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7) (47/268)

047. 웰컴 대환장 마계여행! (1)

“마왕님!”

“와아아, 마왕님!”

“…….”

마…왕…?

그들이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마물들이 일사분란하게 하빈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왕님이 나타나셨다! 예를 갖춰라!”

“갖춰라!”

‘……엥?’

“제일 수수한 모습으로 골랐는데 웬 마왕이야?”

하빈이 지석에게 의문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슬그머니 몬스터들의 기세에 맞장구를 쳤다.

“마왕님!”

“와 마왕님! 완전 마계를 뒤집어 놓으셨다!”

“뭐야? 왜 같이 호응을 하고 있어?”

어쩐지 신나서 하빈을 놀리는 지석을, 하빈이 쿡 찌르고 있을 때였다.

“……오, 이럴 수가. 제 영역에 마왕님께서 행차하셨다고요?”

“……!”

뚜벅, 뚜벅.

갑자기 마물들이 양쪽으로 쫘아악 갈라졌다. 그 중심으로 핑크빛 머리와 커다란 핑크빛 눈을 가진, 매혹적인 미소의 마족이 사뿐사뿐 걸어와 하빈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탐욕’의 마왕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왕님을 뵙다니, 이리도 영광스러울 수가 있나요.”

“…….”

“저 이프시네 릴 모르페시아, 모르페시아 몽마 가문의 여식이 인사를 올립니다. 이렇게 행차하신 김에, 저희 저택에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허락하신다면, 모처럼의 귀빈을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탐욕의 마왕.

그 단어에 하빈은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지석에게 속삭였다.

“설마, 지금 내가 변신한 모습이……!”

“맞아. 네가 변신한 그 모습이, 일곱 마왕 중 ‘탐욕’을 관장하는 마왕이야.”

“이렇게 수수한데?”

지석이 슬쩍 도감을 펼쳤다.

마계의 일곱 마왕들은 모습이 죄다 가지각색이었는데, ‘탐욕’의 마왕은 아주 수수했고, ‘나태’의 마왕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인색’의 마왕은 호구처럼 생겼고 ‘색욕’의 마왕은 아주 금욕적으로 생겼다.

“뭐 어찌 되었길래 다 반대야?”

“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란 교훈을 주는 거 아닐까……?”

“에반데.”

하긴, 잘 생각해 보니 ‘교만’의 마왕 크릭샤도 나름 무표정일 땐 꽤 겸손해 보이긴 했다.

하빈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분홍머리 마족 이프시네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나름 마계에 대해 빠삭한,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 존재.

‘뭐, 그래도 정보를 얻기에는 절호의 찬스일지도.’

하빈이 이프시네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다. 어디 한 번 안내해 보거라.”

“영광입니다!”

‘수틀리면 언제든 깽판 치고 나와야지.’

하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이프시네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차로 모두를 안내했다. 들떠서 통통 뛰어가는 뒷모습이 꼭 분홍색 토끼 같았다.

“이쪽입니다, 탐욕의 마왕님!”

* * *

덜컹덜컹.

이프시네의 마차는 마계의 거친 흙바닥에서도 나름 안락한 승차감을 제공했다.

가장 좋은 점은, 가는 곳마다 몬스터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준다는 것이다.

‘이프시네 님이다!’

‘무시무시한 몽마의 마차다!’

동족이라 그런지, 고위 마족의 일행이라 그런지, 어딜 가든 프리패스!

덕분에 하빈과 지석은 몹시도 편안하게 마계를 탐방하는 중이었다.

“마왕님, 실례지만 곁에 두신 분은…….”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프시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빈은 스킬을 써서 마왕으로 위장했지만, 채지석은 아직 인간인지라 의아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그러나 하빈은 간단하게 일축했다.

“알면 다쳐.”

“허어억! 죄송합니다, 마왕님! 감히 제깟 것이 마왕님께 경솔한 발언을……!”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프시네는 잔뜩 겁을 먹은 듯 채지석 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거 아냐 하빈아?”

때마침 지석이 슬쩍 눈치를 보며 하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도감에 따르면 탐욕의 마왕은, 아주 사악한 성격에 욕심도 많대. 눈에 보이는 건 다 달라고 해야 하고, 음식을 보면 꼭 더 달라고 해야 돼. 못 먹을 것들이라도 꼭! 그런 태도를 보여야 의심을 안 사.”

‘흐음, 그렇단 말이지?’

‘탐욕’의 마왕답게, 욕심을 많이 부리는 게 그 특징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크릭샤는 ‘교만’의 마왕답지 않게 나한테 아주 겸손했는데…….’

안절부절 하빈에게 비굴하게 굴었던 크릭샤.

나름 사악한 마왕이었던 그의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빈에 의해 겸손한 녀석으로 각색되고 있었다.

하빈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채지석이 제안했다.

‘그러니 일단은 마차부터 내놓으라 하는 게 어떨까?’

‘마차?’

‘꼭 뺏지 않아도 돼. 욕심만 보이면 되지.’

파이팅. 넌 할 수 있어.

대책 없는 응원을 받으며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그래도 이왕 위장한 김에, 제대로 하는 게 맞겠지.’

“여봐라.”

“넷, 네엣! 마왕님?! 무언가 불편하신가요?!”

바짝 군기가 잡힌 대답이 돌아왔다. 이프시네가 쫑긋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빈은 금박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마차를 휘익 둘러보았다.

“마차가 아주 예쁘구나. 탐이 날 정도로.”

“허어어어억!”

이프시네가 커다란 눈을 슬프게 깜빡깜빡했다.

“이, 이건…… 제가 제일 아끼는 마차인데…….”

“탐이 나는걸?”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하나뿐인 유품으로 남겨주신…….”

‘뭐, 뭐어?’

무슨 마차 하나에 사연이 이렇게 눈물겨워?!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걸 뺏으면 쓰레기잖아!’

[암, 그렇지. 그건 쓰레기지.]

“와, 진짜 나쁨.”

아헤자르와 채지석이 탄식을 흘렸다. 하빈이 그들을 흘깃 노려보았다.

‘언제는 나보고 달라고 하라며!?’

[크흠.]

“흠흠…….”

아헤자르는 모른 척 침묵했고, 채지석은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하빈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 그냥 탐이 날 정도로 예쁘다는 뜻이다. 달라는 것이 아냐!”

하지만 이프시네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기세가 아니었다. 그녀가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흡…흐흑…… 알겠습니다. 마왕님. 일단 집까지…… 가고 나서…….”

“…….”

훌쩍훌쩍.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제 소중한 마차와의 시간을 좀 더 보내고 나서…… 드리겠습니다.”

“취소한다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마차를 마왕님께서 사용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영광이지요.”

고마웠어, 우리 어머니의 마차야…….

이프시네가 슬픈 눈웃음을 지으며 마차 쿠션을 쓸었다.

‘아련하게 웃지 마! 진짜 안 줘도 된다고!’

이건 말을 잘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모르겠다!

하빈이 팔짱을 끼며 쏘아붙였다.

“하! 됐다, 필요 없으니 너나 가져라.”

“……네?”

하빈의 말에 이프시네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생각에 빠진 이프시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너무 탐욕을 안 부렸나?’

하빈은 부러 다시 말했다.

“전부 달아둘 거니 알아서 해! 더 굉장한 걸 요구할 테니까.”

“헉! 역시 탐욕의 마왕님. 알겠습니다.”

* * *

하빈의 고난은 이프시네의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음식을 더 가져오라 해야겠지?’

탐욕의 마왕은 식탐도 많다. 제대로 위장하려면 그 부분까지 연기해야 했다.

마침 탁자 위에는 탐스러운 고기 요리와 샐러드, 수프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정말로 마왕이 온답시고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마침 이프시네가 들뜬 표정으로 웃으며 술을 가져왔다.

“전하의 행차에, 저희 가문에서 1000년 만에 한 번 나는 소중한 술을 가져와 봤습니다!”

“음식 더 가져와…… 뭐?”

“허어어어억, 역시. 마왕님! 이 술을…… 더 가져와야겠죠……?”

타이밍 안 맞게 떨어진 하빈의 요구에, 이프시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술병을 든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저택의 하인들이 소곤거렸다.

“어떡해! 주인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술인데…….”

“별수 없지. 마왕님인걸…….”

“흐이이잉…….”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데.

‘이러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사실 술 같은 거 필요 없다. 음식도 많이 먹을 생각 없었고.

그냥 들키지 않으려고 ‘탐욕의 마왕’ 콘셉트에 맞추어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인해 계속 일이 커지고 있었다.

‘돌겠네.’

“마, 마왕님…… 더 가져왔습니다.”

부들부들.

테이블이 기우뚱할 정도로 음식을 차려놓은 이프시네가 창백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하빈의 눈치를 보았다.

“괘, 괜찮으신가요?”

하빈은 무심코 괜찮다 대답할 뻔했다가, ‘탐욕의 마왕’ 설정을 떠올리고는 대답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네 녀석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 말에 아헤자르와 채지석이 속삭였다.

“현하빈 잘한다!”

[완벽한 쓰레기!]

“……그딴 식으로 응원할 거면 둘 다 그만둬!”

아헤자르와 채지석은 뭐가 좋다는 건지 잘한다고 맞장구나 치고 있고. 이프시네는 손만 까닥여도 잔뜩 쫄아 눈치를 보고.

‘에휴.’

대환장인 상황 속에서, 하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괼 때였다.

이프시네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저어…… 그런데.”

“뭐냐.”

“허어억. 죄송합니다, 그것이, 소녀가 너무 궁금한 마음에.”

“……말해봐.”

하빈이 짐짓 인상을 썼다.

얘네는 무슨, 입만 열면 ‘허억, 허어억’.

탐욕의 마왕이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다들 이 정도로 겁을 먹는 건지.

‘이러다 얘, 숨넘어가는 거 아냐?’

하빈의 배려 같지 않은 배려에, 이프시네가 옆에 있는 물컵을 꿀꺽꿀꺽 마셨다.

한참 숨을 고른 이프시네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음, 그게, 역시 마왕님께서도 이번 마왕성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석하시는 거죠?”

“응?”

“아, 그, 마신님의 반지가 나온다던.”

“……!”

마신의 반지.

그거, 이번 50층 공략 조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마신의 반지가, 마족들의 경매에 나온다는 거지?’

채지석과 아헤자르도 솔깃했는지 숨죽여 소리쳤다.

“어라? 좋은 정보인데?”

[계속 들어보거라!]

하빈은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그거고. 그런 걸 왜 궁금해하지?”

“아,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이프시네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물론 감히 제가 마왕님들의 경매에 참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경매에는 마왕님들께서만 참가하실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냥 그전에 열릴 무도회에만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온데, 안타깝게도 제겐 무도회에서 제 몸가짐을 돌보아줄샤프롱이 계시질 않아서…….”

“없다고?”

“예. 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도 사라지신 지 오래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주 자리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이 노리고 있고, 마땅히 저를 받아주실 후견인도 없는지라…….”

“으음.”

하빈은 슬쩍 턱을 괴며 인상을 썼다.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반은 못 알아들었다.

샤프롱이 어쩌고, 후견인이 어쩌고.

그동안 몬스터나 게임 속 NPC 정도로 생각했던 마족의 세계에도 그런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무도회, 귀족.

어쨌든 확실한 건, 50층 공략 조건인 ‘마신의 반지’가 마족들의 무도회 이후 경매에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 분홍 머리 마족 이프시네는 그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단 건데…….’

[사교모임이나 무도회에 참여할 땐 보통 귀부인이 함께 가지. 이 마족 아이는 부모님이 없어서 함께 가줄 보증인이 없나 보군! 사교계 데뷔를 안 한 귀족이 홀로 첫 무도회에 가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오 잘잘이가 웬일이야. 뭔지 다 알아들은 거?’

[크흠, 내가 살던 대륙에서도 몇몇 나라에서는 그러했다! 같이 가자고 요청을 받은 적도 많고!]

‘오호, 그래? 샤프롱인가 뭔가. 그거 대단한 건가?’

[그렇고말고! 한때 대륙 최고의 검성이었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온갖 유력 가문에서 함께 가달라 초청장이 왔더랬지. 그때가 좋았건만…….]

‘그래그래. 알겠고.’

하빈은 이프시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하빈을 힐끔거리며 옆에 놓인 청포도 모양의 과일만 살짝 집어 먹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눈치 보며 냠냠 청포도를 먹는 모습이 꼭 겁먹은 토끼를 연상케 했다.

이렇게 겁이 많은데도 무시무시한 마왕 앞에서 굳이 무도회라는 주제를 용기 내어 입에 올린 이유는.

‘……빤히 짐작이 가는걸.’

하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너, 날 바보로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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