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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5) (45/268)

045. 출장 (2)

킬스크린 출발 당일.

채지석과 현하빈은 이준휘 비서의 배웅을 받았다.

“아, 부길마님. 이것도 받으시죠.”

“뭔데요?”

혹시 배웅하는 김에 아이템이라도 챙겨주시려는 건가.

채지석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예측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준휘가 내민 것은 아이템도, 포션도 아닌 종이 서류들.

“여기. 솔라리스 올해 상반기 계획안 관련 서류들입니다. 시간 남으실 때 작업하세요.”

채지석이 반문했다.

“지금, 킬스크린 가서도 업무를 보라고요?”

안 그래도 현하빈에게 킬스크린에까지 가서 영활 보냐고 핀잔을 줬는데. 지금 남 말할 때가 아니었다.

킬스크린 가서 업무를 본다니?

그게 더 미친 소리인데?

지석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농담이시죠?”

“농담이라니요. 채지세 길드장님은 잘 해내시던데요. 길드장님은 평소에 던전 공략하다가 심심하실 때 업무를 보셨다고 합니다.”

“누나 진짜 미친 거 아냐?!”

뭐? 던전 공략 중에 심심할 때 업무를 봐?

“그건 누나니까 그런 거지! 전 아니거든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래도 동생이신데 이런 점은 안 닮으셨습니까?”

“비서님이라면 닮으시겠어요?”

“하하, 아니요.”

영혼 없는 웃음을 지은 이준휘가 정색하며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절대 번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50층 가시는 거 아니라면서요. 아래층 잠깐 둘러보시는 거면 이 정도 처리하실 여유는 되실 텐데요?”

“…….”

50층 가는 거 맞는데……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채지석은 일단 서류를 다시 비서님한테 돌려보냈다. 쓰디쓴 약을 억지로 삼키는 듯한, 괴로운 표정.

“파일로 주세요. 탭으로 확인하겠습니다.”

“하긴, 인벤토리 생각하면 그게 낫겠군요.”

띠링.

1초의 지체도 없이 단번에 전송된 파일에, 채지석은 한숨을 쉬었다.

“뭐 해, 출발 안 하고?”

멀찍이서 기다리던 하빈이 다가왔다. 채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가자.”

그들이 돌아서자, 이준휘 비서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사지 멀쩡하게 다녀오십시오.”

일은 마저 하셔야 하니까.

‘뒷말이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찜찜한 기분을 무시하며, 지석은 하빈과 함께 뒷좌석에 착석했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물었다.

“부길마님, 어디로 갈까요?”

“……킬스크린 포탈로 가 주세요.”

* * *

제목: 킬스크린 가본 사람 있음?

본문: 방문하고 싶어서 매일 허가 신청하는데 왜 허가가 안 남?

└ 그거 개인이 신청하는 걸로는 절대 허가 안 남

└ 길드 차원으로 정당한 목적이 있어야 해주는 거임. 킬스크린 지부 방문 목적이든, 킬스크린 공략 목적이든.

└ 아냐. 개인도 국가적인 공헌이 있거나. 국가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면 방문할 수 있어.

└ 일례로 강태서, 채남매 같은 헌터는 당일 바로 신청해도 프리패스고, 내 사촌이 지금 킬스크린 연구에 참여하는 대학원생인데 프리패스라더라

└ ???대학원생인데 헌터라고? ....거기 다니는 사람들.....잠은 잘 수 있는 거임...?

└ 이쪽 특화 대학원 있음. 헌터 특례전형으로 입학하는 사람들도 있고. 킬스크린 연구 목적으로 국가에서 신설한 학과라서

└ 윗댓아 아마 저 윗윗댓이 묻고 싶은 건 대학원이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거기 다니면서 수면은 취할 수 있을지, 생존은 하는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 ㅇㅎ..?

└ 잠시만 나 글쓴인데 아무튼 그런 거 없이 그냥 개인이 몰래 방문할 방법은 없음? 포탈 한번 타보고 싶은데

└ ㄴㄴ... 혹시라도 시도할 생각 하지 마. 불법이라서 입구에서 막힐걸?

└ 포탈 안 타고 비행기나 배 타고 가도 됨. 근데 그래도 킬스크린 입구에서 방문기록 작성하고 신원 확인함.

킬스크린 자체는 태평양의 공해상에 어느 날 솟아난 탑이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 포탈은 세계 각 지역, 여러 도시에 하나씩 생겼다.

현재 한국은 서울과 대전, 부산에 킬스크린 포탈이 한 개씩, 총 세 개.

포탈로 진입하면 킬스크린 입구로 바로 이동되며, 다시 킬스크린에서 포탈로 진입하면 원래 진입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방식.

서울에서 킬스크린행을 했던 사람은 다시 서울로, 부산에서 킬스크린에 방문했던 사람은 다시 부산으로.

그래서 포탈을 사용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등의 편법은 쓸 수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킬스크린에서 동시에 모일 수 있다는 뜻밖의 장점은 있었다.

이처럼 전 세계 각 지역에서 한 번에 방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킬스크린 바로 옆에는 SPES 킬스크린 지부를 비롯해, 수많은 길드의 지부가 있다.

지금, 현하빈과 채지석도 막 그곳을 지나는 중이었다.

곧장 킬스크린으로 향하기 전에,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우리 쪽 건물 들렀다 가자.”

그들은 벌써 킬스크린 포탈을 통과해, 솔라리스 킬스크린 지부 앞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포탈 통과는, 이 비서와 채지석이 미리 마련해 준 사전서류 덕분에 아무런 제약 없이 편하게 통과.

채지석과 이준휘는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즉석에서도 허가와 통과가 바로 가능할 정도의 국가적 보증을 받는 상위 헌터지만, A급 연수생인 하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서류가 필요했던 것이다.

채지석이 반짝이는 하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는 솔라리스 킬스크린 지부.”

거대한 던전 탑 ‘킬스크린’ 주변에는 이처럼 옹기종기 여러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텔 건물처럼 삐까번쩍한 각국의 길드 건물은 물론, 포션을 파는 상점, 아이템을 파는 상점, 심지어는 음식점과 멋진 모래사장, 기념품 샵까지.

“우와! 저건 9성급 호텔 <델루나>잖아? 티비에서만 봤었는데!”

동화 속 성처럼 생긴 호텔 건물을 보며 하빈이 눈을 빛냈다.

“저쪽엔 관람차랑 모노레일도 있네? 와, 옆에 있는 건물은 킬스크린 섬에만 있다는 아이템 제작 브랜드 ‘컨티뉴’잖아! 저기 면세도 된다던데……!”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하는 하빈의 반응처럼, 킬스크린 주변의 상권은 화려했다.

그 중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대한 킬스크린만 아니었다면, 그저 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휴양지로 착각할 광경이었다.

“킬스크린의 솔라리스 지부에는 처음 방문하는 거지? 저번엔 곧바로 26층에서 만났으니까.”

솔라리스의 건물은 흰색의 대리석과 금빛 장식이 돋보이는 1층을 자랑했다. 꼭 호텔 로비를 떠올리게 하는 인테리어였다.

“실제로 숙식 용도도 겸하는 곳이거든. 킬스크린에 방문하는 우리 길드원들이 쉬는 곳이기도 하고, 꼭대기 층에는 회의실도 있는데 국제적인 회의를 거기 열기도 해서.”

1층에 마련된 로비 카페.

채지석은 여기 방문한 김에 전달할 서류가 있다며 하빈을 그곳에 잠깐 남겨두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카페에 남은 하빈은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료 주문하시겠어요?”

기다렸다는 듯 종업원이 달려와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하빈은 메뉴판을 내려다보았다.

메뉴는 꽤 평범한 편이었다.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라떼 등의 커피 종류 음료는 물론, 자몽티와 아이스티, 핫초코까지. 한국의 카페에서 볼 법한 메뉴들은 웬만큼 다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종업원이 메뉴판 한쪽을 가리켰다.

“이왕 킬스크린 방문하신 김에, 이 메뉴는 어떠세요?”

종업원이 가리킨 메뉴는 ‘킬스크린 파르페’였다.

<킬스크린 파르페(Kill Screen parfait)>

끝도 없이 높은 미스터리한 탑. 킬스크린만의 특징을 담은, 이곳만의시그니처 메뉴입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신선한 생크림을 베이스로, 청포도와 블루베리, 딸기 시럽을 적절하게 곁들여 킬스크린 특유의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는 무지갯빛을 재현해냈습니다.

“사진이 킬스크린이랑 비슷하게 나와서, 별스타그램에 업로드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킬스크린 미니어처 느낌으로요! 나름 저희 카페 인기 메뉴예요.”

“…….”

“이외에도 킬스크린 라떼, 킬스크린 케이크, 킬스크린 타르트도 있답니다.”

하빈은 옆을 돌아보았다. 진짜 이 파르페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사진을 찍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특히 옆자리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국제적인 셀럽 헌터 모임.

애초에 킬스크린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고위 랭커가 대부분이었기에, 주변에 앉아 있는 이들도 셀럽으로 유명한 헌터들이었다.

#킬스크린#출장

“또 업로드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원래 저는 전부 다 찍어서 올려요. 내일 레이드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에이, 헌터님은 강하시잖아요. 걱정 없으시면서.”

웃음을 터뜨리며 사진을 업로드하는 그들을 보며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짐꾼 알바 때도 여기서 랭커들이 찍은 사진이 헌터넷에 도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의 출처가 여기였다니.’

유리창 밖에는 푸른 바다와 초록빛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담기는 거대한 탑.

인류에게 도전이자 기회, 동시에 죽음과 공포를 안겨주는 킬스크린.

[호오, 저런 걸 눈앞에 두고서도 이렇게 태평하게 음료수나 만들어 먹다니.]

위협과 공포의 상징인 킬스크린을, 파르페, 타르트 취급으로 만들고, 유희거리로 삼는 것도.

그런 전시상황 앞에서도 버젓이 호텔을 짓고 휴양을 즐기는 것도.

‘……한편으로 그런 게, 인간의 대단한 점일지도 몰라.’

킬스크린을 별스타그램 명소처럼 다루고, 포탈은 새롭게 응용해서 국제 회의 장소로 재활용한 인류.

그 앞에서 킬스크린의 공포는 희석되다 못해 농락당하는 중이 아닐까?

[호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 이것도 나름의 적응 방식이라는 건가? 그럼 너도 킬스크린 파르페를 시켜볼 텐가?]

‘음? 아니?’

파르페는 무슨.

하빈은 기다리고 있는 종업원에게,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어 죽어도 아아지.

* * *

“다 끝내고 왔어. 이제 출발하자.”

서류를 전달하고 곧장 카페로 찾아온 채지석.

“거긴(둘은 비밀 유지를 위해 50층을 ‘거기’라고 대충 둘러대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어떻게 가면 돼? 일단 킬스크린 1층에 들어간 다음에, 나름의 방법이 있는 건가?”

50층 방문 방법.

현하빈에게 ‘오류를 통해 진입하는 방식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경로로 어떻게 50층으로 간다는 것인지, 채지석으로서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존 인류의 방식으로는, 각 층을 공략할 때마다 다음 층 자체가 ‘개방’되어 계단이든, 포탈이든, 다양한 입구를 활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하지만 미공략 층은 들어갈 방법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폭포수 같은 무지갯빛 외벽이 전부.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킬스크린의 외벽을 부수어 보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으나, 그 어떤 공격도 제대로 먹히지 않고 빛으로 산화되거나, 오히려 벽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는 괴담만 전해져올 뿐이었다.

“아, 거기 들어가는 방법은 별거 아니고, 그냥 틈을 찾으면 되는데.”

일렁이는 오류.

오류만 찾으면 그 일렁이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이공간 진입’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틈? 그럼 그건 킬스크린 안에 들어가야만 보이는 거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하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하얀 대리석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여기서부터도 보이네?”

“……?”

저번에 왔을 때는 킬스크린 내부에서 더 잘 보였는데, 지금은 아직 킬스크린에 들어가기 전인데도 오류가 훤히 보였다.

지금은 카페 벽과 바닥에도 픽셀이 깨진 듯 나 있는 작은 구멍들이 마구 솟아나 있었다.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스킬 ‘이공간 진입’을 실행하시겠습니까?>

“여기서도 되는데?”

[……?]

“야, 설마 지금 네 말은…….”

킬스크린 밖에서도, 무단으로 킬스크린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아서 제대로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입 모양으로만 속삭이며 놀라는 채지석.

마침 아메리카노를 다 마신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자세한 건 해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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