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남매의 법칙 (3)
채지세는 재빨리 라이센스를 확인받고-충격으로 굳어 있는 천사라 대신, 김우진이 면허증 검토를 대신 해야 했다-얼른 하빈을 향해 달려갔다.
“하빈아!”
“언니! 언니가 여긴 무슨 일이야?”
“지나가다 들렀지! 겸사겸사 요즘 어느 브랜드에 투자할지도 보고 있고.”
둘은 지난번에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완전히 말을 놓기로 했다. 당연히 어색함 따윈 없다. 둘은 최소 10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였다.
채지세가 주변을 휙 둘러보며 물었다.
“쇼핑했구나? 어땠어? 맘에 드는 건 있고?”
“어. 여기 쇼퍼님이 되게 잘 알려주셨어.”
하빈이 유지희를 소개하며 말했다. 두 거물급 헌터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유지희가 방긋 웃었다.
“아닙니다, 현하빈 헌터님의 안목이 워낙 좋으셔서 안내가 수월했습니다.”
“하하, 그렇죠? 역시 사람 볼 줄 아신다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마침 그 옆에서 천사라가 우물쭈물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정말 다가오고 싶은데,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저 손님이 하필 채지세의 지인이었다니!’
끼고 싶지만 함부로 낄 수가 없다. 현하빈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이 뒤늦게 생각나서 천사라는 새까맣게 속만 탔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세는 하빈에게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래? 뭐 샀어?”
“구름새의 털실 소재로 만든 옷이 갖고 싶었는데…….”
하빈이 천사라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천사라가 찔린 듯 흠칫 물러섰다.
“처음에는 없다고 하길래 헛걸음한 줄 알았어.”
“……없다고 했다고?”
채지세의 표정이 굳었다. 하빈이 천사라를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저분이 잘 모르셨나 봐.”
하빈이 천사라에게서 눈을 뗐다.
“다행히 여기, 유지희 쇼퍼님은 있다고 하시더라고. 여기선 이분이 제일 잘 알고 계신가 봐. 맞죠?”
“과찬이십니다.”
“아, 그런 게 있었구나. 나도 쇼핑하면 이분한테 부탁드려야겠네. 쇼핑만 하면 그 많던 시간이 다 증발한다니까.”
둘의 대화를 듣던 천사라는 분통이 터졌다.
‘몰라서 없다고 한 거 아니거든? 있는 거 아는데 알려주기 싫어서 그냥 없다고 대답했던 거였는데. 이걸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하빈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그냥 없다고 대답했던 게, 역으로 천사라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아마 저분이 잘 모르시나 봐.’
그렇다고 변명할 수도 없다. 천사라는 본인 입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아, ‘구름새의 털실’ 라인이 있었군요? 저는 그 부분을 잘 몰랐네요. 아무래도 유지희 씨가 더 잘 아시는 것 같으니 유지희 씨한테 맡기세요.’
‘이걸 어쩌면 좋냐고!’
천사라가 애꿎은 속만 태우고 있을 때.
“하빈아.”
“응?”
지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평소 하빈이 인정하는 눈치 백 단을 꼽으라면 곧바로 채지석을 1순위로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누나인 채지세 역시 눈치로는 절대 어디 가서 뒤지지 않았다.
지세는 하빈이 쓴 낡은 캡모자와 때 탄 캔버스백을 확인했다. 옷과 신발은 방금 사서 신고 나온 것이 분명한 새것.
“쇼핑백 잠깐 봐도 될까?”
하빈의 허락을 맡은 지세가 살짝 쇼핑백들을 훑었다. 새 물건이 든 쇼핑백도 있었지만, 낡은 신발과 맨투맨이 든 것도 있었다.
현하빈은 이걸 입고 여기 들어왔을 것이다.
낡은 맨투맨, 캡모자, 구겨진 운동화, 때 탄 캔버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했다.
‘……이것 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채지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천사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쇼퍼님, 성함이 뭐죠?”
“처, 천사라입니다.”
“혹시 천사라 쇼퍼님이, 하빈이한테 구름새의 털실 소재 옷이 없다고 했나요?”
“어, 음…… 네.”
“왜죠? 설마 진짜 몰랐을 리는 없는데.”
채지세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 사르르 눈웃음을 짓던 것과는 달리, 누가 봐도 차가운 눈빛이었다.
“구름새의 털실 소재, 어느 명품관이든 간에 특별히 관리하는 고가 라인 소재일 텐데요. 그걸 몰랐다면 쇼퍼 자격 박탈 아닌가요? 진짜 몰랐다고요?”
“그게…… 사실 구름새의 털실이 워낙 고가인 데다가…….”
“그러니까 알았다는 건가요, 몰랐다는 건가요?”
잔뜩 코너에 몰린 천사라는 결국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죠?”
‘망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천사라는 재빨리 현하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 허겁지겁 끄려는 모습 같았다.
‘무조건, 무조건 사죄밖에 답이 없다! 일단 살고 봐야 해!’
빈털터리로 봤을 때는 고개 숙이는 게 힘들었지만, 거물인 걸 안 이상 그쪽을 향해 고개 숙이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천사라는 거듭 고개를 숙였다.
“현하빈 헌터님, 늦었지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짐꾼이신 줄 알고 오해하는 바람에…… 미처 몰라뵙고…… 정말 죄송합니다.”
‘대단한 분을 미처 몰라뵈었다.’
‘정말 죄송하다.’
이 레퍼토리는 천사라의 경험상, 웬만해서 먹혔다. 진상들에게도 ‘대단한 분’이라 칭하며 격이 다른 취급을 해 드리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리곤 했으니.
그러나 하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저 짐꾼이었던 거 맞는데요?”
“……네?”
“몰라본 거 아니에요. 제대로 봤다고요.”
“아…….”
천사라는 줄곧, 하빈을 짐꾼인 줄 오해해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논리를 펼쳤다.
현하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잠깐만. 그럼 그쪽 말은, 내가 짐꾼이면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잖아요?”
“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으음, 왜 내 예전 직업을 무시하시는 거지?”
하빈은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핏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만, 한편으로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알바생 시절 하빈은, 급하게 뛰다가 여기서 미끄러질 뻔한 적이 있었다.
다칠 뻔했다거나 위험했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다시 정신없이 달려야 했던 짐꾼이자 배달 알바생 시절.
그건 모두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나날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추억이 남아 있는 집을 대출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그날 하루 자신의 끼니를 때우기 위해.
오늘처럼 화려하게 플렉스를 저지르거나 보란 듯이 헌터 자격증을 보여줄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치열했기에, 누구보다 당당했고 빛났던 순간이다.
“나는 그게 하나도 부끄럽거나 무시 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천사라 쇼퍼님이 보기엔 보잘것없었나 봐요?”
“아, 아,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천사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결정적으로 실수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 * *
“……그래서 어떻게 됐어?”
채남매네 집.
지세에게 이야기를 한창 전해 듣던 채지석이 궁금한 듯 물었다.
지세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사과는 제대로 받았고, 너도 알다시피 사실 내가 그쪽 백화점 대표랑 아는 사이잖아. 슬쩍 흘려주니까 알아서 재정비를 잘 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지.”
그녀가 흐뭇한 얼굴로 폰을 켰다.
“그리고 하빈이 덕분에 좋은 쇼퍼님을 알게 되었다니까! 유지희 쇼퍼님. 일도 깔끔하게 잘하시는 데다 능력 있고, 친절하시고. 보면 볼수록 탐이 나서 우리 명품관에 와달라고 몇 번 제안 드렸어.”
“그랬더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워서 거절하시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슬슬 넘어오고 계신 것 같아. 헤드헌팅 성공을 빌어 줘. 꼭 영입하고 말 테니!”
유지희 영입에 열을 올리는 채지세를 뒤로하고, 지석은 거실에서 태평하게 TV를 보고 있는 하빈을 건너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하늘색 후드티가 눈에 들어왔다.
저 옷, 아쥬얼에서 샀다고 했던가.
“그나저나 현하빈, 옷을 전부 아쥬얼에서 산 거야? 우연이네. 아쥬얼, 누나가 눈여겨보던 브랜드라며.”
“그렇지.”
“왜 하필 아쥬얼이야? 다른 브랜드도 많은데.”
채지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전부터 지켜보던 특이한 투자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번에 아쥬얼에 투자했더라고.”
“……특이한 투자자?”
채지세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석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래?”
“익명 투자자라서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채지세가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번에 아쥬얼에 투자했다는 그 사람. 구름새의 털실을 좋아하고 오염 방지 효과까지 넣으라고 지시했다는 익명의 투자자.
“그 인간, 투자를 너무 잘해. 거의 나를 따라잡을 만큼.”
“뭐……?”
그 말에 채지석이 깜짝 놀랐다.
“누나를 따라잡을 정도라니, 일반인이 그러는 건 불가능할 텐데? 우린 예지 스킬을 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 인간도 우리처럼 예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소설 속에나 나오는 회귀자라거나?”
“에이, 세상에 회귀자가 어딨어.”
“……그치? 나도 농담으로 한 소리야.”
그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거실 쪽에서 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저 가면마법사!”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살짝 높은 목소리. 궁금증이 생긴 채지석이 거실의 TV를 보았다.
“가면마법사……?”
하빈이 보고 있던 건 뉴스 채널이었다. 화면에는 가면을 쓴 피데스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채지석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데스 님이네? 오늘 찍은 영상인가 봐. 못 본 인터뷰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저 가면마법사, 나랑 똑같은 옷을 입었잖아!”
때마침 화면 속 피데스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아, 이 옷이요? 제 취향에 맞는 옷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브랜드인데…….
채지석은 무심코 피데스의 옷을 보았다. 브랜드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아쥬얼의 구름새 털실 라인 하늘색 후드티였다.
그리고 하빈이 입은 것도.
……아쥬얼의 구름새 털실 라인 하늘색 후드티.
채지석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커플룩이네.”
“악!”
그 단어에 하빈이 질색하자 채지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피데스 님이랑 커플룩인 게 어때서?”
“싫어!”
“?”
피데스.
월랭 1위. 세계를 구한 영웅. 정의로운 마법사.
그런 어마무시한 타이틀들을 가진 피데스는 단연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그는 헌터 한 명이 갖는 인기와 인지도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세계적인 셀럽이었다. 국경을 초월한 영향력, 강력한 팬덤은 덤이었고.
그 덕분에 그가 무슨 옷을 입었다 하면, 그 제품은 전 세계 모든 온, 오프라인 매장에서 싹 품절되곤 했다. 중고는 몇 배나 가격이 뛰었으니 말 다했지.
“좋은 거 아니야? 방송 탔으니까 이제 돈 있어도 구하기 힘들 텐데. 핫한 아이템 미리 선점한 거니까 좋잖아?”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으음, 아니야.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 찜찜해.”
가면마법사, 왜 하필 색깔까지 똑같은 걸 입어서는.
“저 가면쟁이…… 역시 하나하나 걸린단 말이지.”
하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언젠가 저 가면, 확 다 벗겨버리고 말 테다!”
채지석이 놀라서 끼어들었다.
“야아, 피데스 형님한테 왜 그래? 좋은 분이신데!”
“뭐야, 채씨. 저 가면마법사랑 아는 사이야?”
하빈이 돌아보자 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나도 실물로 종종 봤지. 나 이래 봬도 솔라리스 부길마인데.”
그가 멋쩍게 흠흠, 헛기침을 했다. 하긴, 너무 자주 봐서 잊고 있었는데, 채지석도 꽤 유명한 헌터였지. 저렇게 자랑하는 거 보니까 왠지 더 일반인 같네.
어쨌든.
“어디서 봤는데?”
“국제적인 헌터 회담 같은 데 가면 뵐 수 있는데, 정말 좋은 분이셨어. 나도 나름 존경하는 분이거든.”
“뭐……? 존경?!”
그 단어에 하빈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채지석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아 왜, 너도 우리 누나 팬이라며! 사람이 롤모델 정도는 있을 수 있지. 월랭 1위에 업적도 셀 수가 없고, 명언도 많고, 나 초보때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알고 보면 진짜 멋진 분이야.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걸? 근데 왜 그렇게까지 경계를 하는 거야?”
하빈이 끄응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팔짱을 끼었다.
“왜 그러는데?”
“그냥.”
“그냥?”
TV 속 피데스를 노려보며 하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가면은 볼 때마다 묘한 익숙함과 배신감이 든단 말이지.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냐고? 그러는 채 씨야말로 아무나 믿지 마. 이 험한 세상,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