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37) (37/268)

037. Left behind (1)

“현하빈, 너 병결 끝나지 않았어?”

“…….”

“끝났을 텐데 왜…… 오늘도 우리 집에 온 거냐.”

채지석은 거실에 널브러져 바닥과 일체가 된 하빈을 발끝으로 슬쩍 건드렸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죽은 듯이 뻗어 있었다.

‘살아 있는 거 맞겠지? 하루 종일 꼼짝을 안 해서…….’

마침 하빈이 해맑은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무단결석인데?”

“아, 깜짝이야! 야!”

연수원 왜 안 가는데!

[쯧쯔,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현하빈은 설득한다고 되는 인간이 아니거늘.]

“그러는 아헤자르 님도 신나게 웹소 보고 계신 거 다 압니다! 대체 언제 물드셨냐고요!”

채지석의 질책에 한창 핸드폰 화면에 달라붙어 있던 새하얀 검이 움찔, 하고 흔들렸다.

[오, 오늘은 안 된다! 오늘은 45편 무료 이벤트가 있다! 단언컨대 필히 재주행을 달려야 하는 것이니라…… 또 여기 이 작품은, 오늘까지 한 시간마다 무료 이벤트를 하는데…….]

‘말을 말자.’

나름 멘토 역할이었던 채지석은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한창 짐을 챙기고 있는데, 하빈이 물었다.

“그거, 지세 언니 짐이지?”

“…….”

채지석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하빈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석은 다시 고개를 내려 바닥에 늘어놓은 포션 병과 아이템을 쳐다보았다. 전부 중요한 전투를 위해, 남매가 아끼고 아껴 놓은 아이템들.

“맞아. 내일이 바로 50층 공략 날이니까.”

“…….”

50층 공략.

지난번 SPES 회의 때, ‘기만의 수호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피데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초의 그 회의 목적 자체가 50층 공략에 대한 거였으니까.

지석이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피데스 님의 말에 의하면, 26층과 50층은 연관성이 깊대. 26층 보스가 마왕인데, 50층도 마계 테마 라더라고. 그래서 둘을 이어 주는 마법이 있다나 봐. 혼자서 열심히 연구하신 거라고 하더라.”

26층과 50층.

하빈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크릭샤도 26층에서 50층으로 도망쳤었지.’

이러면 단순한 추론이 가능하다. 비슷한 마법을 피데스도 사용할 수 있나 보다.

“다만 여러 명을 옮길 수는 없고, 최정예 10명만 다녀올 수 있다고 해서, 누가 다녀오고 싶은지 자원을 받았어.”

일명, ‘50층 원정대.’

“……거기에, 지세 언니가 자원했다는 거야?”

“내가 간다고 했는데, 굳이 누나가 가겠다고 우겨서.”

채지석이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표정을 지은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무사히 다녀올 거라고 믿어.”

“…….”

하빈은 바닥에 놓인 짐을 덩달아 쳐다보았다. 힐러로 유명한 채지세임에도 불구하고, 지석은 그녀를 위해 가장 비싸고 희귀한 회복 포션을 쏙쏙 골라 챙기고 있었다.

꼭 마지막 전투에라도 보내는 듯 비장한, 그리고 아주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이런 일을 많이 겪은 모양새.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하빈이 슬쩍 턱을 괴었다.

‘하긴, 그동안 채남매가 겪은 일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어.’

요즘은 재벌 이미지 때문에 많이들 잊고 있지만, 채씨 남매는 엄연한 현직 헌터다.

요즘은 돈을 좀 벌었다 싶으면 헌터 일 때려치우고 워라밸 챙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행보는 꽤 이례적이었다.

처음 게이트 사태가 터졌을 때부터, 쉬지 않고 언제나 선두로 나섰던 그들이니까.

아마 최초의 게이트부터 현존하는 최강의 보스까지, 수많은 위기들을 거쳐 왔겠지.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이렇게 짐을 쌌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맞아. 언니는 무사히 다녀올 거야.”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녀 가까이 데굴데굴 굴러온 포션 병이 있어서 주워들 때였다.

벌컥,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지석아, 짐 다 챙겼…… 어머, 하빈이도 왔네! 연수원 안 갔어?”

“언니!”

집 안으로 뛰어들어 온 지세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신이 나서 서로 인사하는 그들을 향해, 지석이 덧붙였다.

“얘는 연수원 안 가는 날이 가는 날보다 더 많을걸.”

아니라는 듯, 하빈이 변명처럼 빠르게 외쳤다.

“아니야, 오늘은 언니 기다리고 있었지! 50층 공략 전에 인사하려고!”

“나 보려고 연수원 빠진 거야? 정말 감동인데?”

하빈에게 대답하던 지세는 옆을 돌아보았다. 지석이 바리바리 챙기고 있던 아이템들을 확인한 지세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넌 또 뭘 이렇게 많이 쌌냐?”

“뭐가? 평소에도 위험한 곳에 갈 때는 이 정도로 챙겼잖아.”

“에이, 나 인벤토리 꽉 찼어. 이거 다 안 들어가.”

“그래도 50층이잖아.”

“…….”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헤쳐왔지만, 그들에게도 50층은 꽤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인류가 한 번도 도달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

그것도 차근차근 도달한 게 아닌 편법을 이용한 공략이다.

채지석은 옆에 기대 놓았던 가방을 지세에게 툭 던졌다.

“인벤토리 다 찼으면 배낭에라도 넣어. 누나 힘 스탯도 좋잖아. 매고 가면 되지.”

가방을 받아든 지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동생, 가끔 똑똑하다니까!”

“가끔 아니거든?”

“그래. 자주 똑똑하다고 정정해 주마.”

지세가 포션 병을 배낭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길드의 이 비서님께도 웬만한 건 다 전달 드렸어. 아마 너랑 둘이서 솔라리스 운영하는 데, 별문제 없을 거야. 내가 말했던 건 다 기억하지?”

“……어.”

“그래. 자주 똑똑하다니 믿어본다.”

“…….”

채지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얼른 갔다 와. 누나 없으면 일이 너무 많아. 원래 나랑 비서님이랑 누나 셋이서 하던 건데, 거기서 누나가 빠져버리면 이 비서님이 또 퇴사 돌림노래를 부르실걸?”

셋이서 오순도순하며 처리하던 업무들. 둘만 남으면 야근과 커피의 연속이 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셋 중에서 하필 힐 해줄 사람이 빠졌다며 난리셔! 이제 한동안 야근은 뭘로 버티냐고. 그래도 커피, 핫세븐, 비싼 포션 없이 누나 버프랑 힐링으로 버틴 건데.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았을 거라나.”

“하하, 맞네. 갑자기 가게 돼서 준휘 비서님, 고생 좀 하겠다. 하다가 너무 많다 싶으면 걍 냅 둬. 갔다 와서 처리하지, 뭐.”

“언니, 나랑 딸기 뷔페 가기로 한 것도 잊지 마. 알지? 나 지금 한 달째 딸기 참고 있다구.”

옆에 있던 하빈마저 끼어들었다. 지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하빈이랑 가기로 한 곳을 거의 못 가봤네! 쇼핑밖에 같이 못 했잖아?”

지세가 아쉽다는 듯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돌아오면 같이 가자.”

“……그래.”

그러니까 무사히 다녀와.

푸념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녀를 향한 두 쌍의 걱정 담긴 눈빛을, 지세도 모를 리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지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들 걱정 말라니까! 무사히 다녀올게. 알잖아? 증권가에서 유명한 속설.”

지석은 피식 웃었다.

‘채지세가 선택한 길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속설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설은 속설일 뿐.

“됐고, 진짜 몸조심해.”

사실, 채지세가 아무리 예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모든 걸 맞힐 수는 없다.

투자에 매번 성공하는 건, 수백 번 돌다리를 두드려 성공이 확실하겠다고 판단한 분야에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게이트 공략, 인류의 미래, 그녀의 생사까지, 모든 걸 예측할 수는 없다.

“…….”

지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도, 이렇게 응원해 주는 동생들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동생들, 걱정 마.”

그녀는 씩 웃으며 꽉 찬 배낭을 주워들었다.

* * *

다음날.

어쩔 수 없이 연수원에 출석한 하빈은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강의 내용은 듣지도 않았다. 대신 뉴스 생중계를 보기 위해 몰래 폰을 꺼냈다.

곧 완충된 소중한 블루투스 이어폰이 살포시 그녀의 귀에 걸렸다.

[네! 바로 오늘이죠! 인류 최초의 50층 공략!]

화면에 피데스, 채지세, 강태서를 비롯해 여러 랭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합해 10명 정도.

[벌써 ‘50층 원정대’라는 별명이 붙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강태서와 채지세가 자원했다고 합니다.]

[둘 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헌터들인데요, 그래서 사람들의 우려도 크지 않나요? 우리나라의 보물을 둘이나…… 저렇게 위험한 곳에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회일 수도 있죠. 누구보다 먼저 고층을 경험할 기회. 혹시라도 참여하지 않았다가 뒤처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보다 자원한 상위 랭커 인원이 많았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열 명을 다 채웠으니까요.]

헌터들이 킬스크린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 주변에서는 수많은 취재진,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동료가 마지막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채지석도 지세를 배웅하기 위해 참석한 모습이었다.

‘풉. 역시 갔네. 시끄럽네, 어쩌네, 안 간다더니.’

처음엔 하빈도 가려고 했지만 채지세가 그러지 말라고 선수를 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한 번 더 무단결석을 했다간 내 연수 생활이 위험해지기도 하고…….’

병결에 무단결석까지 콤보로 때렸던 하빈이다. 강태서 찬스도 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강태서 또한 50층 원정 때문에 출장으로 길드에 없으니…….

따분함에 한껏 턱을 괸 하빈이 볼륨을 높였다.

‘직접 배웅 못 나갔으니까 뉴스 생중계로라도 배웅해야지. 이건 합법이라구.’

좋은 명분이었다.

[무엇보다, 헌터들이 참석을 결심한 데는 피데스의 자신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겠죠.]

[네, 그렇습니다. 피데스가 50층을 무사히 다녀올 수 방법이 있다고 발언했으니까요!]

[오…… 무려 피데스의 보장이라, 이러면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마침 화면에 피데스의 가면이 크게 잡혔다.

채지세를 50층에 가게 한 근본적인 원인!

그게 저 자식이었다는 거지?

하빈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 가면쟁이! 우리 언니 무사히 귀환시켜 주지 못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아!”

“거기! 누가 떠듭니까!”

“…….”

하빈은 슬금슬금 강사의 시선을 피해 납작 엎드렸다.

‘으윽, 이 연수원…… 언젠가 내가 꼭 탈출하고 만다.’

그녀가 두 손을 꼬옥 말아쥐었다. 아헤자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훈련이 그렇게도 싫더냐? 여긴 수업만 착실히 들으면 퇴소를 시켜주는 곳이 아니었느냐?]

‘훈련은 개뿔! 그놈의 수업이 문제라고, 문제!’

연수원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어디까지나, 현하빈 한정으로.

예를 들어, 몬스터 대련 실습에서는.

“……자, 어디 한번 여기 인형이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공격 스킬을 써보세요.”

‘큰일 났다.’

스킬? 스킬을 쓰라고?

찰나의 순간, 하빈은 재빠르게 아헤자르에게 물었다.

‘잘잘아! 우리 가진 스킬 중에서 가장 약한 스킬이 뭐였을까!’

[뭐? 약하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 몸의 기술 중 약한 것은 없다! 내가 어찌나 열심히 갈고닦은 스킬들인데!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스킬이니라!]

‘오, 쉣. 어떡하지?’

이번 생은 틀려먹었어.

고민하던 하빈은 그냥 아주 살살 인형을 베기로 했다.

‘그냥, 스킬 없이 가자. 그게 제일 약하니까.’

그래도 어쨌든 스킬처럼 보이기는 해야 했기에, 하빈은 약간의 마력을 실었다.

약간만 실어서, 살살 베면…….

‘되겠지?’

“얍!”

-파자자자작!

하지만, 공격을 받아낸 인형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

“…….”

[…….]

싸해진 분위기. 넝마가 된 인형을 멍하니 주워드는 연수원 조교.

하빈이 재빨리 덧붙였다.

“이건, 보다시피 저의 궁극기! 최종 스킬! 그, 뭐더라? 아! 블레이드 허리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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