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웰컴 대환장 마계여행! (2)
“네, 네에? 바, 바보로 보느냐는 말씀은……?”
“날 바보로 보는 게 아니면 그렇게 못 하지.”
하빈의 말에 이프시네가 놀라서 재빨리 대답했다.
“허억, 제가 어찌 감히……!”
하빈은 흘깃 이프시네를 쳐다보았다.
울망울망 뜬 커다란 눈. 필사적으로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 눈치를 보면서 은근슬쩍 할 말은 다 하면서 슬픈 사연을 늘어놓기까지.
이 마족은, ‘마왕’에게 어떻게든 무언가를 얻어내고 싶은 것이다. 동정을 사든, 환심을 사든.
이렇게 두려워하면서도 굳이 집에 먼저 초대를 하고. 마왕의 심기를 거스를 걸 알면서도 무도회와 후견인 이야기를 이 타이밍에 꺼냈다.
그 목적은.
“결론적으로, 넌 내가 너의 보증인이 되어, 널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걸 돌려서 이야기하는 거잖아.”
“아, 아니…… 아니, 그게.”
정곡을 찔린 듯, 이프시네가 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흐음…….”
하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감자, 이프시네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소녀의 실언이었습니다. 제가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너 하는 거 봐서.”
“예?”
“너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볼게.”
“허어어억. 저, 정말이신가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도록.”
“네, 넷! 이, 이봐라! 당장 술을 더 가져오거라!”
이프시네가 주변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얘는 왜 자꾸 당황하면 술을 가져오라는 건데.
하빈이 그녀의 새하얀 손을 턱, 붙잡고 다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니, 그것 말고.”
“더,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마왕성은 여기서 어디로 가면 되지?”
“네?”
멀뚱히 쳐다보는 이프시네를 향해, 하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초대를 받아서 오는 바람에, 길이 다 어그러졌잖아. 너 때문에 앞으로의 여정이 막막하다니까?”
“죄송합니다!”
“그러니 경매 전까지 날 마왕성으로 안내해.”
“……!”
이프시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빈을 보았다. 하빈이 툴툴거리며 내뱉었다.
“그럼 뭐, 같이 들어갈지 말지 고민해 보지.”
“헉! 가, 감사합니다!”
이프시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그녀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왕님! 너희도 빨리 음식을 더 가져오너라! 얼른!”
아니……. 음식 필요 없다고. 이러다 테이블이 부서지겠네.
기우뚱, 기우뚱.
삐걱대는 테이블과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시중들지도 못하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하빈은 결국 그들이 알아들을 방식으로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흥. 이깟 음식, 필요 없다! 맛도 없는데 너희나 실컷 먹든가!”
“네, 넵!”
“잘 먹겠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반지가 있을 마왕성까지 안내해 줄 든든한 정보원이 생겼다. 맞은편에 앉은 지석도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저녁 만찬이 끝나고, 저택의 하녀가 그들을 안내했다. 하녀 역시도 인간형 마족이었다. 그녀가 정중한 태도로 방문을 가리켰다.
“이, 이쪽이 탐욕의 마왕 전하의 방. 그리고 이쪽이 전하의…….”
“내 심복!”
“아, 네넷! 전하의 심복이신 분의 방입니다.”
하빈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문을 열었다.
커다란 방은 온 사방에 보란 듯이 장미꽃과 향초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대 맡에는 탐스러운 과일들과 간식, 드링크, 토끼 모양으로 예쁘게 접힌 수건까지.
거의 호텔 스위트룸이라도 온 풍경. 심지어 간식 옆에는 메모도 있었다.
☆전하를 위해 준비한 저의 충직한 선물이옵니다! 저희 집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프시네 올림.
‘얘네 마족 맞아? 왜 이렇게 깨알 같아?’
하빈은 캐노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침대에 폭, 하고 앉은 하빈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엄청 푹신하잖아? 진짜 호텔인줄!”
사르르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이불의 겉감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푹신하고 포근한 매트리스. 하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마왕인 척하길 잘했어!’
밖에서 몬스터들이랑 싸우지도 않고, 노숙도 안 하고. 특급호텔 패키지 서비스를 받으며 마왕성까지 프리패스!
흠흠, 콧노래를 부른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침대 오케이, 간식 오케이! 다 완벽한데 딱 하나만 더하면 완벽한 호캉스야!’
하빈이 인벤토리에서 스윽 무언가를 꺼냈다.
-삐이?
하빈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리베가 고개를 갸웃했다.
“짜잔.”
하빈이 달칵. 하고 그것의 스위치를 켜자 방의 벽면 위로 화려한 영상이 펼쳐졌다.
‘이런 순간을 위해 구입한 미니 시네빔!’
하빈이 이어서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두었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척척 꺼냈다. 침대의 양옆, 위, 아래에 대놓고 스테레오 서라운드로 스피커를 설치한 하빈이 핸드폰을 꺼내 미리 다운로드 한 영화를 확인했다.
‘좋아, 이제 여기서 영화를 봐야지!’
[여기서? 여기서 영화를 본다고?]
아헤자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끼어들었다.
[이 순간마저도 영화를 보겠다는 거냐!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다음 작전을 짜도 모자랄 판에!]
‘에이, 내가 출발 전에 이미 말했잖아. 50층에서 영화 보겠다고. 게다가 이렇게 완벽한 환경에서 영화를 안 보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녀가 이프시네의 정성 가득한 메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이프시네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줬는데, 마땅히 즐겨줘야 방문한 손님으로서의 예의지!’
그럼그럼.
하빈이 탁탁, 핸드폰을 미니빔에 연결하고, 블루투스로 스피커에도 연동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사운드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모 영화사의 로고가 한쪽 면을 도배했다.
그 순간.
“허어억…….”
아직 돌아가지 않고 문가에 서 있던 마족 하녀가, 그 광경에 놀랐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너 아직 안 갔구나?”
“죄, 죄, 죄송합니다! 그게 목욕 시중이라도 도와드릴까 하여.”
“아냐, 괜찮아.”
“네넵!”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빔프로젝터를 보는 게,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영상에는 영화 제작 참여사의 화려한 불꽃 효과가 펼쳐지고 있었다.
“외람되오나, 저건…….”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곤 태연하게 화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마왕의 마법이다.”
“헉, 역시 마왕님!”
“아마 좀 시끄러울 건데, 문제없겠지?”
“괘, 괜찮습니다! 마음껏 시끄러우셔도 됩니다!”
하녀가 ‘우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며 덧붙였다.
“그, 그럼…… 전하, 편히 주무시고 필요할 때 언제든 불러주세요!”
“너도…… 아, 아니. 그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넵, 네엡!”
쾅.
문이 닫히고, 하빈은 간식을 집어 먹으며 편안하게 턱을 괴었다.
“……아, 팝콘도 챙겨올걸.”
* * *
한편, 옆방에 있던 채지석은.
하녀와 하인이 방에서 나가고, 복도에서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그의 방에서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하빈과 작전 회의를 해야겠지?’
마왕성에 가기로 했으니, 그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물론, 지금 현 상황에 대해서까지도.
그동안 던전을 공략할 때마다 길드원들과 수시로 회의를 하며 전략을 짜왔던 그였다. 이번에도 그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았다.
지석이 하빈의 방으로 슬금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달칵.
허락을 받은 채지석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빰빰빰! 빠빠밤!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치는 스테레오 서라운드 영화 음향들.
“…….”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영상미까지. 영화관과 다를 게 없었다.
제집 안방 그 이상으로 편안하게 침대에 드러누운 하빈이 고개만 까닥 돌려 채지석을 보았다.
“아, 왔어? 역시 채씨도 영화 같이 보려고?”
하빈이 화면을 가리켰다.
“저거 지난주 박스오피스 1위래!”
잠시 문가에 멀뚱히 서 있던 채지석의 뒤로 달칵, 방문이 닫혔다.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야, 결국 진짜 여기서 영화를 보는구나. 미리 들어서 그런지 다행히 이번엔 놀랍지가 않다.”
[아니, 언제 적응을 한 것이냐? 적응하면 안 된다! 같이 말려야지!]
-삐이!
배게에서 뒹굴던 리베가 지석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날개를 파닥였다. 채지석은 침대 옆 소파에 앉아 방음 아이템을 꺼냈다.
혹시나 그들의 대화가 밖에 들릴까 싶어 아이템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가 이리저리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데, 하빈이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괜찮아. 대충해. 어차피 영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안 들릴걸? 오, 잠깐만. 지금 중요한 장면이야. 헐, 대박.”
“…….”
빰빰 빠라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영화 배경음을 들으며 채지석은 멈칫, 고개를 들었다.
‘시끄러워서 안 들린다? 은근히 말이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기본적으로 방음 아이템은, 소리가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막아내는 역할만 한다. 방음 효과가 파훼 되어버리면 대화 내용은 필연적으로 누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지금도 하빈이 설치해 놓은 스피커로 인해, 영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대화한 내용을 엿듣는다 해도, 영화 소리에 섞여 정확한 대화를 유추하기 힘들 것이다.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한 방법.
물론 여기에 방음 아이템까지 쓰면 시너지 효과가 굉장할 것이다.
‘설마 현하빈, 거기까지 생각해서 일부러 영화를 튼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내다본 거냐, 현하빈?
채지석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하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빈은 여전히 신난 표정으로 영화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와, 명작이네! 진짜 안 봤으면 후회할 뻔했어!”
영화가 마음에 든 듯 감탄을 흘리며, 알차게 간식을 입으로 쏙 넣는 천진한 모습.
채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의도하고 틀었을 리가 없어. 누가 봐도 생각 없이 그냥 즐기고 있는 거 같은데?’
어쨌든 이제 방음은 완벽하니, 본론을 꺼내도 될 것이다.
채지석은 주섬주섬 인벤토리를 뒤지며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지금부터 이프시네가 다른 사용인들과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생각이야.”
지석이 슬쩍 콩알만 한 이어폰을 꺼냈다.
[스파이를 위한 도청키트]
초소형 도청장치와 세트, 도청기에서 나는 소리를 모두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