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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4) (44/268)

044. 출장 (1)

“……학생, 정말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도둑이 여러 명이라 무서웠을 텐데.”

“그 와중에 벨도 바로 누르고, 녹음까지 하시고. 정말 완벽하게 잘 대처해 주셨네요!”

변명의 여지없이 범죄자가 확인된 도둑놈들.

그들을 체포하고 여유가 생긴 후, 관리국 요원과 경찰이 번갈아 가며 하빈의 대처에 감탄을 흘렸다.

“아, 녹음본은 자백 증거로 수집하고 싶은데 보내주실 수 있으신지…….”

“네, 보내드릴게요.”

하빈은 앞뒤를 자르고 아까 들려준 결정적인 부분만 그들에게 넘겼다.

검이 고장났다느니, 경찰서는 저쪽이라느니 하는 내용은 모두 삭제!

녹음본까지 나오는 바람에, 빼박 범죄자가 된 도둑들은 저항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끌려가고 있었다.

“그쪽들은 특수아이템절도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들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이는 도둑들.

옆에 있던 관리국 요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까 녹음본에서, 당신들 마이너 패치 소속이라고 그러던데.”

그의 말에 도둑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그거 멋있어 보여서 이름 댄 거예요!”

“흠…….”

“진짜 아닐까요? 요즘, 피데스 없다고 ‘마이너 패치’가 기승을 부린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경찰이 미심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요원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요즘 들어 슬슬 그쪽이 고개를 들긴 하는데, 아마 이런 핫바리들이랑은 관계없을 겁니다. 거기도 물을 많이 가려서.”

“그래도 조사는 해봐야겠지만요.”

마이너 패치.

피데스의 활약으로 한 차례 괴멸되었다 들었지만,

피데스가 50층에 간 틈을 타 다시 회복의 기회를 노리는지, 최근 들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거기 수장이 강력한 랭커니까요. 랭킹 변동이 없는 걸 보아하니, 저번 피데스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모양인데…….”

수군수군 떠들던 그들은, 하빈을 의식했는지, 대화를 멈추고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다, 학생. 학생은 나중에 혹시라도 참고인 조사 받을 수도 있어요.”

“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참고인 조사라니.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던 하빈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참고인’도 ‘조사’도, 단어 자체가 아주 귀찮고 아주 곤란해 보여!’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확인했는지, 경찰이 덧붙였다.

“아, 출석도 진술도, 모두 강제는 아니에요. 너무 걱정 마요.”

“오…….”

“흐음, 그런데 조회해 보니 이 도둑들, 전적이 화려하네요. 하도 포션을 많이 털어서 수배범으로 올라와 있는 놈들인데.”

“학생 덕분에 드디어 잡았네요.”

“……저는 선량한 시민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죠.”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탄한 눈빛에, 하빈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근데 왜 직접 해결하지 않고 경찰을 부른 것이냐? 한입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뭐어? 큰일 날 소리하지 마, 잘잘아. 몰래 처리하는 건 너무 귀찮은 일들이라구. 까딱 힘 조절 잘못하면 저 녀석들이 죽을 텐데. 특수협박이나 살인, 시체유기로 잡혀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된단 말이지!’

벼룩 잡는 데 왜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저런 떨거지들을 처리하다 법원이나 교도소를 오가는 건, 크나큰 실수였다.

[……죄목이 너무 구체적이다만?]

하빈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안 돼. 잘잘아, 힘숨찐에도 클라스가 있다구. 하수들이나 자기 손으로 섣불리 처리하다가 정체를 들키는 거고, 고수는 이렇게 국가와 공조와 협조를 하며 살아가는 법.’

현하빈은,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금도 잘 낸 선량한 시민! 경찰에 신고를 할 줄 알지. 공권력은 좋은 거야. 쓸 수 있을 때 쓰도록 하자.’

만사가 귀찮은 힘숨찐은(특이사항:탈세한 적 없이 종소세 꼬박꼬박 납부), 오늘도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착실히 이용하는 중이었다.

‘좋아, 어쨌든 조용히 잘 해결되었으니 됐어. 이제 드라마나 마저 보자.’

경찰차를 깔끔하게 배웅한 하빈은,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재빨리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도둑들도, 경찰도, 요원도 사라지고 마침내 조용해진 편의점에서는 한창 편의점 원쁠원 행사를 광고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00어플을 깔면 원쁠원 상품을 보관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편의점 어플을 깔고 혜택을 받아보세요……!

부스럭.

삼각김밥을 원쁠원으로 집어온 하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산대에 턱을 괴었다.

“……에휴, 딱 잠깐 봐주는 사이에 하필 저런 귀찮은 놈들이 방문할 건 뭐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래도 박원두가 없을 때 방문해서 다행인 건가.’

아무리 커피덕후 알바만렙 박원두라지만, 그 녀석 혼자서 도둑들 여럿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박원두. 운 좋은 짜식. 나같은 친구가 어딨냐?”

흠흠.

참치마요 삼각김밥의 포장지를 슥슥 벗겨낸 하빈이 뿌듯한 표정으로 김밥을 베어 물었다.

“얼른 먹고 하나 더 먹어야지.”

그녀가 톡톡,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자, 끊겼던 미드가 다시 재생되었다.

* * *

한편, 다음날.

50층 공략을 위해 채남매의 집에서 소풍 도시락을 챙기던 현하빈은 티비를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어제 오후, 악명 높은 3인조 ‘편의점 포션 도둑’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다행히, 현장에 있던 알바생, 현모 양의 침착한 대응으로 신속한 검거가 가능했으며…….

“엥.”

“어?”

인상을 찡그린 현하빈,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화면을 쳐다보는 채지석.

화면에서는 씨씨티비에 찍힌 하빈과 도둑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모두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저거 너 아니냐?”

채지석이 조용히 물었다. 익숙한 체형, 독특한 성씨.

심드렁한 특유의 제스처가 너무나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저기, 저 현모 양은 아무리 봐도 현하빈인데?’

겨우 이틀의 시간을 줬을 뿐인데 그 사이에 뉴스까지 나오다니.

정말, 여러모로 비범했다.

채지석이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도대체, 그 이틀 사이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씨이. 저거 모자이크 해준댔는데 성씨 왜 안 가렸어?’

하빈이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경찰이 다녀간 후에, 갑자기 핸드폰으로 방송사라느니 언론사라느니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아니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인터뷰씩이나 해요……? 안 돼요. 저 방송 나가는 거에…… 공포증 있어요! 아무튼 못 해요.’

사실 공포증은 없지만, 이리저리 알려지는 건 사양이었다.

혹시나 언급되더라도 절대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는데.

성씨를 저렇게 대놓고 밝혀버리다니!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챘는지, 채지석이 나름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저거 보고 너인 줄 알아채는 사람은 없을걸?”

“……나 아닌데.”

“그래.”

-한편, 현모 양은 ‘저는 그저 선량한 시민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라며 인터뷰도 거절한 것으로 밝혀져 의로운 시민의 모범을 보였고…….

“…….”

“아무튼 아님.”

“……큽.”

작게 들리는 웃음 참는 소리에, 하빈은 채지석을 노려보았다.

“뭐야?”

“아냐, 아무것도.”

-한편, 경찰은 이 도둑들이 최근 기승하는 ‘마이너 패치’와의 연관성이 있는지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마이너 패치?”

싱글거리던 채지석이 그 단어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채씨도 마이너 패치랑 관련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요즘 누나도 피데스 님도 다 50층 가 있어서 그런가.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돌기는 하는데. 우리까지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터지지 않을지 걱정이네.”

그동안, 범죄조직 ‘마이너 패치’는 물론,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한 헌터 범죄는 피데스의 존재만으로도 겁을 먹고 사렸다.

아무리 악랄하고 정신 나간 범죄자라도, 현실적으로 승률 100퍼센트의 압도적인 무력, 대외적 세계관 최강자를 이길 자신이 있는 악당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카드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50층에 있는 상황.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범죄조직 보스들이 ‘제발 피데스가 50층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해주세요.’라고 빌고 있다고 들었다.

하빈이 별문제 안 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빨리 다녀오면 되지. 50층 하루 컷?”

“그걸 어떻게 하루 컷……. 물론 하루 컷 하고 돌아오면 비서님은 좋아하시겠네.”

지금 임시 솔라리스 대표를 맡게 된 이준휘는 상당히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이렇게 귀찮고 번거로운 자리에 저를 앉히시다니! 길마님도 부길마님도 성과급을 단단히 준비해 놓으셔야 할 겁니다!’

‘길드 대표 자리를 번거롭고 귀찮은 자리라고 생각하는 건, 은근히 현하빈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지도?’

채지석이 생각에 빠진 사이, 하빈은 짐을 챙겼다.

미니빔, 블루투스 스피커…… 주문의 민족으로 배달시킨 맛있는 음식들.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집어넣는 모습을 보던 채지석이 물었다.

“그런데, 너 자리 비우는 걸로 주변에 연락은 했어? 가족이라던가. 갑자기 사라지면 놀라지 않을까?”

“연락?”

[그래, 그러고 보니 네게도 가족이 있지 않느냐! 킬스크린 50층을 다녀오는 것이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느니라. 적어도 당분간 떠나 있다고 말은 하는 게 도리다!]

“음…….”

친구는 그렇다 쳐도, 역시 가족한테는 인사를 남겨야 할까.

둘의 재촉에, 하빈은 카톡을 켜 오랜만에 현시우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탁탁.

현시우.

그의 프사는 휘황찬란했다.

화려한 에펠탑과 아름다운 도시들을 배경으로, 명품을 차려입은 현시우.

선글라스를 낀 채 멋들어진 테라스에 기대 에펠탑을 바라보는 사진.

거기다 상태 메시지는-

유럽 여행 ~ 00일부터 카톡X 전화X

La vie en rose

“역시, 괘씸할 정도로 잘살고 있는걸?”

유럽의 야경으로 감성 사진을 찍은 현시우의 프사. 오글거리는 프랑스어 문구까지.

그걸 보며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흐음, 무려 유럽 여행을 나 몰래 갔단 말이지?’

예전 같았으면 수학여행을 가도, 장난삼아 서로 기념품 뭐 사올 거냐며 물어보기도 했는데. 물론 정말 서로의 기념품을 제대로 사오는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몇 년 만에 사이가 이렇게 바뀌었다니.

‘실종되어도 연락 하나 없고, 해외여행 가도 연락 하나 없고.’

게다가 지금은 연락해도 못 받는다고 상태 메시지에 떡하니 적어놓기까지 했다.

하빈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도, 굳이 킬스크린 간다고 이야기할 필요 없지, 뭐.”

그녀는 고민 끝에 현시우에게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위험한 곳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굳이 별말 남겨봤자 걱정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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