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그러나 음악으로도 용서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지...☆
이후, 하빈은 이공간 진입에 대한 사실을 채지석에게 조금 털어놓았다.
당연히 보스 방에 가서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어디까지나 킬스크린의 다른 층을 오갈 수 있다는 이야기만.
“……뭐? 54층까지 방문이 가능하다고?”
채지석은 하빈의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벌어졌다.
54층이라니.
인류 최강의 헌터로 알려진 ‘피데스’도 겨우겨우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50층에 다녀올까 말까인데.
다른 헌터들이 온 힘 다해 클리어한 게 이제야 26층…….
저게 진담이긴 한 걸까.
한참 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하빈에게 물었다.
“너…… 인간이 맞는 거지? 아니, 인간이 맞으신……?”
하빈이 한껏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너무하네. 채씨, 이제 나를 인간 취급도 안 해주겠다는 거야? 실망이야.”
“그게 그 소리가 아니잖아! 아니, 정말 이건…….”
고개를 흔든 채지석이 중얼거렸다. 그가 하빈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런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도 나를 죽이지 않아서 고맙고. 비밀을 안 후에도 살려 줘서 고맙고, 친구 해줘서 고맙, 아니 감사합니다.”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계속 뭐라는 거야. 나 그렇게 사람 막 죽이는 인간 아니거든? 저번에 거울 던전에서도 님 살렸잖아.”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그때 솔직히 나 이대로 죽겠구나 했어.”
거울 던전을 마주했던 채지석.
당시 압도적인 몬스터들의 기세에 한 번, 그리고 현하빈의 능력을 보고 난 뒤 한 번. 두 번이나 죽음을 예감했었다.
하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반박했다.
“애초에 채씨는 지세 언니 동생인걸! 채씨를 죽이면 내가 우리 언니 얼굴을 어떻게 봐?”
“……듣고 보니 그렇네?”
어쩐지 그거 진심 같아서 더 무섭다?
생각에 빠져 있던 채지석은 결론을 정리했다.
“그럼, 결국 네 말은, 킬스크린에 가면 나를 50층에 데려다줄 수 있다는 거지?”
“대충은. 해봐야 알겠지만.”
“……고맙다. 이렇게까지 도와줄 줄이야.”
연수원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하빈이다.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것도 싫어하고, 비밀을 숨기느라 애쓰는 그녀가 이렇게 스스로 나서 준다니.
“혹시, 이번에도 우리 누나 일이라서?”
“뭐 그것도 있지만…….”
하빈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나도 그 마음은 아니까.’
가족을 걱정한다는 것.
하빈이야말로 각성 전에 현시우를 찾으러 다녔기에 그 기분을 안다. 도움을 청할 때의 마음, 거절당할 때의 마음까지도.
하빈이 현시우를 찾아 나설 때도 마찬가지로 거절한 사람들이 있었다.
‘허, 그 정도로 오래 실종된 거면 벌써 죽어도 죽었겠다. 아가씨, 이제 정신 차리고 이런 데 돈 쓰지 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애걔……? 야, 이런 건 헌터들한테는 푼돈이야. 누가 이런 코 묻은 돈 받고 사람 찾는 일이나 하겠어?’
그리고,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가끔 반짝이는 호의가 있었다.
‘……저기요, 그쪽 각성자도 아니라 돈도 없을 텐데, 이런 거에 이런 거금까지 주실 필요 없어요. 그냥 오다가다 그쪽 오빠 소식 들으면 꼭 알려줄 테니 걱정 말고 연락처 주세요.’
‘돈을 안 받으신다뇨, 정말 고마워서 드리는 건데요…….’
‘정 고마우면, 다음에 그쪽도 다른 사람한테 똑같이 도와주면 돼요. 그렇게 돌고 도는 거죠.’
그때, 대가 없이 선뜻 도와줬던 그 헌터님은 잘 지내고 계시려나.
‘이제 오빠 찾았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을 접어두며, 하빈은 눈앞의 채지석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단단히 팔짱을 꼈다.
“흠흠, 그리고 내가 계산해 보니까, 딸기 뷔페 마감일도 얼마 안 남았더라고.”
“아, 저번에 누나랑 같이 가기로 한 그 딸기 뷔페? 그거 마감일도 있어?”
하빈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딸기도 철이라는 게 있단 말이지. 지세 언니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내년에 딸기 뷔페 가보게 생겼어!”
민망함을 감추려고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그런 모습마저도 채지석은 고마웠다.
“괜히 그런 핑계 대지 않아도 돼. 그 마음, 진짜 고맙게 생각…….”
“뭐래? 진심인데?”
진심이 한가득 느껴지는, 아주 심각한 목소리에 채지석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냐?”
“당연하지. 자고로 먹는 거랑 노는 건 미루면 안 돼!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세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멸망을 막으면 될 것이 아니냐!]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다행히 이번엔 하빈에게만 외쳤다. 하도 당하다 보니 약간의 눈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하빈이 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건데? 갈 거면, 나 미리 보조 배터리 충전해야 돼. 이왕 가는 김에 맛집 메뉴들로 도시락 싸서 인벤토리에 쟁여 놓자!”
“……보조 배터리랑 맛집 메뉴? 그걸 왜 챙겨?”
채지석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포션이랑 아이템으로 가득 채워도 모자랄 판에 무슨!”
게이트 던전을 가든, 킬스크린 던전을 가든, 헌터들은 당연히 포션부터 챙겼다.
던전 안에서는 통신도 안 터지는데 대체 누가 보조 배터리를 신경 쓰겠는가? 게다가 인벤토리 공간도 부족한 와중에 거기 맛집 메뉴를 넣을 리 없다.
게다가 이번 원정은 킬스크린, 그것도 무려 50층이다. 한국 랭킹 2위, 채지세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하지만 하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급식에는 질렸다고. 연수원 탈출한 지금이 얼마나 황금 같은 시간인데. 먹을 수 있을 때 맛집 메뉴 못 챙겨 먹고 비상식량이나 포션으로 배 채우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방금 이준휘 비서마저 ‘회복 포션은 더럽게 맛없다’라고 공인까지 했던 참이다.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현하빈이 포션을 마셔봤자 회복되는 정도는 새발의 피.
‘체력이 21억인데.’
먹을 필요가 1도 없다.
그렇다고 다 까놓고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하빈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채씨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포션 좀 넣어 갈게.”
혹시 언니나 채씨가 포션 부족하다면 건네줘야 하니까.
“……그럼, 보조 배터리는?”
“그거야, 당연히 핸드폰 충전하려고 그러지. 심심할 때 영화 볼 거야.”
마침 생각난 듯, 하빈이 남은 핸드폰 저장공간을 확인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앗, 2기가밖에 안 남았잖아?!”
이래가지고는 영화 하나 넣는 것도 어렵다!
마음이 급해진 하빈이 발을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조만간 저장공간 더 큰 기종으로 갈아타거나 보조 기기라도 사야겠어. 영화 받아 놓으면 데이터 없어도 안 끊기고 나오겠지?”
“영화를 보겠다고……? 킬스크린 50층에서…… 영화를…….”
채지석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감성캠핑도 아니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판치는, 한 끗 차이로 생사가 오가는 킬스크린에서 팔자 좋게 영화를 보겠다고?
하지만 그 중얼거림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왜, 채씨도 같이 보고 싶어? 이참에 미니빔 챙겨가야 하나? 역시 더 큰 화면에서 고화질로 감상하는 게 낫겠지?”
그녀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채지석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난 됐어.”
보다가 까닥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영화는 무슨 영화!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저건 방심을 넘어서 안전불감증 수준이다. 저 페이스에 휘말리면 안 된다.
‘나라도 정상적인 준비물을 챙겨가자.’
그는 조용히 챙겨갈 포션 리스트를 확인했다. 현하빈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강자인 게 맞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까지 맡길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하던 대로 철저하게 준비해서 임할 것이다.
채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할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정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틀은 시간이 필요해.”
현하빈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혹시라도 채지세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곧바로 출발하고 싶은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약이 많았다.
일단, 킬스크린은 방문하기 전에 형식적으로라도 예약 및 방문 허가가 필요했다. 국제적인 협약으로 정해진 규칙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지석이라도 그 절차를 밟아야 했다.
솔라리스의 남은 일들도 문제였다. 지세도 자리를 비웠는데, 지금 당장 채지석마저 빠졌다간 솔라리스가 휘청일 상황. 그러니 그전에 어느 정도 방비는 해놓고 출발해야 한다.
“그러니, 이틀 동안 준비물도 챙기고, 킬스크린 입장 수속 서류도 발급받고, 솔라리스의 일들도 마저 처리하고 올게. 그만큼만 기다려줘.”
“그게 이틀 안에 된다고?”
“늘 하던 일이야. 걱정 마.”
후우, 한숨을 쉰 채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다. 보답이라기에 뭐하지만…… 이번 일 끝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널 연수원에서 빼내는 데 협조하도록 할게.”
채지석이 미리 뽑아 놓은 연수 대체 서류를 하빈에게 건넸다.
그럴듯하게 꾸며진 서류들은, 도장이 찍힌 채 날짜 부분만 비어 있었기에, 언제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었다.
그야말로 땡땡이 백지수표!
그것을 확인한 하빈의 눈이 커졌다.
“아니! 웬일이야, 채씨? 이런 걸 다 준비하고?”
스윽.
사양하지 않고 잽싸게 서류를 챙기는 하빈. 그녀의 입가에 둥실둥실 미소가 걸렸다.
“정말, 이래서 예지 스킬, 예지 스킬 하는구나?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언제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위험하지! 그러니까 연수원 조기 퇴소라는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하는 거 아냐!”
[…….]
그럼그럼. 그렇고 말고.
하빈이 흡족하게 백지 서류를 살펴보는 동안, 채지석이 덧붙였다.
“그게 다가 아닌 거 알지? 그건 선금이라 생각해. 일 완수되면 몇 배로 얹어줄게.”
“콜. 이제야 채씨랑 얘기할 맛이 나네.”
* * *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길드장 집무실로 향한 그들.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여전히 노동요에 빠져 있는 이준휘가 보였다.
“흠흠흠…… 해피해피 맑은 날…….”
문제의 G마트 로고송.
공교롭게도 그의 흥얼거림은, 음정과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며 영상과의 감미로운 듀엣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계적으로 서류를 이리저리 넘기는 움직임은 가히 경이로움에 가까웠다.
“난난나…… 해피해피…….”
“저기요, 비서님?”
한창 노동요에 빠져 고개를 까닥이는 이준휘를 향해, 채지석이 소리쳤다.
“비서님!”
“흐학!”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이준휘가 스페이스 바를 눌러 뮤튜브를 일시 정지시켰다.
마침내 방 안을 가득 채우던 2배속 노동요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흐학이요?”
“……흠흠, 흐학이라뇨? 그게 뭐죠? 잘못 들으셨나 봅니다.”
“…….”
모른 척 태연한 표정을 한 이준휘가 능청스레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두 분 이야기 끝나셨습니까?”
“예.”
“흠, 그래서 부길마님, 제가 전달받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채지석이 곤란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쓸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얼굴.
“네, 무슨 말씀을 하시려기에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하고 계시죠?”
그 침묵에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이전까지 영혼이 없었던 이준휘의 눈에 얕은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채지석은 멈추지 않고 할 말을 했다.
“하빈이랑 저, 둘이서 킬스크린 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찾아든 정적은 좀 길었다. 이준휘의 온몸이 경직되는 소리가 똑똑히 들릴 정도로.
한참이 흘러서야 그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스타카토처럼 절도 있는 웃음이.
“하하하! 부길마님, 혹시 자동차세요? 농담이 선을 넘으시네……. 그것도 중앙선을.”
“농담 아닙니다.”
“……언제요?”
“이틀 뒤요.”
“…….”
와장창.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준휘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