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남매의 법칙 (2)
결국 엘레메스에서 옷을 고르지 않고 빈손으로 나오는 하빈.
하빈은 단지 현시우와 같은 옷을 고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지만,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천사라는 웃음을 지었다.
‘거봐, 금액 보고 놀라서 못 사고 나온 거지? 빈손이잖아.’
“천사라 씨,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요?”
뒤늦게 합류한 다른 쇼퍼, 김우진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헛기침을 한 천사라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 * *
“아쥬얼에서는 꽤 많은 제품이 ‘구름새의 털실’ 소재를 썼어요. 보여드릴 게 많아 기쁘네요.”
유지희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하빈에게 카탈로그와 몇몇 제품을 가져왔다.
후드티와 후드집업은 물론, 츄리닝과 맨투맨까지. 아쥬얼에서 제작한 옷은 실용성 있는 디자인이 꽤 많았다.
“방어력이나 스킬 저항 옵션도 제대로 들어가 있답니다. 이 제품은 마법 공격을 완충시켜 주고, 이쪽 제품은 독에 내성이 있어서 닿아도 녹지 않아요.”
“오…….”
어차피 방어력을 올려줘 봤자 현하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옷들을 본 하빈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이거 엄청 좋은데?”
“네?”
“완전 내 스타일!”
하빈이 옷을 집어 들었다. 아쥬얼의 옷은 엘레메스보다도 훨씬 하빈의 취향이었다. 특히 디자인이 그랬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무심하면서도 깔끔한 핏.
적어도 디자인 하나만큼은, 현시우가 집에 가져온 명품들을 다 합쳐도 이게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안감은 전부 구름새의 털실 소재로 만들어졌어요. 제가 듣기로 이번에 아쥬얼의 브랜드에 투자한 분이 구름새의 털실을 유독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이번 라인에 특히 공을 들이셨다고.”
“뭘 좀 아는 분이네.”
하빈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아쥬얼의 투자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하빈이 안감에 손을 넣자, ‘구름새의 털실’ 소재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착 감싸 안았다.
정말로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을 주듯 부드럽고 산뜻한 질감이었다.
“게다가, 이 옷에는 오염 방지 효과와 항균 효과가 부여되어 있다고 해요. 웬만해서는 더러워지지 않을 거예요.”
“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천잰가?”
언제나 세탁에 귀찮음을 겪던 살림꾼 하빈이 극찬했다.
“이번에 투자한 그 익명 투자자분의 특별 요구였다고 해요.”
“그분, 진짜 누구신지 몰라도 정말 배우신 분이네.”
저가 브랜드는 의류 아이템에 굳이 항균 효과나 오염 방지 효과를 넣지 않는다.
효과에 비해 드는 재료와 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간단해 보여도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제작 스킬이다. 효과 하나에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제작비는 아무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방어력을 올리기만으로도 벅찬데 뭐 하러 항균 효과까지 부여하고 있겠는가?
명품 브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룩 방지와 항균 효과라니, 애초에 그런 용도는 너무나도 ‘실용적’이다.
애초에 명품 제작계 브랜드 제품을 사는 사람들이 세탁을 걱정할 일은 없다. 더러워지면 전문 샵에 맡기거나, 새로 사면 된다.
명품 브랜드지만 그 어느 곳보다 실용성을 극대화한 아쥬얼의 옷들. 하빈에게는 아주 취향 저격이었다.
‘이거 사면 세탁은 자주 안 해도 되겠지? 개꿀.’
[그래도 세탁은 자주 해야 된다! 냄새는 안 나겠느냐?]
‘그런가?’
고심하던 하빈이 조심스레 물었다.
“흐음, 그럼 이거 항균 효과 있으니까 자주 안 빨아도 냄새 안 나죠?”
“……아, 안 날 겁니다.”
“완벽해. 그럼 혹시나 체액이나 피 튀어도 냄새 안 배겠다. 얼룩도 안 지고. 그쵸?”
“그렇……죠.”
“지난번에 옷에 안 튀게 하려고 좀 신경 쓰느라 힘들었다니까. 완전범죄 굿.”
“…….”
킬스크린 26층에서 몬스터와 황마로 일당들을 처리할 때.
하빈이 대충 때리긴 했지만, 사실 그 와중에도 옷에 흔적 안 남게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관자놀이에 한 방울 튄 건 좀 아찔했지만 말이야. 채 씨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더라니까.’
무슨 무슨 틴트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이래서 눈치 빠른 예언자는 위험해.’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스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곁에 있던 다른 명품관 직원들이 수군댔다.
‘피? 체액?’
‘완전범죄?’
‘무, 무슨 질문이 다 저러셔요?’
‘이번 헌터님도 보통 손님이 아니신가 보네요…….’
수군수군.
그들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하빈의 곁에 있는 유지희를 바라보았다.
‘누가 담당하나 싶었더니, 역시 유지희 쇼퍼님이네요.’
‘손님 안 가리고 다 받으신다던데. 고생이 많네.’
‘오늘은 천사라 쇼퍼도 있었다면서요? 천사라 쇼퍼가 안 따라붙은 걸 보면, 이 손님은 돈이 없나 보네요.’
‘맞아요. 천사라 그 인간, 돈 냄새 하나는 잘 맡잖아요. 돈 많은 손님이었으면 냅다 달려들었을 텐데…….’
명품관 사람들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유지희와 천사라의 손님 응대 스타일. 그들이 술렁술렁 눈빛을 주고받을 때였다.
바로 그 순간,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마음에 들었던 하늘색 후드집업과 흰색 운동화를 딱 집어 든 채였다.
“그럼 저, 이거 입고, 이거 신어 볼게요.”
“네, 탈의실은 이쪽입니다.”
유지희가 안쪽 탈의실로 하빈을 안내했다.
그 광경에 주변 직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구름새의 털실 라인인데 입어 보신다고?’
‘가격표 안 보셨나?’
‘유지희 씨가 데려온 걸 보면 구매력이 없는 손님일지도 모르는데, 구름새의 털실 라인 입혀드려도 돼요?’
‘원칙상 입어 봐도 되긴 한데…….’
‘항균이랑 오염 방지 효과 있으니까…… 손때는 덜 타지 않겠어?’
긴장과 섣부른 추측이 오가는 한가운데. 끼익, 하고 탈의실의 문이 열렸다.
“좋아, 딱 맞네.”
몸에 꼭 맞는 아늑한 착용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핏.
구름을 걷듯 산뜻하게 발을 감싸는 착화감까지.
모두 잘 맞는 것을 확인한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 어울리시네요.”
곁에 있던 유지희가 말했다. 다른 직원들은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뭘 하려나, 사진이라도 남기려나?’
그동안 그들은 수많은 유형의 손님들을 봐왔다.
명품을 갈아입고 인증샷만 찍고 가거나, 브이로그 영상만 찍고 사라지는 헌터들도 수두룩했다.
게다가 최고가인 구름새의 털실 라인이니, 충분히 그런 용도로 보여 달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렇게 입어놓고, 정작 사지도 않으면서 영상만 올리는 사람도 있다고!’
구매 없이 뮤튜브에 ‘00브랜드 최고가 라인 입어봄, 가격 실화? 솔직 후기!’ 이런 썸네일 영상만 올리는 헌터들도 몇 있었다.
모든 헌터들이 부자는 아니란 걸, 직원들은 많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떠올린 한 직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고객님, 허가 없이는 매장 사진이나 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요.”
“영상? 영상 안 찍을 건데요?”
하빈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네?”
다시 옷걸이를 향해 걸어온 하빈이 늘어져 있던 옷을 하나하나 집어 들었다.
츄리닝, 맨투맨, 후드티, 후드집업, 여러 종류의 바지와 겉옷, 심지어는 잠옷과 양말까지 골라낸 하빈이 유지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거 전부 구름새의 털실 소재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럼, 지금 제가 입은 사이즈로 다 구매할게요.”
“……네?”
그 말에 일순 매장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 이거 전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끼어들었다. 하빈이 이어 말했다.
“입고 온 맨투맨이랑 신발도 같이 쇼핑백에 넣어주세요. 지금 입은 거 그대로 입고 갈 테니까.”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야?’
‘이걸 다 산다고? 전부?’
‘저게 다 얼만지는 아는 건가?’
다들 얼어 있을 때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유지희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그녀가 생긋 웃음을 지으며 계산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벙쪄 있는 계산대 직원들을 확인한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 * *
‘뭐, 뭐야? 뭘 산 거야? 쇼핑백이 왜 저렇게 많이…….’
아쥬얼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하빈과 유지희.
유지희의 손에 들린 아쥬얼의 쇼핑백들을 본 천사라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저건…… 그냥 쇼핑백도 아니잖아!’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아쥬얼의 푸른 쇼핑백이었다.
저건 특별 한정판을 샀을 때만 담아 주는 쇼핑백이다. 푸른 바탕에 홀로그램 은박까지 새겨져 있는, 한정판 쇼핑백.
저 쇼핑백을 얻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한정판과 최고가 라인을 지르는 부자들도 있기 때문에 천사라는 그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저게……! 저 한정판 쇼핑백을…… 저 정도로 많이 샀으면 대체 얼마야?! 웬만한 거물급 손님들도 한 번에 저렇게까지 지르시는 분은 드문데!’
대체 정체가 뭐냐고!
천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떨었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저걸 전부 다 산 게 맞는다면, 올해 실적은 유지희에게 완전히 밀린 셈이었다.
‘나, 난 제대로 했다고, 내 방법은 틀리지 않았어.’
현하빈을 놓친 것은 천사라의 패착이 맞다.
그건 뼈아픈 사실이었다. 그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천사라가 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천사라 씨! 제가 방금 주차팀 쪽에서 연락 받았는데, 저희 지금 비상이랍니다.”
옆에 있던 김우진이었다. 큰일이라도 난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어? 비상?”
“지금, 채지세 헌터님이 명품관 쪽으로 오고 계시다고…….”
“뭐?”
채지세.
그 세 글자에 놀란 천사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채, 채지세? 내가 아는 그 채지세라고?’
헌터계의 전설. 솔라리스의 수장! 국민힐러 채지세!
‘무엇보다, 헌터 중에서 재력을 따지자면 비공식 1위라던데! 피데스를 유일하게 재산으로 꺾을 수 있는 투자의 천재, 헌터 재벌이라던……’
“그 채지세 님이 맞으셔?”
“네? 네. 솔라리스의 채지세 님이 맞답니다. 어떡하죠? 저희 백화점에 처음 방문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 급의 거물은 처음이셔서……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됐어! 나한테 맡겨!”
그 소식에, 한껏 가라앉아 있던 천사라의 기분이 다시 수직 상승했다.
‘이건 기회야! 윗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천사라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슬쩍 유지희와 현하빈 쪽을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방금 온 거물을 못 알아보았다고 후회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닌가?
‘여기 더 대단한 거물이 올 거거든. 무려 재벌 헌터 채지세라고!’
현하빈을 유지희한테 넘겨주길 정말 잘했다. 천사라가 뿌듯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역시 자신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 돈이 안 되는 손님은 보내고 가려 받아야, 지금처럼 채지세 같은 진짜 거물급을 맡을 수 있다.
‘항상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
천사라가 유지희 쪽을 돌아보며 슬쩍 웃었다.
‘유지희, 너는 그 힘숨찐 손님이나 잘 받고 있어라. 난 무려 채지세 님을 영접할 테니!’
천사라가 다시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세를 잡았다. 이미 채지세에 대해서도 꼼꼼히 조사한 상태였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언젠가 만나 뵙는 게 꿈이었다고. 게다가 투자와 사업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니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어. 잘하면 스카웃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채지세는 이 작은 백화점의 명품관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명품관을 몇 개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잘 보여 놓으면 그곳으로 이직을 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쇼퍼로서 채지세를 만나는 건 가히 로또 당첨에 비할 기회가 아닐까.
설렘으로 가득 찬 그녀의 시야에 때마침 저 멀리서 금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심플한 옷차림이지만 숨길 수 없는 아우라, 콧등 위에 느슨하게 걸친 선글라스까지.
“채지세 님!”
천사라가 들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음?”
천사라를 발견해서일까, 채지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채, 채지세 님……?”
하지만 천사라는 곧, 지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그 너머 뒤쪽을 향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지세의 시선은, 천사라의 뒤, 바로 현하빈과 유지희를 향해 있었다.
현하빈을 발견한 지세가 세상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해맑게 외쳤다.
“하빈아아아!”
“어? 지세 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