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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2) (42/268)

042. 가끔 편의점에서 파는 몇백만 원짜리 와인은 어떤 분이 사가시는 걸까? (1)

하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솔라리스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채지석의 말을 듣자마자, 밥상 뒤엎듯 책상을 뒤엎었던 이준휘.

뒤집힌 책상, 쏟아진 펜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서류 사이에서 그는, 더 이상 은은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오히려 광기 어린 기세로 소리쳤다.

‘길마님도 없는데, 부길마님마저 킬스크린 가신다고요?! 그럼 저 혼자 솔라리스를 책임져야 한다는 소리잖습니까!’

‘그래도…… 그동안 저희 밀린 일 다 끝냈으니, 남은 이틀 동안 최대한 나머지 다 끝내놓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대표 역할 할 사람이 저밖에 없단 소리잖습니까! 으아아! 두 분 없는 동안 대표로서의 결재는 죄다 제가 책임지고 해야겠죠? 하하하!’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 또다시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던 이준휘.

참다못한 그는 ‘도비 이즈 프리’ 가 적힌 슬리퍼를 냅다 벗어서 손에 쥐었다.

대롱대롱 손에 매달린 슬리퍼.

당장이라도 던질 듯 슬리퍼를 겨눈 이준휘가 격앙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분!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길드장님도, 부길드장님도. 두 분 다 저 두고 돌아가시면-!’

제가 지옥까지 쫓아가서 잡아 올 겁니다.

이준휘가 서류들을 노려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하, 이렇게 일 벌여 놓고 나만 남기고 죽으시겠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

‘후우, 이왕 가신 김에 길드장님을 꼭 산 채로 잡아 오시죠. 일손이 필요하니까.’

‘근데 비서님, 저희 50층에 간다는 말씀은 안 드렸는데요. 그냥 킬스크린 둘러보고만 올 겁니다.’

‘아, 그랬습니까?’

그제야 진정한 듯 다시 은은한 미소를 장착하던 이준휘.

‘……그럼 그냥 제 망상과 희망 사항이었던 걸로.’

다시 차르륵 서류를 쥔 그가 하빈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현하빈 님도 댁에 가시는 길 평안하시고요. 이틀 뒤까지 부길마님과 함께 킬스크린 방문 서류 모두 준비해 놓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그가 손짓하자 책장 너머 냉장고가 열렸다. 오렌지 주스를 꺼내 하빈에게 건넨 이준휘.

그리고 그는 다른 손으로 커다란 서류 뭉치를 채지석에게 건넸다.

턱.

‘부길마님은 이틀 뒤에 가신다고 하셨으니, 지금 바로 이거 다 결재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시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

저런.

서류를 보고 낯빛이 칙칙해진 채지석을 보며 하빈이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것 봐, 김잘잘. 저래서 부길드장이 아주 위험한 직업이라는 거야.’

그럼 채씨, 파이팅.

조용히 응원을 덧붙인 하빈은, 이준휘 비서의 안내에 따라 솔라리스에서 마련해 준 차량을 타고 안전하게 집으로 귀가했다.

채지석이 요즘 핫한 블랙 페퍼 치킨 시켜 주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그쪽은 먹을 시간도 없어 보여서, 앞에서 염장 지르며 먹방 찍는 것보다 그냥 혼자 집에 가서 먹겠다고 따뜻한 배려심을 발휘한 판단이었다.

정말로 안락하고 편안한 승차감, 거기다 해가 떠 있을 때 집으로 돌아갔다는 점까지.

여러모로 최고의 귀가였다.

* * *

“그럼 이틀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보조배터리 충전하고, 미니빔 사고, 주변 맛집 테이크아웃하면 충분하겠지? 남는 시간에는 뮤튜브도 보고, 게임도 몇 판 돌리고…….”

집에 도착한 하빈은, 오랜만에 자유의 향기를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킬스크린 가기 전까지, 이틀간의 황금 같은 자유시간!

알차게 계획을(물론 놀 계획만) 세운 하빈이 양말 신은 발을 경쾌하게 까닥일 때였다.

띠리링-

잠잠하던 폰이 울렸다.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채씨가 깜빡 잊고 말을 못 한 게 있나.

하빈이 쭈욱 몸을 기울여 침대 끝에 던져둔 폰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박원두였다.

‘박원두……?’

스타리너스 카페에 취직했다가 때려친, 예전 짐꾼 시절의 알바 동료.

‘철이 없었지. 스타리너스 커피 좋아한다고 카페에 취직했다는 자체가.’

라며, 중요한 인생 조언을 해주었던 친구.

‘흐음, 박원두가 무슨 일로?’

곰곰이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하빈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하빈! 오랜만이다.

“그러게. 웬일?”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냐?

“음. 그랬던 것 같은데?”

-…….

정곡을 찔린 듯, 수화기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하빈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친하긴 했지만, 웬만해서는 카톡으로 연락을 했으니까.

전화를 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알바 시절 때 일 관련으로 몇 번 급하게 통화한 게 전부.

“……뭔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게, 어, 그러니까…….

“괜춘, 이야기해 봐. 뭔데?”

하빈의 독려에, 박원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내일 시간 있어?

하빈은 계획표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바쁘긴 한데……. 일단 집에서 드라마를 봐야 하고, 게임을 해야 해.”

소중하게 짜 놓은 시간표. 그것을 들은 박원두가 물었다.

-그, 그럼…… 진짜, 진짜 정말 미안한데 혹시 내일 나 알바 대타 해줄 수 있냐……?

“대타?”

그녀의 반문에, 박원두는 변명처럼 와르르 말을 쏟아냈다.

-편의점 알바라서 힘든 일 하나도 없어! 내가 내일 학교 시험이 있는데 깜빡하고 대타를 못 구해서 진짜 급하거든! 시급 다 챙겨주고 밥도 사줄게!

“으음…….”

-제발, 제발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해주라! 나 이번에 F 받으면 장학금 물 건너가……. 어떻게 모은 학점인데…….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빈은 끄응 한숨을 쉬었다.

‘얘가 왜이래. 사람 짠해지게.’

가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짠할 정도로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 박원두가 딱 그런 녀석이었다.

무려 짐꾼 알바를 같이 했던 사이다. 더러운 몬스터의 사체를 만지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험한 일이 바로 짐꾼 일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든, 생계를 위해서든,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악과 깡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박원두는 그중 꿈을 위해 뛰어든 케이스였다.

‘나, 꼭 돈 모아서 내 돈으로 학교 다닐 거야. 내 돈으로 등록금 내고, 방도 구하고.’

카페, 편의점, 피씨방, 식당, 공사장까지. 알바란 알바는 모두 섭렵한 박원두에게 짐꾼 일 또한 꿈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같은 또래에, 하빈처럼 여러 알바를 전전한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이 있었고, 그래서 꽤 친해진 사이였다.

‘너는 오빠 찾으려고 일하는 거랬지? 꼭 찾길 바란다. 나도 내 주변에서 소식 들으면 꼭 알려줄게. 난 학교 가고, 넌 오빠 찾자!’

없는 형편에 학업과 알바를 빡세게 병행하던 박원두.

다행히 이제 시험과 장학금 걱정을 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된 모양이다.

“대학 진학한 거 축하한다. ……그리고 그거 알아? 나도 오빠 찾았다?”

무심코 던진 하빈의 말에, 박원두가 놀라 반문했다.

-뭐? 진짜?

“진짜 어이없어. 건강하게 잘 살아 있었더라.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는지.”

-야, 그래도 진짜 잘 됐다! 건강하시다니 더 다행이고. 우리 그때 세웠던 목표, 다 이루어졌네!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목소리에, 하빈은 핸드폰을 어깨 사이로 끼웠다.

“…….”

오랜만에 꿀 휴가였는데. 아깝긴 하지만…….

그녀가 조용히 계획표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편의점 어딘데? 몇 시 알바야?”

* * *

“야, 진짜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박원두는 커피 덕후답게 만나자마자 구수한 커피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자랑했다.

‘스타리너스는 잊었어도 커피는 못 잊었나 보네.’

그는 찐 커피덕후였던 것이다.

“일단 내가 스타리너스 커피 빼고는 다 정리해 놨고, 청소도 다 해놨어. 계산만 하면 될 거야!”

하빈은 흘깃 냉장고를 돌아보았다. 다른 커피는 다 예쁘게 정렬해 놨는데, 스타리너스 커피만 그대로 둔 걸 보니…….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뒤끝있네?’

아직도 스타리너스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하빈은 안쓰러운 그를 위해 마음속으로 작게 묵념을 해주었다.

박원두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가 편의점 매대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포션들은 최근에 팔기 시작한 건데, 헌터 면허증 있는 사람들한테만 팔 수 있어. 워낙 고가라서 저것만 훔쳐가는 범죄가 종종 일어난다고는 하던데……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위급 상황일 땐 여기 벨을 누르고…….”

긴 설명 끝에, 하빈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그가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진짜 고맙다. 내가 지금 바빠서 이렇게 가지만, 다음에 꼭 밥 살게!”

“됐고, 시험이나 잘 치고 와. 장학금 받아야 한다는 거 핑계 아닌지 확인할 거임.”

“과탑 먹고 온다!”

비장하게 필기구를 챙기던 박원두가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아. 이거 마지막 꿀팁인데, 혹시라도 뭔가 잘못되었다 싶으면 절대로 네 탓을 하지 마”

“내 탓을 하지 말라니?”

“음, 예를 들어…… 계산을 잘못했을 때는. ‘앗 손님 제가 계산을 잘못했네요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말고…….”

박원두가 계산대의 포스기를 가리켰다.

“‘아, 포스기가 고장 났나 봐요.’, ‘또 이러네요.’ 하는 식으로. 전부 기계 탓으로 둘러대라는 거지.”

“오, 꿀팁인데?”

“하하, 나도 아는 형한테 들은 거야.”

잘못했을 땐 기계나 물건 탓으로 둘러댄다.

마지막 꿀팁까지 전수해준 박원두가 마침내 시험을 치기 위해 편의점을 나섰다.

[여긴 잡화점인가?]

아헤자르였다. 부르르 떨리는 것이 호기심이 잔뜩 차오른 것 같았다.

“뭐, 비슷해. 정확히는 편의점이라는 곳인데, 없는 거 빼곤 다 있지.”

[없는 거 빼고 다 있다고?!]

“상비약부터 충전기, 필기구같이 자잘한 잡화도 구비되어 있거든. 물론 먹을 게 제일 많다는 게 장점이지만!”

편의점의 생명은 컵라면과 야식, 군것질거리들이니까!

[호오……. 정말 신기한 곳이로고. 게다가 점원이 입어야 하는 옷도 정해져 있다니!]

그는 흥미롭다는 듯 좋아하는 웹소설도 안 보고 편의점의 광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여기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호객 행위는?]

“그냥 손님 오면 계산해 주면 돼. 그게 끝이야. 청소 같은 건 원두가 다 하고 갔거든. 그리고 잠깐만 맡아 주는 거니 별일은 없을 거야.”

하빈이 심드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박원두가 한 과목 시험 칠 동안만이랬으니, 잠깐만 봐주고 다시 집에 가면 된다.

예전에도 박원두가 하빈의 알바 대타를 해준 적이 있었고,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이정도 부탁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게다가, 여긴 손님 없을 땐 드라마 봐도 되거든!’

하빈이 경쾌한 동작으로 톡톡,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요즘 핫한 미드가 화면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헤헤. 개꿀.”

그녀가 흡족한 표정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딸랑-

때마침 손님 한 무리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손님들. 어떻게 보아도 수상해 보였지만, 현하빈은 이미 드라마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대충 매장을 훑어보곤 일행에게 눈짓했다.

‘야, 확인했지?’

‘넵. 여자애 하나만 있습니다.’

‘드라마에 정신 팔린 거 보니 걱정 안 해도 되겠는걸?’

‘……일이 쉽게 풀리는군.’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헌터 전용 포션들이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가의 회복 포션, 독 포션, 상태이상 포션 등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저기 알바생, 아직도 폰만 보고 있군.’

‘안 들키겠는데요?’

‘이렇게 쉬울 수가.’

눈짓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미소짓는 그들.

그랬다.

애초에 그들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편의점에서도 포션들을 팔기 시작한 걸 알고, 편의점 포션들만 노리는 도둑들이 생겨났다.

공식 포션 판매처들은 헌터들이 지키는 경우가 많아 도둑질이 어려웠지만, 편의점은 일반인 알바생이 지키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만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떠오르는 범죄자 유형, 일명 ‘편의점 포션 도둑’.

편의점 포션만 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대로 편의점을 빠져나간다.’

흡족하게 미소를 지은 그들이 재빠르게 입구를 향할 때였다.

[이런! 도둑놈드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내 앞에서 절도를 일삼느냐!]

그들의 뒤통수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어디서 나오는 소리야?”

“대장! 저…… 몸이 안 움직입니다.”

“……!”

선두에 있던 도둑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쇳덩이가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 겨우 눈동자만 굴려 계산대를 쳐다보았다. 분명 저기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때마침, 그 와중에도 한결같이 심드렁하게 폰을 보고 있던 알바생이 스윽 고개를 들었다. 만사 귀찮은 표정의 여자애.

“손님들, 거기서 뭐 하세요?”

하빈이 무심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드, 들킨 건가?’

여전히 옴짝달싹도 못 하는 도둑 삼인방은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쪽에 들리지 않게 하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김잘잘……. 잘하긴 했는데, 꼭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니? 에휴, 이렇게 된 이상 꿀팁이나 써먹자.”

잔뜩 한숨이 섞인 목소리. 도둑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조용한 속삭임.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꿀꺽.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긴장하고 있던 도둑들에게 하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생긋 웃어 보였다.

“뭐,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도둑의 반응에 긴 생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 하빈이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손님. 놀라셨죠? 별건 아니고……. 제 검이 고장 나서요. 또 이러네.”

“……검이 고장 났다고?”

“어쩔 수 없죠. 주머니 좀 잠시 보여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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