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웰컴 대환장 마계여행! (4)
이프시네 릴 모르페시아.
모르페시아는 몽마 일족의 가문이다.
운 좋게도 이프시네는 척박한 마계에서도 고위 마족으로 태어났다.
이프시네의 아버지는 모르페시아 가문의 가주였고. 어머니도 그에 못지않은 마족 가문 출신.
하지만 그녀는 부모님에게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강한 건, 이렇게 귀족으로 살 수 있는 건, 그저 우리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마계는 척박한 환경을 바탕으로, 엄격한 계급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이든 왕이든 오로지 약육강식의 원리, 힘으로 모든 위계가 결정되는 곳.
그것을 뚫고 올라와 마계의 정점에 선 일곱 마왕은 강력했지만 그에 걸맞게 가차 없는 성정을 보였다.
다른 고위 마족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인품보다 강함이 우선되는 세계에서 부드럽고 여린 성정을 가졌다가는 뒤통수 맞기에나 딱 좋았다.
약한 건 죄였고, 강한 건 숭상받는 세계.
그런 상황에서 ‘우린 그저 운이 좋아 강한 거’라고 주장한 이프시네의 부모는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특히 가주 자리를 넘보는 친인척들이 더 그랬다.
‘저런 식으로 굴다가 언제 한 번 등에 칼 맞을 거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가주 자리를 가져가야지.’
이렇듯 약한 가문은 도태되고, 강한 가문만이 살아남는 마계의 법칙. 그중에서 이프시네의 부모는 약한 마족들도 포용하려 애썼다.
그리고 다른 마족들이 오로지 강해지기 위한 수련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과 달리, 틈이 나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했다.
‘물이 더럽고 부족한 환경이니까, 이런 식물을 심어서 정화하면 어떨까?’
‘이프시네가 좋아하는 발광등을 우리 영지 곳곳에 두면, 약하고 겁많은 마족들도 안심하고 돌아다닐 텐데.’
덕분에 그들의 영지는 약소 마족들 사이에서 ‘꿈의 도시’로 불렸다.
꿈을 먹고 사는 몽마 일족과, 약한 마족들의 이상향이란 뜻을 한데 담은 이름.
‘우리는 몽마야. 꿈을 먹고 사는 존재지.’
‘마계는 겉으로 보기에 끔찍하고 절망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단다. 가끔 꿈을 엿보면 알 수 있거든. 다들 주어진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지만…….’
‘더 나아지길 바라는 자도 있고, 쉬어가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다는 걸, 우리는 봤어.’
이프시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계의 하늘은 여전히 새까맣지만, 그 아래에는 잔잔하게 반짝이는 여러 불빛이 있었다.
모두 이프시네의 부모 대에 설치한 수많은 발광등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밀려난 마족들과 사악하고 징그럽게 생긴 괴수들이라 해도, 누군가는 오늘밤 저 불빛 아래에서 지친 몸을 뉘겠지.
새롭게 가족을 찾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나가는 마족들도 점점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프시네가 모르페시아 가문을 잇지 못한다면, 다른 이가 그들의 영지를 차지한다면 이 광경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제가 꼭 지켜낼게요. 반드시 부모님의 뜻을 잇는 훌륭한 가주가 될 테니까요.”
이프시네의 여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꼬옥 책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진짜로 그분이, 마신님이셨으면 좋겠는데.”
이프시네가 마왕보다 마신을 더 찾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예전. 부모님께 지나가듯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마왕님들은 아주 무서운 분이지만, 마신님은 잘 모르겠어. 그분도 우리처럼 고민을 하셨던 것 같아서…….’
‘어떤 고민이요?’
‘마계를 좋게 바꾸고 싶어 하시기는 하는데, 아직 못 찾은 게 있다고 하셨대.’
못 찾은 게 뭘까. 그렇게 대단한 분도 찾고 있는 게 있을까.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 씩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은, 좋은 것만 생각하자! 그분께서 무도회에 데려다주신다고 했으니,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이 진짜로 마신님이라면, 그리고 정말로 무도회에 데려다주신다면.
이프시네의 입지는 굳어질 테고, 가주 자리를 지켜내기도 쉬워질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이프시네.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잔뜩 긴장했는지, 여전히 떨고 있는 목소리.
하지만 그녀는 굳은 다짐을 하며 일어섰다.
날짜에 맞추어 마왕성에 도착하려면, 내일 당장 출발해야 시간이 넉넉할 것이다.
의상도, 준비물도, 혹시 몰라 대비해야 할 사항들까지. 미리미리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마왕성에서 만나게 될 분들에 대한 정보도 다시 확인을 해 두어야겠지. 혹시라도 공격을 받게 되면 내 힘으로 이겨 나가야 하고. 또…….”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이프시네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꼬박 새어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 * *
한편, 하빈이 배정받은 침실.
채지석은 현하빈의 스킬을 떠올리고 있었다.
<허무의 전염>.
‘마신이 관장하는 게 허무라고 했는데.’
게다가 마신 급이 되어야 쓸 수 있는 스킬을 써서 이프시네와 다른 마족들을 모두 깜빡 속여넘긴 현하빈의 행보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채지석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현하빈,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응?“
“너, 설마…….”
굉장히 무거운 표정의 채지석.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채씨, 그러고 보니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혹시 화장실 급해? 영화 멈춰줄까?”
영화 볼 때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서럽지.
하빈도 그 마음을 잘 알았다.
선심 쓴다는 듯 재생 멈춤 버튼을 가리키는 하빈에게 채지석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거 아니야!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결국 그는 속 시원하게 질문을 던졌다.
“너 설마, 진짜로 마신은 아니지?”
“엥.”
현하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한심하단 눈빛으로 채지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육포처럼 생긴 간식을 지익 뜯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신? 내가?”
[마신? 얘가……?]
아헤자르도 어이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다들 마왕이니 마신이니 난리라서 골치 아픈데, 채씨까지 왜 이래? 또 놀리는 거야?”
“아니, 그렇지만. 넌…….”
채지석은 아주 잠깐, 하빈을 ‘너’라고 불러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래도 이제껏 너라고 잘 불렀으니 괜찮겠지?
그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그들에게 보이도록 돌렸다.
“일단 다들 이걸 봐 줘. 이건, 이프시네의 방에 잠입시킨 초소형 스파이 로봇이 읽어낸 자료야.”
“스파이 로봇?”
“알잖아, 우리 누나 취미. 이것도 누나 발명품이지.”
소형 카메라로 찍힌 서적의 내용들이 태블릿에 좌르륵 떴다.
“아까 이프시네가 ‘0’이라는 서적을 찾아 읽고 있었거든. 허무의 마왕과 관련된 자료 같아서 로봇에게 전송시켰는데 스킬 종류가 너랑 비슷한 것 같아.”
-허무의 마왕은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어디선가 나타나기도 하며, 누군가의 공격이나 특성을 무시하기도 한다.
-갑자기 허공으로 사라졌다가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
“이건 우리가 50층 진입할 때 네가 쓴 스킬과 비슷한데.”
바로 <이공간 진입>.
“그랬나?”
현하빈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두 번째로 꼽은 특징.
-누군가의 공격이나 특성을 무시하는 것.
채지석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현하빈의 고유 스킬이었다.
<허무의 전염>이라는 스킬.
마침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넌 ‘허무’라는 단어가 들어간 스킬도 있고, 마족들도 마신처럼 느꼈다고 하고. 말도 안 되게 강한 데다, 킬스크린도 여러 층을 넘나들 수 있고.”
“…….”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너랑 마신이 모종의 관계가 있거나, 네가 마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어, 그래……. 논리적인 생각.”
하빈이 푹푹 한숨을 쉬면서 턱을 괴었다.
“에휴, 그럼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채씨, 내가 진짜 마신이었으면 이러고 있겠어?”
-삐이이…….
하빈이 짐짓 슬픈 얼굴로 리베를 툭툭 쓰다듬었다.
“몇 년간 알바만 하느라 영화랑 드라마도 제대로 못 보고 살았지. 겨우 그 삶을 탈출하나 싶었더니 지긋지긋한 연수원도 못 빠지고. 무엇보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가족들도 지키지 못했는데.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슬픈 사연을 가진 마신이 어디 있어? 내가 진짜로 마신이었으면 진작 게이트 사태 직후에 거리의 괴물들 다 썰어버리고 가족도 구하고, 여기로 도망 와서 편하게 살았겠지!”
억울한 말투에서, 진짜로 그동안의 고초와 설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채지석은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지?”
그동안 하빈에 대해 알게 된 것들도 전부 의심할 여지 없는 평범한 정보뿐이었으니까.
모종의 이유로 강력한 헌터로 각성했다는 것 말고는, 평탄한 유년기, 다소 비극적인 청년기를 보냈을 뿐인, 평범한 연수생.
한편 하빈은 데굴데굴 침대를 구르며 생각에 잠겼다. 폭신한 매트리스와 비단 이불, 맛있는 간식을 돌아본 하빈이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헐? 그러고 보니까 진짜로 여기 너무 편한데? 그냥 연수원으로 안 돌아가고 여기서 살까?”
공짜 호캉스, 최고의 아지트!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연수원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게 바로 하빈이 마계에 대해 받은 인상이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진짜로 개꿀이잖아? 데이터가 안 터지는 게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미리 다운로드 받아 보면 되니까.”
진짜 고민하는 듯 현실적인 계산을 시작한 그녀를 보며 채지석은 이마를 짚었다.
“던전을 호캉스로 쓰는 인간이 어딨어! 역시 너 인간 아니지?”
그 추궁에 하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감자칩을 바삭, 베어 물었다.
“에엥. 저 인간, 또 날 인간 취급 안 해주네. 실망인데.”
하빈은 태연하게 다리를 까닥이며 그에게 손짓했다.
“솔직히 그렇게 따지자면, 채씨도 남 말 할 때가 아닌걸? 지금 채씨 손에 들고 있는 거 솔라리스 업무 서류잖아!”
“……!”
채지석은 흠칫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까 하빈에게 로봇 화면을 공유한 후, 태블릿을 조작해 몰래 서류를 열람하던 중이었다.
지금 화면 가득 떠 있는 건, 킬스크린으로 출발할 때 이 비서님한테 받은 솔라리스 서류들.
평소 공략대로라면 몬스터를 뚫고 전투를 벌였을 테니 업무를 보는 상황은 없었을 테지만,
막상 좋은 숙소와 평화로운 시간이 주어진 지금은. 급한 서류 정도는 살짝 볼 틈이 생긴 것이다.
“이, 이건…… 그러니까.”
‘대체 언제 바뀐 화면을 본 거지?’
채지석이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하빈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이것 봐! 이렇게 던전에서 업무 보는 인간도 있는데 던전에서 호캉스도 할 수 있지. 그럼그럼.”
“이건 진짜 급해서 그런 거거든! 솔라리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하는 거라고!”
채지석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조용히 있던 아헤자르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쯧쯔, 내가 보기엔 너네 다 똑같다. 한 명은 마계에 와서 빔 프로젝튼가 하는 거나 켜고, 나머지 한 명은 태블릿으로 서류나 보고. 이게 뭐냐?]
채지석이 소리쳤다.
“그러는 아헤자르 님도 방금 제 폰 빌려가셨잖아요! 이 틈에 제 계정으로 저장해둔 웹소 보시려는 거 아닙니까?”
[아, 아니다! 난 너네가 그러고 있으니 심심해서 잠깐 본 거지, 크흠! 그러게 왜 날 놔두고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이냐! 성좌 심심하게!]
“아무리 그래도 심심하다고 폰 들여다보는 성좌가 어딨습니까? 변명하지 마시죠.”
[흠흠! 어쨌든 이래서 현대인들은 문제다! 다 같이 모여도 각자 스마트 기기만 본다! 이러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그 말을 듣던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대?”
분명 또 어디서 주워듣고 하는 말이겠지.
하빈은 다시 감자칩을 베어 물며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