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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38) (38/268)

038. Left behind (2)

넝마가 된 인형을 주워든 조교.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블레이드…… 허리케인……….”

‘지금 보니 이름 정말 대충 지었다.’

[애초에 네가 이름을 제대로 지은 적이 있었느냐?!]

잘잘이, 삐약이, 헤딩컬러 틴트를 이은 기가 찰 네이밍.

찔린 하빈이 크흠,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도 인형이 못 버티는구나.’

저번 황마로 사건 때는 마력도 하나도 안 싣고 아주 아주 살살 때렸는데, 그러길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했다간 몇 명쯤 황천길 갔을지도…….’

그녀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조교가 정신을 차린 듯,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현하빈 연수생, 실력을 과시하는 것도 좋지만, 때에 따라 적절한 스킬을 쓰는 것이 전투의 기본입니다.”

조교는 넝마가 된 인형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연수생들을 경험한 그다. 인형의 상태만 보아도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A급이라고 들었는데, 꽤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나 보군. 궁극기 하나만큼은 S급도 넘을 수 있겠는데?’

사실은 스킬이 아니라 그냥 툭 친 것이었지만, 조교가 보기엔 달랐다.

‘간혹 낮은 등급이라도 스킬 하나에 몰빵 투자해서 강력한 위력을 내는 헌터들도 있다던데, 바로 그 케이스인가?’

스킬 이름은…… 얼핏 듣기에도 아주 구렸지만 그게 뭐 대순가? 세기만 하면 되지.

“현하빈 씨, 이번엔 기본 스킬로 처치해 보세요.”

조교가 옆에 있는 다른 인형들을 턱짓했다. 하빈은 이곳저곳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연습용 몬스터 인형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왜 저렇게 많아?’

이러다가 끝도 안 나게 생겼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탈주할까.’

하빈은 건물 입구를 향해 눈을 굴렸다.

그러나 무단 조퇴를 또 했다간 유급+재연수 처리로 연수 생활이 2달은 더 연장됨은 물론, 과태료와 처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빨간 줄 그어지는 건 사양이라고!

‘대체 어떻게 이곳을 평화적으로 빠져나간담…….’

눈치 빠른 채씨라도 있었으면 상황이 더 나았을 텐데.

채지석이라면, 이쯤 나타나서 ‘야, 이거라도 먹고 해. 조교님, 저희 점심 좀 먹고 진행하죠.’ 하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끊어줬을지도 모른다.

하빈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채지세가 킬스크린으로 떠난 이후, 지석의 멘토 역할은 무기한 휴직이었다.

솔라리스의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맡고 있던 부길마 역할은 물론, 그동안 길드장이었던 채지세가 수행했던 역할까지.

2인의 몫을 채워야 했다.

비록 말로만 전해 듣던 ‘이 비서’를 포함한 수많은 인원들이 길드 일을 보조해 주고 있었지만.

-……누나가 벌여 놓은 사업이 길드만 있는 게 아니거든. 백화점이랑 IT 쪽 사업이랑, 투자했던 주식들도 다 관리해야 하고…… 지하실의 비밀기지도 점검해야 하는 데다, 복지 사업까지 챙겨야 해! 아무튼. 진짜 일이 많더라.

칼리고의 강태서였다면 정말로 ‘길드 사업’만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자리가 덜 느껴졌겠지만, 솔라리스의 채지세는 길드장인 동시에 공학자이자 사업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게이트 사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자선 사업도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대체 누나는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한 건지 모르겠어! 이 비서님이랑 매일 밤 커피 캔 부딪히면서 욕하고 있다고!

……그래서 채씨는 당분간 올 일이 없단 말이지.

하빈은 가장 최근에 했던 채지석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수화기 너머로 아련하게 들리던 대화.

-부길마님, 저 진짜, 정말로 병가를 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이제 힐 써주실 길드장님도 없는데요.

-여기…… 회복 포션이 가득 있습니다. 비서님.

-젠장……! 왜 이 시대엔 포션 같은 게 있어서!

-성과급이랑 수당은 달라는 대로 드릴 테니 제발 저 두고 혼자 퇴사할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비서님마저 없으면 저희 진짜 어쩔 뻔했는지 모릅니다.

-하하, 성과급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발언, 방금 녹음했습니다! 구두 계약이라도 효력 성립하는 거 잊지 마시구요!

-…….

아무래도 둘 다 반쯤 돌아버린 거 같은데.

‘채씨가 참 고생이 많아.’

[……원래 한 조직의 우두머리란 아주 바쁜 자리지. 내가 이제껏 본, 제대로 된 우두머리들은 언제나 바빴다.]

‘오, 잘잘이가 웬일로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크흠! 이래 봬도 나는 왕년에 대륙을 평정했던……!]

“현하빈 연수생?”

너무 오래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조교가 그녀를 불렀다. 하빈은 널부러진 인형 조각들과, 수많은 인형들 그리고 조교를 슬쩍 바라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조교님…… 역시 제가 안 좋은 선택을 했나 봐요!”

“무슨 선택이죠?”

“마나를 다 썼어요!”

“…….”

“궁극기 쓰느라 그만……!”

하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 말을 곱씹던 조교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궁극기가 워낙 강력하긴 했어. 이 튼튼한 테스트용 인형이 박살 날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상황을 납득한 조교가 하빈에게 제안했다.

“그럼 혹시 마력을 좀 회복시키고 오후에 다시 한 번…….”

‘오후?’

오늘 오후에는 구독하던 뮤튜브 컨텐츠 라이브 본방이 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저는 궁극기 쓰면 한동안 다른 스킬들에게도 쿨타임이 도는 패널티가 생겨서요!”

“…….”

다른 스킬도 사용하지 못하게 제한하는 패널티라.

‘……패널티가 세군. 그래서 그토록 위력이 대단했던 거였나?’

조교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본인의 등급을 뛰어넘는 수준의 강력한 궁극기를 펼칠 수 있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그럼 쿨타임 도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하빈은 머뭇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서툴고 조심스러운 연수생의 태도.

“저, 제가 잘 몰라서 여쭈어보는 건데요. 그런 거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제 개인정보인데…….”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시 테스트를 보셔야 하니까 대략적인 시기를 말씀해 주셔야 한다는 뜻으로…….”

쩔쩔매는 조교에게 하빈은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 말했다.

“아마…… 하루는 걸릴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그럼 하루 뒤에 다시 진행하도록 합시다.”

“네!”

재깍 대답한 하빈이 얼른 짐을 챙겼다. 연수원 숙소를 향해 몸의 방향까지 돌린 채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 * *

이후 하빈은 적당히 요령을 피워 가며 연수생 생활에 임했다.

강태서도, 지세 언니도 킬스크린 가서 없고. 더 이상의 지각도, 결석도 위험했기에 하빈은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연수에 끌려가야만 했다.

‘블루투스 이어폰 최고.’

그래도 강의형 연수는 맨 뒷자리 착석.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드라마와 웹툰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습의 경우는.

힘 조절을 위해 마음속으로 열심히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명심하자, 개미 눈물의 소금 결정, 개미 눈물의 소금 결정! 딱 그만큼만 힘 쓰는 거야!’

[지금껏 제힘을 과시하려는 놈들은 많이 봤어도 너 같이 힘을 숨기려는 녀석은 처음이구나. 압도적인 힘에는 권력과 명예가 따르는 법이거늘, 어찌 네 녀석은…….]

‘아, 그런 거 관심 없다니까! 잘잘이나 많이 해, 그런 거.’

[하, 내 팔자야.]

탄식하는 아헤자르를 애써 무시한 하빈은 다시 주문을 외웠다.

‘어쨌든 개미 눈물의 소금 결정.’

찔끔의 찔끔의 찔끔의 찔끔!

‘그냥 마력도 싣지 말고 살살 치는 거야, 살살. 어때? 쉽잖아? 그치? 할 수 있지? 할 수 있다, 현하빈!’

하빈은 연수원 뒷마당의 돌멩이를 이용해 몇 번 실험을 한 끝에, 겨우겨우 인형을 멀쩡하게(?) 처치하는 마지노선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봐요, 현하빈 연수생, 하면 되잖습니까! 최단 시간 처치기록이에요!”

“휴.”

“벌써 지쳤습니까? 이건 기본 중의 기본 과정입니다. 겨우 이 정도로…….”

“…….”

잔뜩 흥분한 조교를 보며 하빈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보면 약한 척하는 게 더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연수원에서의 시간은 흘렀고 하빈은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흐음, 너무 빨리 처치했나?’

빨리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실습 속도를 찾아가고.

“현하빈 연수생, 왔습니까?”

채지석 대신 온 새로운 멘토를 만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일찍 끝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임시로 온 멘토는 채지석처럼 열심히 챙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하빈의 멘토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멘티에게만 신경을 더 썼고, 하빈은 곁다리로 챙기곤 했다. 식사조차도 각자 알아서 했다.

“아아, 배고파!”

오랜만에 연수원 식당에 온 하빈은 식판 한가득 음식을 담았다. 그러곤 아무도 없는 테이블을 찾았다.

‘내 맞은편은 저번에 말했듯, 김잘잘의 자리.’

[그게 농담이 아니었느냐?!]

반대편에 아헤자르를 살포시 내려놓고, 숟가락을 든 하빈이 돌연 창밖을 보았다.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눈빛으로.

‘평소 같으면, 이 시간쯤 채씨가 돈가스 같은 거 포장해 왔는데.’

언제나 남의 밥부터 먼저 챙기던 그였다.

‘……바쁘다더니, 정작 본인 밥은 챙겨 먹고 있는지 모르겠네.’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 지금쯤 한창 길드 업무에 치여 있을 테니 당연하게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채씨 몫까지 든든히 먹을게!’

하빈은 급식으로 나온 코다리강정을 젓가락으로 콕 찌르며 턱을 괴었다.

반찬이 취향이 아니라 그런지, 어쩐지 먹는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숟갈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현하빈 연수생.”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빈의 임시 멘토가 다가와 있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그……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하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찾아올 사람 없는데?’

채씨는 바쁠 테고.

다른 지인들은 현하빈이 어느 연수원인지 모를 테니 불쑥 찾아올 리가 없다. 그럴 거였으면 카톡으로 먼저 물어봤겠지.

‘설마 현시우인가.’

어차피 밥도 다 먹었겠다, 하빈은 곧 새 멘토를 따라나섰다. 의외로 그가 향한 곳은 연수원장실이었다.

‘대체 누굴 만나길래 이런 데까지?’

딱 한 번, 칼리고에서 사람을 보냈을 때 이런 대우를 받았었다.

‘그럼 이번에도 칼리고인가.’

강태서가 가기 전에 남긴 거라도 있나.

하빈이 추측을 할 때였다. 문이 열리고 그곳에 선 사람은.

“……현하빈, 오랜만이다.”

채지석이었다.

* * *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오랜만은 무슨.”

하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원장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연수원장과 임시 멘토는, 둘이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준 뒤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숙소 문 앞에서 기다릴 사람이 웬일로 거창하게 여기로 불렀대?”

“방금 연수원장님한테 허가 먼저 받느라.”

“무슨 허가?”

“연수원 대체 서류 발급해 달라는 허가.”

“그게 뭔데?”

“너 연수원에서 빼돌릴 수 있는 절차야.”

“…….”

하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평소의 채지석답지 않은 일처리였다.

늘 꼼수보단 정석을 권하던 그다.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연수원장실로 하빈을 불러내는 것도, 연수원 대체 서류 같은 편법을 사용하는 것도.

“멘토니까 그런 편법 못 쓴다고 하더니 어쩌다가 마음이 바뀐 거야?”

“…….”

하빈은 채지석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체력은 포션으로 어떻게든 채웠지만, 숨길 수 없는 지친 기색, 어두운 표정.

[많이 바빴다고 하더니, 정말 힘들었나 보군. 안색이 좋지 않구나. 퍽 안쓰럽도다!]

‘……정말 그게 다일까?’

[그거 말고 무슨…… 잠깐.]

아헤자르가 놀란 듯 말을 멈추었다. 잠깐 채지석을 살피는가 싶더니 황급히 지석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성좌는 어디 갔느냐?! 그, 가장 가까운 빛이라던 작은 별……!]

“…….”

채지석은 대답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들을 꺼냈다. 모두 대화 내용을 차단하고 정보를 보호하는 종류의 아이템들이었다.

이리저리 아이템을 작동시키고, 효과가 적용된 걸 꼼꼼히 확인한 채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현하빈, 이게 네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채지석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50층, 너는 이동할 수 있는 거지?”

“…….”

“같이 가달라는 게 아니야, 어려운 부탁이라면 거절해도 돼. 하지만 혹시 정말로 가능하다면,”

짧은 침묵 끝에, 채지석이 마저 입을 열었다.

“……나를 50층에 보내 줘.”

간절하다 못해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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