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Left behind (3)
“나를 50층에 데려다 줘.”
채지석의 부탁이 떨어진 직후. 하빈은 슬금슬금 표정을 바꾸었다.
치켜 올라가는 눈썹, 놀란 표정, 말도 안 된다는 듯 과장된 목소리.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뭐어어?”
오시이입 층?
“그런 무서운 곳에 내가 어떻게 채씨를 보내?”
“야, 이번엔 대체 무슨 컨셉이냐…….”
당황하는 지석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하빈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슬금 뒤로 물러섰다.
“난, 정말 선량하고 힘없는 연수생인데……!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너무하네. 장난이 너무 심하다, 채씨!”
“…….”
“이거 갑질이야, 갑질!”
하빈은 이야기하면서 저쪽,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문 틈을 힐끔 쳐다보았다.
‘흐음.’
채지석이 사용한 아이템들은 소리와 통신을 차단하는 용도.
아이템 써서 소리는 빠져나가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누군가 망원경이나 카메라나, 다른 수단을 써서 입 모양을 읽는다거나, 다른 방식을 썼는지 모르잖는가.
‘……김잘잘, 성좌 메시지 써서 채씨한테 전해.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안전한 곳에서 이야기하자고.’
[……알겠다.]
하빈이 기만의 수호자라는 사실은 어차피 알려져 봤자 상위 랭커들에게나 화제가 될 만한 일이다.
기만의 수호자 처치 퀘스트는 최상위 랭커들만 받았으니까.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어차피 이 세상에 힘숨찐이 한두 명도 아닌 데다(물론 다들 현하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지만……), 어쨌든 잘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킬스크린을 50층 이상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은-
‘앞선 사실보다 더더욱,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광역 어그로란 말이지.’
이런 중대한 정보를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찜찜했다.
대체 채지석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역시 저번에 잘잘이가 정보를 흘렸던 게 화근이었나.’
지난번 채씨 집 방문 당시, 아헤자르는 ‘사실 현하빈은 오십……!’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하빈이 슬쩍 아헤자르를 째려보았다.
‘에휴 김잘잘. 아무튼 입단속이 잘되는 꼴을 본 적이 없어요. 마리아나 해구 벌써 다섯 개 적립이야.’
[어쩌다 다섯 개가 된 것이냐?!]
‘이자 붙여서 계산해야지. 어쨌든 메시지는 전달했고?’
[물론이다!]
“…….”
하빈은 채지석을 돌아보았다. 아헤자르에게 말을 전달받은 게 맞는지, 그가 침묵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성급했어. 나머지 이야기는 나가서 하자.”
그 말을 듣자마자 하빈이 냉큼 일어섰다. 그녀는 채지석보다도 더 빨리 문 앞을 향해 걸었다.
“좋아, 그럼 빨리 앞장서. 나가자, 나가!”
“……웬일로 네가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드디어 연수원 탈출!”
하빈이 개운한 표정으로 연수원 천장의 갈매기 문양을 흘겨보았다.
“난 1초도 더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까다로운 개미 눈물 안녕, 맛없는 코다리 강정도 안녕!”
심각한 표정을 짓던 채지석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실소를 흘렸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연수원 생활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네.”
“당연하지! 똑같은 반찬만 계속 돌려 나오던 급식은 더 이상 놉. 숨어서 몰래 폰 보는 것도 이제 끝! 오늘 저녁밥은 무조건 배달 맛집으로 먹을 테다.”
당당하게 문밖으로 향하는 현하빈. 그 뒷모습을 보던 지석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올 때보다는 그래도 여유가 생긴 듯, 평소처럼 한층 밝아진 표정이었다.
“야, 그럼 저녁은 저번에 먹었던 치킨으로 시킬까? 아니면 한식? 중식?”
채지석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며 외쳤다.
* * *
그들이 향한 곳은 솔라리스 본부 건물. 넓은 부지에 지어진 예쁜 유리로 된 건물들과 그 주변의 잔디 정원이 유명한 곳이었다.
햇살이 드는 정원에는 가로수 아래 모여서 토론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풍 나온 듯 간식이나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대학 캠퍼스를 떠올릴 법한 광경에 하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온 적 있었는데 솔라리스에는 처음이지?”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에는 솔라리스 영문 로고가 금빛으로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 채지석이 하빈에게 ID카드를 건넸다.
“여기, 급하게 임시로 만들었어. 이거면 웬만한 곳에 출입 가능할 거야.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ID카드를 입구에 찍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부길마님!”
“어디 다녀오는 중이에요?”
“아까 이 비서님이 찾던데요!”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스쳐가는 길드원들이 채지석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건물 내부는 인테리어가 꽤 독특했는데, 유리온실처럼 나무들이 한가득 심어진 곳이 있는가 하면, 장난감 같은 가구들로 이루어진 곳도 있었고, 중세풍으로 꾸며진 곳들도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던전에서 영감을 얻은 인테리어도 있고, 그냥 창의적인 발상을 위해 꾸민 부분도 있어. 포토존으로 인기가 꽤 있더라.”
채지석이 마침내 향한 곳은 건물 중간층, 중간 방이었다.
양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문.
“여기가 바로, 솔라리스 길드장 집무실. 누나가 쓰던 곳인데…….”
채지석이 설명하면서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와! 부길마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이것들 좀 도장 찍어주시죠!”
문이 열리자마자 수북히 쌓인 서류가 채지석을 향해 돌진했다.
* * *
슈루룩-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서류들.
하빈은 곧 그 많은 서류들이, 짙은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익숙하다는 듯 한 번에 착, 서류철을 잡아챈 채지석이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긴 우리 이준휘 비서님. 솔라리스 강북 본부장도 겸직하고 계신데, 비서를 자처하셔서…….”
“하하, 내가 왜 그랬을까. 어서오세요. 일단 들어오신 김에 음료는 커피, 핫세븐, 회복 포션 중에 고르시고……. 그런데 부길마님, 혹시 이분 신입이신가요?”
이준휘는 깔끔한 수트 차림과는 달리 ‘도비 이즈 프리’라고 대문짝하게 적힌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책상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커피 컵들, ‘퇴사퇴사. 퇴사하고 싶다’가 적힌 달력, 얼굴에는 자본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영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은은한 미소까지.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대표한테 대놓고 퇴사하고 싶다며 시위하면서 일하는 근무환경이라니.
‘근무환경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걸?’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아니, 이쪽이 바로 그 ‘현하빈’.”
“……!”
하빈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준휘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방 안을 떠다니던 서류들이 차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이분이 그, 두 분이서 영입하려고 기를 쓰시던 인재……!”
이준휘는 흘깃 채지석의 눈치를 보더니, 하빈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현하빈 님, 이렇게 된 이상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드리죠. 절대, 채지세 길드장님에 대한 팬심으로 함부로 솔라리스 길드 가입을 결정하지 마세요. 저는 채지세 님 대의에 혹해서 길드 창단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일하고 있는데…….”
채지석이 기겁하며 그를 뜯어말렸다.
안 그래도 가입 안 하겠다고 뻗대던 현하빈인데, 이러다 가입하기도 전에 도망가면 어쩌려고!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비서님! 애초에 저희가 말렸는데 겸직까지 하면서 제일 열심히 일 맡으셔 놓고! 저희 노동법 다 준수하고 휴가도 많이 드리는데 비서님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데 써야 한다’고 자진 반납하셨으면서……!”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매일 퇴사 노래 부르시면서 저희 놀리는 거잖아요!”
“가끔은 진심입니다.”
그가 서글픈 표정으로 옆에 쌓인 서류철을 돌아보았다. 모두 솔라리스의 복지 사업과 관련된 서류들.
“……에휴, 종로구랑 영등포구에서 또 몬스터들 때문에 수많은 집들이 부서졌다는데, 언제 예산 편성해서 언제 또 지원을 해드리나. 지역 복지 사업을 하면서 정작 내 복지는 못 챙기고 있는데, 이걸 어쩌나.”
“그, 원하시는 복지 더 있으시면 다음 번 연봉 협상 때 마저 이야기 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인력 충원도 바로 될 거예요.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방금 말씀하신 내용, 잊지 말고 서면으로도 정리해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준휘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은은한 자본주의 미소를 되찾은 준휘가 하빈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현하빈 님은. 커피, 핫세븐, 회복 포션 중에 뭐 드실 겁니까?”
“회복 포션 맛있어요?”
“더럽게 없는데요.”
“맛있는 건 없어요?”
하빈이 눈썹을 찡그리자 이준휘가 여전히 은은한 미소로 대답했다.
“사실 길드장님 냉장고를 털면 더 나옵니다. 저희 함께 훔쳐 먹어볼까요?”
채지석의 눈이 커졌다.
“누나 냉장고가 여기 있다고요? 엊그제 밤샐 때는 말씀 없으셨잖습니까! 그때 당 떨어졌었는데.”
“너무 바빠서 까먹고 있었죠. 하하, 부길마님, 저희 대충 140시간 째 잠 안 자고 있는데요. 하하하.”
“140시간째 잠을 안 자다니, 그게 진짜 돼요?”
하빈의 물음에, 이준휘가 정색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대답했다.
“……궁금하신가요? 전 궁금하지도 않은데 강제로 알게 됐습니다.”
그는 다시 은은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비싼 피로회복 포션과 함께라면, 체력적 패널티 없이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밝혀냈답니다!”
이준휘는 유명한 메탈 곡인 ‘라젠카, 세이브 미’의 첫 소절을 콧노래로 부르며, 책장의 책 몇 개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거대한 책장이 스르륵 돌아가며 드라이아이스에서 나올 법한 시원한 안개가 흘러나왔다.
“짜라란.”
이준휘가 영혼 없는 감탄사와 함께 안쪽을 가리켰다.
책장 너머에는 냉동고, 냉장고와 간식 선반이 있었다. 컵라면과 과자들이 꽉꽉 들어찬 선반, 탄산음료와 과일청, 요거트, 주스들이 차곡차곡 쌓인 냉장고, 아이스크림과 얼음이 보관된 냉동고까지.
그야말로 간식 천국이었다.
“골라보시죠.”
채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기 이런 게 있었어? 어쩐지 공간이 좀 남아 보이더라니. 스킬이라도 써 볼 걸 그랬나.”
“특수 스킬 ‘꿰뚫는 눈’을 간식 찾는 데 쓰시겠다니, 부길마님의 성좌님께서 울고 가실 겁니다.”
이준휘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빈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우와! 대박. 하겐더즈잖아?”
이거 편의점 알바할 때 비싸서 매번 구경만 했던 건데.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긴 하빈이 감탄하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초코와 땅콩, 바닐라가 삼박자로 맞아떨어져 살살 녹는 맛!
잠깐 한숨을 돌린 분위기에서, 하빈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마침 성좌 하니까 말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채씨.”
[맞다! 나도 아까부터 아주 궁금했느니라. 너와 함께 있던 ‘가장 가까운 빛’이라는 별은 어디 갔느냐!]
아헤자르도 궁금했는지 채지석에게만 들리게 외쳤다.
그들은 분명, 연수원장실에서 채지석에게 있던 ‘가장 가까운 빛’이 부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석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건 비서님도 아는 거니까 여기서 말하도록 할게. 알다시피 나랑 누난 공동 계약 성좌잖아. 지금은 누나한테 가 있어.”
“평소에는 둘 다에게 있는 거 아니야?”
“맞아. 원래 동시에 두 사람까지는 지켜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한쪽에 신경 쓰는 것보다 효율은 떨어지지. 혹시 몰라서 누나한테만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어. 이건 누나와 나, 성좌님까지 셋 다 동의했던 사안이고.”
지석은 손가락으로 작게 금빛 효과를 그렸다. 잠깐 성좌가 다른 곳에 가 있는다고 해서 능력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든 돌아올 수도 있고.
“다만, 혹시나 누나에게 정말로 큰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고 부탁드렸어.”
50층에서는 어떤 사태가 터질지 모른다. 지구에서 업무를 보는 지석보다, 킬스크린에 있는 지세에게 성좌를 붙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지금은 큰일이 생긴 건 아니네?”
하빈이 지적했다.
‘가장 가까운 빛’은 아직 채지세에게 있다.
그 말은, 지세가 죽거나 큰 위험에 빠져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어제까지는 안심하고 있었지. 아니, 안심하려 했어.”
채지석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어렵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나가 남기고 간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