의 걱정스런 말에, 복도 끝에 서 있던 주방장이 화들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다, 다시 내올까요? 다시 내오겠습니다!”
“음식을 더 가져오거라!”
“흐이익!”
잠깐.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이건 내가 예상한 그림이 아닌데?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빨리 해오겠습니다!”
“아니 괜찮…….”
“전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이것들이 진짜.’
1절 2절 3절……. 대체 몇 절까지 할 셈이야?!
하빈은 결국 그들이 알아들을 방식으로 툴툴댈 수밖에 없었다.
“흥, 필요 없어!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두지 못해?”
“넵, 네엡!”
드디어 진정된 소란에, 하빈은 비로소 말하려던 주제를 던졌다.
“그리고 이프시네, 언제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야?”
그 말에 이프시네가 놀란 토끼눈을 떴다.
“네?! 제가 감히 마왕님께 거짓을 고하다뇨!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
“물론입니다!”
이프시네는 머리를 휙휙, 아래위로 재빠르게 끄덕였다. 하빈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넌 나를 마왕으로 생각하지 않잖아.”
“네……?”
“내가 진짜로 누군지, 눈치챈 줄 알았는데.”
“네?!”
이프시네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방금 들은 말이 뭐지?’ 하는, 명백하게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설마-!”
헉.
그녀의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어제의 고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빈을 마신으로 추측했던 지난 밤. 그리고 마신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간절한 바람.
‘그렇지만 정말로 마신님……이신 건가?’
“지, 진짜로요?”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는 이프시네.
정말로 바랐던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말로 일어날 수 없을 거라 낙담했던 사실이다.
그게 눈앞에 실현되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눈빛, 그러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은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좋아. 이쯤이면 적당히 연출을 해도 되겠지?’
그걸 확인한 하빈이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꼬았다.
스륵.
하빈의 손이 닿은 곳부터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바뀌었다. 오묘한 보랏빛, 푸른빛, 금빛까지. 한참 반짝거리던 빛깔은 마침내 검은색으로 자리 잡았다.
하빈의 얼굴도, 기존에 가장했던 수수한 탐욕의 마왕 얼굴에서 하빈이 가진 ‘원래 얼굴’로 바뀌었다. 눈만 마족의 특징인 붉은색으로.
“헉, 허억! 진짜로!”
그 모습을 확인한 이프시네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진짜로 그분이셨어!”
“…….”
‘뭔데. 무슨 그분인데?’
이게 무슨 볼X모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이런 것도 아니고. 왜 마신을 마신이라고 말하질 못해?
하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흑.”
하빈이 대답이 없자, 이프시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처음 탐욕의 마왕을 대할 때와는 달리, 훨씬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진중한 목소리였다.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프시네 릴 모르페시아, 모르페시아 몽마 가문의 여식이, ‘허무의 마신’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래.”
‘다행이다. 제대로 속아 넘어간 거 맞네.’
하빈이 뒤늦게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저택의 모든 인원이 얼빠진 표정으로 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숨죽여서 이프시네와 하빈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와 미쳤다. 현하빈 연기력 장난 아니다.’
[대단해.]
-삐!
구석에 쭈그러져 있던 아헤자르와 채지석, 리베가 슬금슬금 속삭였다.
‘쉿! 열심히 분위기 잡았는데 집중이 안 되잖아!’
‘미안. 근데 너무 굉장해서. 이걸 찍어 놨어야 했는데……. 누나랑 같이 보게.’
‘보긴 뭘 봐!’
‘왜 상태창에는 스크린샷 기능이 없는 걸까?’
그들이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이프시네가 끼어들었다.
“……저, 마신님, 그럼 바로 채비를 할까요? 마차와 짐은 모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면 경매일 전까지 늦지 않으실 겁니다.”
“좋아. 빠릿빠릿해서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이프시네는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이제 보니 무도회에 갈 준비로 옷까지 아주 화려하고 반짝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분홍빛 머리카락과 맑은 분홍 눈동자. 까만 레이스와 흑수정, 로즈쿼츠로 장식한 아름다운 드레스.
그 차림에서 그녀가 얼마나 무도회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잠깐,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하빈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이프시네에게 물었다.
“혹시 너네 집에 남는 가면 있니?”
* * *
전날, 마신과 그 심복으로 위장하기로 한 하빈과 채지석은, 변장 모습에 대해 나름의 회의를 했다.
“아무리 변장해도 채씨는 티가 나. 아무리 컬러렌즈 껴도, 염색하고 화장해도, 채씨의 채씨같은 분위기가 난다고.”
“너도 마찬가지거든? 마신으로 위장한다면서, 네 본모습을 하면 어떡해?”
“하지만 이래야 크릭샤도 놀래킬 수 있고, 지세 언니한테도 설명이 편하고. 딱히 마신 컨셉을 무슨 모양으로 할지도 지금 당장 정하기 어려우니까.”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내 본모습을 할 경우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어.”
“선발대를 만나는 것?”
“맞아.”
이미 마계에 들어와 있는 피데스와 지세, 강태서를 비롯한 50층 원정대를 마주친다면.
‘너희 뭐야? 너네 어떻게 따라왔어?’
같은 소리를 듣고, 의심을 살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하빈의 50층 방문 능력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렇게는 안 되지.
하빈은 톡톡, 얼굴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위로 스르륵 가면이 생겼다.
‘기만자의 소망’ 스킬로 복장이나 아이템 모양을 바꿀 수 있는데, 그것을 응용한 것이었다.
무도회에 어울릴 만한 검은색 가면을 쓴 하빈이 말을 이었다.
“가면마법사만 가면 쓰는 특혜를 누리게 둘 수는 없지. 나도 가면 쓸 권리는 있다고!”
막상 써보니 정체도 안 들키고 참 편한데?
‘이걸 그동안 본인만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썼단 말이지?’
찜찜한 표정을 짓던 하빈은 이내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말했다.
“채씨도 가면 써. 채씨는 너무 네임드라서 아무리 변장해도 저쪽에서 알아볼 가능성이 너무 크니까.”
채지석이 대답했다.
“근데 현하빈, 나 가면 같은 거 안 챙겨 왔는데?”
“뭐어? 그건 정말 곤란한 일이잖아?”
결국, 그들은 이프시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이프시네, 가면 있어? 무도회 가면. 아무튼 비슷한 거.”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게 마신님의 심복님께 어울리실지 모르겠네요…….”
장식 없는 하얀 반가면을 가져온 이프시네가 채지석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 그러고 보니 이분은! 어제는 인간이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마족……!”
컬러렌즈 아이템과 체취를 가리는 아이템들을 사용한 채지석의 모습을 보고 다들 웅성거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인간이라고 확신했는데, 오늘 보니 새빨간 눈이 영락없는 마족의 모습.
‘마신님께서는 인간을 마족으로 바꾸는 능력도 있으신 건가?’
‘아니면 원래 마족이었는데 인간으로 위장하고 다니신 분인가?’
하인들이 수군수군 속삭이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하빈은 끄응,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면을 채지석의 얼굴에 씌웠다.
다행히 꼭 맞아들어가는 가면. 그것을 톡톡 쳐준 하빈이 다시 몸을 돌렸다.
“알면 다친다고 했잖아. 시간 없으니 빨리 출발하자.”
“넵!”
무도회 준비를 마친 이프시네가 들뜬 표정으로 길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