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남매의 법칙 (1)
“수선실은 저쪽이에요. 그쪽, 짐꾼 맞죠?”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홱 고개를 돌린 천사라. 하빈을 향해 까딱까딱 수선실로 가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것이냐? 저 손짓은 무엇이냐? 우릴 무시하는 것이냐?]
‘오, 잘잘이.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꽤 있네?’
[나 때도, 괜히 거들먹거리는 망나니들이 저런 손짓을 했느니라! 그리고 짐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예전에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나 봐.’
하빈은 명품관 구석에 박혀 있는 수선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때 저곳을 들락거렸던 추억이 있다. 짐꾼 알바할 때. 추가금이랑 배달비 주면 어디든 달려갔던 시절이다. 딱히 그때가 부끄러웠다거나 특별히 불행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은 다른 목적이다.
하빈은 팔짱을 꼈다.
“수선실? 저 수선할 거 없는데요?”
“그럼 왜 오셨죠?”
사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빈이 갈 곳은 당연히 수선실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오늘은 짐꾼 아니고. 손님이라서.”
“손님?”
천사라가 하빈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짐꾼이었으면서, 손님이라니?
“아, 그럼 라이센스는 있으신 거죠? 여긴 헌터 전용관이니까요.”
“사라 씨!”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지희가 다급하게 나섰다.
그녀가 하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사라 씨가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되어서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대신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하, 이쪽은 또 뭐라는 거야?’
천사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곱씹어볼수록 어이가 없는 발언이었다.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실수했다고?’
유지희가 천사라보다 훨씬 오래 근무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봤자 유지희는 만년 꼴찌 실적에 제자리걸음. 진급을 못 해서 직급으로는 천사라와 동급이다.
직급이고 뭐고 다 떠나서 능력만 따지자면, 이 명품관에서 천사라를 따라올 이는 없었다.
천사라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두고 봐. 잘 몰라서 실수한 건 아마 너일 걸? 쟤는 짐꾼 맞다니까.’
확인해 주면 잠잠해지겠지.
천사라는 하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식적일 정도로 나긋나긋 상냥하게 만든 말투였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 그래도 라이센스는 보여주셔야 출입이 가능하신데요.”
‘안 봐도 뻔해. 얘한테 라이센스는 없을걸?’
천사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각성자씩이나 되어서 말단 짐꾼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각성자는 소중한 인재다.
낮은 등급의 각성자라도 모셔가는 곳이 널렸다.
하지만 수선실까지 오가며 잡심부름을 하는 짐꾼이면, 짐꾼 중에서도 정말 말단 중의 말단이다.
그런 말단 짐꾼이 각성자였을 가능성은.
‘없어. 절대로 없다고.’
게다가 꼴을 보면 답이 나오잖는가.
지금 하빈이 입고 있는 낡은 맨투맨과 때 탄 캔버스백, 브랜드도 안 적힌 캡모자.
돈 없는 비각성자의 전형적인 예시 차림이었다.
‘아마 라이센스가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을걸? 적당히 망신 주고 돌려보내야지.’
아니나 다를까.
“……라이센스? 면허증 말하는 건가? 나 그거 어디다 뒀었지?”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천사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없으신가요? 없으시면 죄송하지만 그만 돌아가…….”
“이건가?”
스윽.
하빈이 대충 캔버스백을 한 손으로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조그만 카드지갑.
그건 길거리에서 파는 줄 달린 목걸이 카드지갑이었다. 학생들이 교통카드를 넣어 다니는.
‘저건 뭐야? 저걸 왜 꺼내?’
천사라가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중요한 라이센스를 교통카드 취급해서 저런 데 넣고 다닌다고?
그럴 리는 없다.
‘이 애, 라이센스가 뭔지도 모르는 거 아니야? 다른 거랑 착각해서 이상한 거 꺼내는 것 같은데.’
천사라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빈이 카드지갑에서 낑낑 뭔가를 꺼냈다.
“아 왜 안 빠져. 꼴 보기 싫어서 깊숙이 넣었더니 안 빠지네.”
[그렇다고 힘을 세게 주면 안 된다! 잘못하면 지갑이 터진다! 근데 그게 어땠기에 꼴 보기도 싫었던 거냐?]
‘등급이 마음에 안 들잖아! 내가 이것 때문에 무슨 고생이람! 난 C 급을 받고 싶었는데…… 아이C!’
슈욱!
카드지갑에서 마침내 빠져나온 작은 카드.
금빛으로 빛나는 헌터 면허증에는 분명하게 알파벳이 적혀 있었다.
A급.
하빈이 그것을 천사라의 눈앞에 갖다 댔다.
“이거 맞아요?”
“……어?”
면허증을 확인한 천사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무슨, 잠시만요.”
A급? A급이라고?
하다못해 E나 D급도 아니고 A?
‘말도 안 돼.’
이제껏 천사라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의 기억력도 마찬가지.
‘분명, 그때 봤던 말단 짐꾼이 맞는데…… 어째서, 어떻게 갑자기 A급이 되어 온 거야? 이게 말이 돼?’
당황한 천사라가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며, 면허증, 본인 거 맞으시죠? 다른 사람 거 가져오신 거 아니고요? 현하빈 씨가, 진짜 본인이 맞으신 거……!”
“천사라 씨!”
유지희가 기겁해서 천사라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화가 난 표정으로 사라에게 단호히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손님께 그게 무슨 무례인가요? 빨리 사과드리세요, 얼른!”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천사라가 면허증을 한 번, 현하빈을 한 번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를 악문 목소리였다.
그걸 본 유지희가 하빈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본인 확인 또 해야 하나요? 주민등록증도 꺼낼까요?”
“앗! 아뇨, 아닙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확인되셨습니다, 현하빈 헌터님.”
유지희의 대답과 함께 명품관 입구가 열렸다. 입구를 막던 가드들이 비켜서고 그 너머의 화려한 내관이 드러났다.
유지희가 하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 따로 있으실까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 *
하빈이 요청한 것은 다른 층과 동일했다.
‘구름새의 털실 소재로 만든 옷이요. 이왕이면 편한 디자인으로요.’
그 발언을 들은 천사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뭐? 구름새의 털실? 장난하나?’
구름새의 털실.
단언컨대, 현재 발견된 부산물 중에서, 의류 소재로 쓸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소재다.
명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한테만 알음알음 전해져 오는, 일반인들은 쉽게 접할 수도 없는 소재.
명품 제작계 브랜드들도 큰맘 먹고 구하는 재료고, 그 소재로 제작된 옷은 언제나 그 브랜드의 최고가 라인을 차지했다.
‘딱 봐도, 각성자 되고 나선 명품관 처음 와보는 것 같은데, 구름새의 털실 이야기 주워듣고 구경이나 해 보려고 온 모양이네.’
감히 구매할 능력은 안 될 테니.
천사라는 하빈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방금 전에는 예상치 못한 A급 라이센스를 보고 쫄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면허증에는 분명히 ‘연수생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정식 헌터가 아닌 연수생이란 소리잖아.’
A급이지만 초짜 각성자다. 아직 제대로 헌터 업무에 뛰어든 건 아니다.
‘그럼, 아직 모아둔 돈도 별로 없겠네. 괜히 쫄았어.’
다시 기가 살아난 천사라의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돈도 없으면서 구름새의 털실부터 보겠단 거야? 여기가 어디, 보고 싶으면 꺼내주고 맘껏 구경하는 그런 데인 줄 아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는 안 되지.
명품이라고 다 같은 명품이 아니다.
명품 중에서도 특별히 비싸고 귀한 건 더더욱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혹시라도 입어보다가 얼룩이나 손때 묻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거든.’
현하빈은 살 능력도 안 될 텐데,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여줘 봤자 때만 탈 테니.
계산을 마친 천사라가 냉큼 입을 열었다.
“구름새의 털실? 죄송하지만 그런 소재로 만든 옷은 없는데요.”
“없어요?”
하빈이 김샜다는 표정을 짓자 곁에 있던 유지희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뇨, 있습니다. 이번에 엘레메스와 아쥬얼의 몇몇 라인이 구름새의 털실 소재를 백 퍼센트 사용한 걸로 화제가 되었죠. 확인해 보시겠어요?”
‘눈치 없기는! 그걸 진짜로 얘한테 보여주면 어쩌자는 거야?’
진상 손님들은 옷에 보이지 않는 스크래치를 내거나, 찢거나, 얼룩을 만들기도 한다.
천사라가 보기에 하빈은 믿을 수 없는 손님이었다. 그녀가 질색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제 난 모르는 일이야. 책임은 전부 유지희가 알아서 지겠지.’
천사라가 모른 척 둘러댔다.
“아, ‘구름새의 털실’ 라인이 있었군요? 저는 그 부분을 잘 몰랐네요. 아무래도 유지희 씨가 더 잘 아시는 것 같으니 유지희 씨한테 맡기세요. 전 여기 있겠습니다.”
그 속이 빤히 보였기에, 유지희는 어이없다는 듯 천사라를 바라보았다.
‘천사라, 너 명품 라인이랑 소재는 누구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외우고 다닌다고 평소에 자랑을 그렇게 하더니?’
속으로 한숨을 내쉰 유지희는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이번에 처음 본 꼬마 손님. 현하빈에게도 그녀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당연하게.
그녀가 하빈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쪽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엘레메스부터 보실까요?”
* * *
“엘레메스 라인에서 나온 제품들은, 저희 백화점엔 이 정도가 전부인 것 같아요.”
결국 유지희랑 단둘이 엘레메스 매장에 들어온 하빈.
눈앞에 놓인 블레이저, 셔츠, 후드티, 후드집업.
그중 후드티와 후드집업을 확인한 하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미 있는데.”
“네?”
“……현시우가 이미 골라버렸어.”
그랬다. 엘레메스에서 나온 후드티는 이미 현시우가 샀던 제품이었다. 하빈이 첫날 현시우를 추궁할 때 본 것과 색상만 다르다뿐이지, 거의 같은 디자인의 제품.
게다가 옆에 놓인 후드집업은 하빈이 시우에게 빌려 입었던 제품과 비슷했다.
“으음, 커플룩은 안 돼. 우리 남매 룰이거든.”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릴 때부터 현하빈과 현시우는 똑같은 옷을 입고 밖에 나가는 걸 질색했다.
‘아, 현하빈! 그 후드티 뭔데? 내가 사는 거 따라 사지 말라고!’
‘뭐래. 난 그냥 산 건데? 오빠는 이거 언제 삼? 쓸데없이 취향 비슷해가지고선.’
‘아, 색깔이라도 다른 걸 사던가!’
‘내가 하늘색 먼저 좋아했거든? 오빠가 따라한 거임!’
‘아닌데, 내가 하늘색 먼저 좋아했는데!’
‘뭐래?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나라고!’
‘난데?’
‘나거든!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어쨌든 내가 먼저 좋아한 거 맞음! 난 돌잡이 때부터 하늘색 지구본 잡았다고 어른들이 그러셨음.’
‘아씨…… 나도 지구본 잡았는데, 늦게 태어난 거 짜증 나네. 어쨌든 서로 똑같은 옷 입고 밖에서 마주치지 말자.’
‘내가 할 소리다. 애초에 같은 옷 아니라도, 너도 나 밖에서 만나면 그냥 아는 척하지 마라.’
그때부터 확실하게 정해진 룰.
서로 똑같은 옷은 웬만해서 사지 않기.
혹시라도 샀으면, 밖에서는 동시에 입지 않기.
[……?]
아헤자르는 의문이 생겼다.
[서로 빌려 입는 건 되는데 같은 옷을 동시에 입는 건 안 되느냐? 정말 이상한 규칙이로고.]
‘씨이, 커플룩 입고 밖에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혹시 둘이 커플이냐고 물어본다고. 그거 묘하게 기분 나쁨.’
[…….]
남매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1순위 말이 있다면 ‘혹시 커플이세요?’ 가 아닐까.
어쨌든 현남매의 기준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