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36) (36/268)

036. SPES 회의 (4)

무력행사를 하겠다는 피데스.

그 발언이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술렁이기 시작한 회의실. 엉망진창인 분위기.

“왜, 왜죠? 혼자 퀘스트 보상인 부활석을 독점하려고요?”

“혼자만 퀘스트 깨겠다 그 말씀입니까?”

“정말 그럴 의도라면…… 심히 실망스럽군요.”

동시다발적으로 빗발치는 항의들.

피데스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그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 놓고 항의를 하는 것엔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피데스’는 정의로우니까.

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은 ‘신념의 마법사’, 그리고 ‘정의로운 영웅’.

그는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사로운 일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들과 누가 보기에도 악한 범죄자들을 향해서만 무력을 썼기에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심지어 범죄자를 잡았을 때도 그 자리에서 처치하지 않고 경찰에게 인도해 합법적인 처벌이 집행될 수 있도록 보조했다.

‘맞아. 이제껏 피데스는 함부로 사람들한테 협박하거나 그럴 인간이 아니지.’

‘설마 피데스가 진짜 우리한테 무력을 휘두르겠어?’

좋게 말하면 깨끗하고 정의로운 이미지.

나쁘게 말하면.

‘……만만하게 보였나 보네.’

현시우는 가면 아래로 조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너무 착하게 굴어버렸나.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지.]

네아이바가 끼어들었다. 현시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 이럴 땐 미친놈으로 불리던 1회차 현하빈이 그립습니다. 그때 걔는 그냥 시원하게 자기 정체 공개해 버리고 자기 잡으러 오는 놈들 일격에 끝내 버렸는데.’

현시우는 과거를 회상했다.

회귀 전, 처음으로 시스템이 현하빈을 죽이라는 퀘스트를 내렸을 때. 현하빈은 오늘처럼 회의를 열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네. 그게 바로 접니다. 절 죽이고 싶으신 분은 이리 나와 보시죠?’

당시 현시우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던 현하빈.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기세 덕에, 다들 무서워서 건드릴 생각조차 못 했다.

‘그때는 정말 대박이었죠. 보고 있는 저까지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뭐랄까. 이 구역의 미친개 느낌이었달까.’

[오, 지금이라도 네가 한번 해보지 그러냐? 네가 ‘여기서 반박하고 싶으신 분 있으면 나오세요.’ 시전하면 다들 흠칫할걸?]

‘그건 너무 어그로를 많이 끕니다. 지금의 현하빈은 정체를 숨기는 게 목적이니까, 걔한테 역효과일 거예요.’

[칫. 끝까지 그렇겐 못 하겠다는 소린 안 하네.]

‘……맘만 먹으면 저도 할 수 있거든요?’

[평생 먹지도 못 할 그 맘?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

현시우는 한숨을 팍 내뱉었다.

한 번 받아주면 끝을 알 수 없는 저 무한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그냥 무시하는 것밖엔…….

[뭐라고?!]

‘아, 들렸어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어쨌든.

그가 눈으로 스윽 회의장을 훑었다. 하나하나가 세계 곳곳에서 인정받는 각성자들. 그래도 어차피 여기 모인 인원이 다 덤벼도 현하빈을 못 이긴다.

‘솔직히 함부로 현하빈한테 덤볐다가 큰일 나는 쪽은 저쪽인데? 오히려 말려준 내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듯?’

현시우는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으며 턱을 괴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아직까지는 ‘정의로운’ 이미지를 지켜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괜한 의심을 사거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가는 오히려 현하빈을 향한 이목이 쏠릴지도 모르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평소처럼 가자. 정의에 미친놈처럼.’

현시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해하고 있는 분이 계신데, ‘기만의 수호자 퀘스트’는 저도 안 깰 겁니다. 이건 제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사로운 목적 맞지. 네 혈육 죽이려고 하면 가만 안 둔다는 그런 의미잖아?]

‘네아이바 님, 잠깐 조용히 좀 해주시죠. 집중이 안 되잖습니까. 저 지금 엄청 무게 잡아야 되거든요?’

[올, 그래그래.]

네아이바가 어디 해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현시우는 아까부터 그에게 가장 많이 반박하던 적발의 남자를 쏘아보았다.

“왜 여러분은, 그 퀘스트를 당연히 깨야 하는 것이라 믿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퀘스트니까…….”

“그 ‘기만의 수호자’가 무고한 일반인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그래도 죽여야 할까요?”

잠시 정적이 깔렸다. 적발의 남자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주어진 공공의 퀘스트이지 않습니까? 시스템이 뭐 하러 무고한 일반인을 죽이라고 하겠어요? 다 이유가 있겠죠.”

그러자 여기저기서 찬성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동의합니다. 지금까지 퀘스트를 따르다가 큰일이 난 적은 없었잖습니까.”

“맞아요. 시스템이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웅성거리는 회의장.

현시우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러게요, 시스템이 왜 그런 짓을 할까요?”

다시 침묵.

현시우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여러분은 당장 저를 죽이라는 퀘스트가 내려지면 지체 없이 저를 죽이시겠군요? 그게 퀘스트니까요.”

칼 같은 현시우의 말에, 적발의 남자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아니죠! 어떻게 피데스 님을…….”

저 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세계 랭킹 1위인 피데스를 ‘무슨 수로 죽이겠냐’는 내용이겠지.

현시우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시선 끝에 강태서가 있었다.

강태서는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이제 와서 찔리기라도 하는 건가.

네아이바가 대신 투덜거렸다.

[쟤는 뭘 잘했다고 눈을 저렇게 떠? 쯧쯧, 저 강태서라는 녀석이 바로 걔지? 네가 말했던 회귀 전의 그…….]

‘……그래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현시우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마침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반박을 하던 적발의 남자였다.

“잠깐만요, 그런데 애초에 ‘기만의 수호자’가 죄 없는 사람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고 ‘기만의 수호자’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마수라던가, 마물이라던가!”

그 옆에 있던 다른 헌터도 덩달아 외쳤다.

“게다가 인간이더라도, 무려 부활석이 10개짜리인 퀘스트입니다! 그걸 희생해서 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인물을 살려내는 일에 쓰면……!”

“할리 님.”

현시우는 마지막으로 주장한 헌터를 지목해서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바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기만의 수호자’는 사실 당신의 아들입니다.”

“헉.”

놀라 숨이 막힌 듯, 할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현시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단지 자세를 바꾸었을 뿐인데, 그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주춤주춤 시선을 피하는 할리를 향해 피데스가 재차 말했다.

“제가 죽여도 되겠습니까?”

“아, 아니 그건 말도 안……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죽여도 되겠습니까?”

“그건……!”

“죽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아… 아니…….”

“아까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인간이더라도, 더 중요한 인물을 살려내는 데 쓰면 된다고요. 당신 아들을 희생해서 10명의 목숨을 구할 텐데. 남는 장사 아닙니까?”

“안 됩니다! 제 아들은!”

할리가 울분을 터뜨리듯 소리쳤다. 현시우는 답을 들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할리. 당신 아들이 ‘기만의 수호자’라는 건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진짜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압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정보력이 좀 되는 편이거든요.”

“…….”

그 말에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피데스의 정보력.

그게 다른 누구보다 대단하다는 건 이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현시우는 애초에 회귀자다. 보통 사람들과의 정보량은 차원이 달랐다. 앞으로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각각 길드의 비밀과 미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월랭 1위의 인맥과 자금을 활용해 촘촘한 정보망까지 구축한 상태.

회의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가져와 주제를 잡는 것도 현시우였고, 미리 많은 범죄와 사고를 예방한 것도 현시우다.

주변에서 보기에 당연히 대단한 정보력을 갖춘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제 정보에 의하면, 그 사람은 죄 없는 평범한 인간이 맞습니다.”

현시우는 문득 현하빈을 떠올렸다. 좀 얄미운 동생, 때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종잡을 수 없고…… 평범한 인간도 아니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인간이 평범하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래도 죄 없는, 평범하고 싶어 했던 애는 맞잖아요.’

[크흠…….]

아무 대꾸도 못 하는 네아이바를 뒤로 하고 현시우는 이어 말했다.

“아직 감이 안 오실 수도 있겠죠.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 인간이 만약 여러분의 동료나 가족이라면 어떨지.”

현시우의 가면이 적발의 남자, 카터를 향했다. 카터는 딸꾹, 하는 소리를 냈다.

“이 퀘스트가 버젓이 수행되고 나면, 그다음은? 보상이 큰 ‘살인 퀘스트’가 또 주어지면, 그것을 이유로 살인을 할 겁니까? 매번 그 인간의 목숨 가치를 저울 위에 달아 잴 겁니까?”

인간의 목숨은 함부로 잴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퀘스트는 어떤 이유이든 간에 절대 안 된다.

‘이 정도면 나름 정의감 넘치는 명분이 되겠죠. 좀 ‘피데스’답습니까?’

[……뭐, 그럴듯하네.]

현시우는 말을 끝맺었다.

“이 퀘스트는, 애초부터 수행, 아니, 논의되어서조차 안 됩니다.”

“…….”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동의합니다.”

바로 그 순간. 정적을 가르고, 단호하게 동의를 표하는 목소리.

모두들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 있던 금발의 여자.

솔라리스 길드 마스터, 채지세가 한 손을 들고 있었다.

“피데스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 이 퀘스트는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 외에도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갈등하는 눈빛으로 채지세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채지세가 동의를 하다니……!’

여기 참여한 랭커들도 다 알고 있었다. 솔라리스의 채지세가 투자의 귀재라는 것.

분야를 막론하고 그녀의 선택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소문. 이미 헌터들 사이에서도 그 사실은 아주 유명했다.

“저,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그 말이 맞는다면, 처음으로 나타난 가장 비인간적인 퀘스트 아닙니까?”

“이런 것에 대한 규정이나 기준을 미리 만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퀘스트 수행에 처음부터 반대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있던 다른 인원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퀘스트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던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던 다른 수많은 대표와 헌터들이었다.

채지세의 곁에 앉아 있던 강태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또한, 퀘스트가 잘못되었다 생각합니다.”

“…….”

순간 강태서에게 몰리는 시선들.

채지세도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회의 내내 줄곧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왠지 이번에도 허를 찔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 *

“……그래서 ‘기만의 수호자’ 퀘스트는 이제 다들 함부로 시도하지 않을 거야.”

회의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채지세는 지석에게 조심스럽게 그 내용을 공유했다.

“피데스 님이 직접 나서서 막다니. 하빈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의외네. 그분이 나서실 줄이야?”

채지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세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피데스는 본인이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안다고 했어.”

“누군지 안다고? 현하빈의 정체를 피데스 님도 안다는 뜻이야?”

“그렇게 말은 하던데…….”

채지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한편으로, 피데스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해. 그분 말로는, ‘기만의 수호자’는 평범한 사람이랬거든.”

“평범……?”

채지석이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현하빈에 대한 회상이 촤르륵 지나갔다.

거울 던전에서 몬스터 군단을 홀로 쓸어 버리고, 아주 강력한 성좌와 용을 데리고 다니던 현하빈.

“평……범이라.”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게 평범이면 이 세상에 평범한 인간은 다 죽었다며 답답해서 가슴을 칩니다!]

평범한 인간…….

채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가 말을 이었다. 확신이 담긴 어조였다.

“피데스 님이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어딜 봐서 현하빈이 평범해? 잘 모르시면서 그냥 말한 거 아냐?”

“그치, 피데스가 헛다리 짚은 거 같지?”

지세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우리 하빈이 일이니까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왔어. 혹시 모르잖아.”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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