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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9) (49/268)

049. 웰컴 대환장 마계여행! (3)

짧은 침묵 뒤에, 마침내 이프시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왕님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하시거든.

-네에?

-상냥하시고.

-네에에?

깜짝 놀라는 하녀의 대답.

반응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뭐어어? 상냥?]

“따뜻?”

그걸 엿듣던 지석과 아헤자르는 경악했다.

“대체 어디가 따뜻하다는 건데? 마차랑 음식 내놓으라고 한 게? 맛없으니 너희나 실컷 먹으라고 한 게?”

[마족들의 기준이란!]

하빈과 리베도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휴. 실수로 친절 베풀었다간 다들 따뜻하다 못해 불타 죽는 거 아냐?”

-삐야아악…….

쓰레기인 척하기도 쉽지가 않구나.

네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음 대화를 듣기 위해 다시 침묵했다.

* * *

그 시각, 이프시네의 침실.

이프시네는 곁에 있는 하녀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었다.

“에이…… 따뜻하고 상냥하다뇨? 그분 때문에 저택 술이 다 거덜 났는데.”

저녁의 일이 꽤 속이 쓰렸던지, 하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프시네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들어보라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어릴 때 탐욕의 마왕을 뵌 적이 있는데 완전 느낌이 달랐어. 눈만 봐도 어떤 분이신지 느낌이 오지 않니?”

“안 오는데요……? 솔직히 무서워서 눈 같은 거 볼 생각도 못 했는데.”

우리 주인님은 간도 크시지. 마왕님의 눈을 어떻게 똑바로 본담.

솔직한 하녀는 한숨을 폭폭 쉬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프시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침실 구석의 책장 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녁 식사 때 느꼈는데 그분께서는 내가 한 마디만 던져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아채시더라고. 내 사정에 대한 공감도 해주시고…… 본디 탐욕의 마왕의 자리란 욕심이 극한에 달한 분의 지위. 아랫것들을 살필 이유가 없는 곳. 그런 분께서 그 정도의 공감 능력을 갖추셨다는 건.”

“탐욕의 마왕이 아니실 수 있다고요?! 말도 안 돼. 하지만 그분은 기운부터가 이미 마왕이셨다구요! 원래 마왕의 아우라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게 법칙인걸요. 그 어떤 마법으로도 ‘마왕’을 똑같이 흉내 낼 수 없어요. 그것이 세계의 이치인데!”

“아니, 딱 한 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긴 하지.”

책장 앞에 다다른 이프시네가 책장에서 은빛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교만, 탐욕, 질투, 인색, 분노, 나태, 색욕. 우리가 언제나 접하는 일곱 마왕님들.”

“…….”

“그러나 마왕성에 있는 자리는 7개가 아닌 8개. 언제나 비워져 있는 한 자리가 있어.”

이프시네의 책장 표지에는 ‘0’라는 숫자만이 새겨져 있었다.

“0번째, ‘허무’를 담당하는 ‘마신님’.”

그분이라면 모든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 하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마신님은 지난 오천 년간은 나타나지 않으셨는데요! 그냥 전설로 남았거나 이미 돌아가신 건 아닌가 추측되는 분이신데…… 어떻게……!”

“본디 허무의 마왕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지. 드러내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목이 쏠리는 걸 싫어하셔서, 다른 마족인 척 모습을 감춘다고 들었어.”

이프시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돌아가신 부모님께 전설처럼 들었던 이야기. 그냥 전설이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지만…….

“서, 설마 진짜로…….”

이야기를 듣던 하녀가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이프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감히 추측하기로, 우리는 지금, 전설에서나 보던 마신님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 * *

“…….”

“아닌데.”

[아닌데.]

“에바야.”

-삐야악.

여전히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그들. 졸지에 전설 속 마신으로 오해받은 하빈은 팔짱을 꼈다.

“마왕인 척했더니 알아서 마신으로 모셔주네?”

“들킨 건가 싶었는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결론을 내려버리다니.”

지석이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맞아. 정말 대단한 상상력이야. 우리 이프시네, 다시 봤어.”

겁먹은 분홍 토끼 같아서 자칫 방심했는데, 조그만 머릿속으로 그렇게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현대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아주 좋은 웹소설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캐시를 질러 줄 수 있었을 텐데. 아까운 재능이로고.]

-삐이삐이, 삐이!

덩달아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리베. 그 모습을 보며 지석은 잠깐 의문이 생겼다.

‘쟤는 저거 진짜 다 알아듣고 끄덕이는 거 맞아?’

어쨌든.

지석은 넣어두었던 마계 도감을 다시 꺼냈다. 그가 급하게 그것을 뒤적였다.

“사실 마신에 대해서 도감에서 스치듯 보긴 했는데…….”

지석이 펼친 ‘마신’에 대한 페이지에는 그림 대신 ‘?’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 어떤 마족도 그의 모습을 종잡지 못한다. 진짜 존재했을지가 의문인 존재.’

“……그나저나 현하빈 네 스킬, 마왕의 아우라까지 카피할 수 있는 거야? 이프시네랑 하녀 말에 따르면 그건 세계의 이치를 무시한 거라는데.”

솔직히 하빈이 마왕의 모습을 흉내낼 때까지만 해도, 그게 이 정도로 대단한 스킬이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프시네와 하녀가 놀라는 걸 보니, 이것도 마신급 존재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스킬이었던 모양.

지석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앗, 엿듣는 사이에 중요한 장면이 넘어가 버렸잖아? 다시 되감기를 해야겠어!”

하빈은 다급하게 빔 프로젝터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저기요? 내 말 좀 들어봐…….”

“흐음. 어디까지 봤더라?”

열심히 ‘10초 전’ 탐색 버튼을 연타하는 현하빈.

마침내 보던 구간을 찾아낸 그녀가 마침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마, 채씨. 어쨌든 잘된 거 아냐? 지금 이 탐욕의 마왕 모습으로 마왕성 갔다간, 진짜 탐욕의 마왕을 마주칠 텐데. 그럼 곤란하고 귀찮잖아?”

만일 가서 진짜 탐욕의 마왕을 마주한다면…… 누가 도플갱어인지 진짜 가짜 가리고 있거나, 상대를 없애버리거나.

어느 쪽이든 파아아국 엔딩이다.

“아주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란 말이지.”

“그건……그래.”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빈이 빙그르 머리카락을 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어차피 우리 이프시네도 알차게 오해를 하고 있으니. 이참에 직업을 바꿔보는 것도 괜찮겠네.”

“뭘로?”

“마신으로.”

“……!”

이참에, 전설 속 마신으로 위장하기.

그 발언에 방 안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빈이 이어 말했다.

“솔직히, 어설프게 쓰레기 연기하기도 힘들잖아. 도플갱어 문제도 있고. 그러니 이제부터 시시한 ‘탐욕’의 마왕이 아닌…….”

“전설 속에 등장하던 ‘허무’의 마신으로?”

“컨셉을 바꾸자.”

“……정말로 마계가 다 뒤집어지겠는데.”

하빈이 휙 손짓하자 그녀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탐욕의 마왕이 아닌, 원래의 본인 모습에 가까운 얼굴로.

눈은 여전히 마족의 붉은색. 전설 속 마신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으니, 하빈의 모습과 비슷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지석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럼 하는 김에 나도 바꿔야겠다. 아까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이 모습 그대로 마주쳤지만, 언제까지 인간 모습으로 다닐 수는 없으니까.”

채지석은 인벤토리에서 눈동자 색을 바꿔주는 렌즈 아이템과, 냄새와 기척을 감추는 아이템을 꺼냈다.

이 정도면 하빈처럼 마왕의 아우라까지 카피할 수는 없겠지만, 힘이 약한 마족처럼 보이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괜찮겠어? 전설 속 마신이라니, 마족들한테도 반응이 심상치 않을 텐데. 이러다 들키면?”

“걱정 마. 어차피 들키면 바로 이공간으로 튀면 되니까!”

하빈은 태평하게 턱을 괴었다. 그녀가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것에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지석이 도감을 뒤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이왕 하는 김에 더 그럴듯한 위장이면 좋으니까, 여기에서 얻은 정보와 이프시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반영해 보자. 여기 보니 마신은 매번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이름’을 쓴다고 하니까, 이 부분은 문제가 없을 거고. 또 다른 특징은 ‘허무’를 상징한다는 건데.”

지석이 도감을 톡톡 두드렸다. 잠깐 생각에 빠졌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런데 ‘허무’라는 단어 뭔가 익숙하지 않냐……? 저번에 거울던전에서 ‘꿰뚫는 눈’으로 네 스킬명 잠깐 봤었는데. 네가 그때 썼던 스킬이 아마-”

허무의 전염.

그것을 떠올린 지석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 * *

하녀도 하인도. 모든 시종들이 방을 나선 뒤, 홀로 남은 침실에서 이프시네는 잠들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흔들렸다. 이프시네는 창밖으로 보이는 새까만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종종 마수의 처절한 울음과 비명소리가 적막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이프시네. 그거 아니? 마계의 밤은 한없이 캄캄하지만, 인간들의 세계에는 별과 달이라는 게 있단다.’

어렸을 적, 그녀의 부모님은 어린 그녀를 앉혀놓고 창밖을 보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친척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강하게 키워야 할 후계자를 왜 그렇게 싸고도냐며, 한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은, 흔히 듣는 마족들의 양육 방식보다도, 꽤나 무르고 여린 구석이 있었다.

‘별이랑 달이 뭐예요?’

‘이런 밤에도 어둡지 않게 빛을 밝혀주는 존재. 이프시네는 어두우면 무섭지?’

‘……어두운 건 무서워요. 혼자 자는 건 싫어요.’

‘그래. 그래서 이프시네는 언제나 불을 켜고 자잖아.’

유독 겁이 많았던 이프시네를 위해, 그녀의 부모님은 항상 밤에는 침대 곁에 등불을 놓아주었다.

야광 슬라임, 발광 벌레, 마수들이 밝혀주는 반짝거리는 불빛들. 마법으로 만든 불꽃과 아름답고 다양한 향초들.

그리고 잠들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곁에 있어 주었다.

‘엄마랑 아빠가 젊었을 때. 우연히 인간 세상에 몰래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의 밤에는 여기 등불처럼 반짝거리는 빛이 하늘에 박혀 있었어. 그래서 이곳만큼 어둡지 않았단다.’

‘거긴 이렇게 땅이 단단하지 않고, 공기도 따뜻했어. 그래서 식물이 자라기도 쉬웠고, 먹을 것이 풍부했단다.’

‘그럼 여기만큼 많이 싸우지 않았겠네요? 여긴 모든 게 부족해서 서로 싸우잖아요.’

‘아니……. 거긴 여기보다 풍족한데도 싸우긴 했어. 풍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란다.’

매일 밤마다 들려주었던 동화 같은 이야기들.

그것을 회상하던 이프시네는 아까 하녀에게 보여주었던 책을 다시 가져왔다. 책등에 적힌 ‘0’이라는 제목을 응시하던 그녀가 눈을 감았다.

이 책도, 마신님에 대한 전설 이야기도 어렸을 적 부모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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