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한번 본 사람 얼굴을 다 기억하는 가게 사장님들을 보면 가끔 초능력자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빈은 현시우의 생존을 확인한 김에, 잘 세탁해둔 현시우의 옷을 개서 옷장에 넣었다.
“오빠 옷 빌린 건 이걸로 끝. 간만에 집에 왔으니 미뤄 뒀던 일을 해야겠어.”
[일? 네가 할 일이 있었느냐? 허구한 날 집에서만…….]
“쉿. 이제 내 옷을 살 거야!”
애초에 현시우의 옷을 잠깐 빌렸던 것도, 갑작스런 연수원 생활 때문에 옷을 제대로 구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드디어 병결을 냈으니, 이 틈을 타 나도 옷 좀 장만해야지.”
하루 종일 시간이 비는, 꿀 같은 병결 타임. 바로 지금이 적기였다.
옷 쇼핑을 할 최적의 타이밍!
하빈은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입었던 옷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실밥이 풀리고, 얼룩이 지고, 목 부근이 흉하게 늘어난, 안타까운 상태의 옷들.
돈을 아끼기 위해 새 옷을 안 사고 헌 옷만 열심히 돌려 입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
그중 가장 낡은 옷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옷엔, 얼룩과 함께 까슬까슬한 보풀이 잔뜩 달려 있었다.
“으으음……. 더 입기는 무리겠지?”
[무얼 말이냐?]
“뭐긴 뭐야. 이 옷이지.”
[옷? 걸레 아니었느냐?]
“뭐, 걸……? 에휴, 잘잘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준이라니.”
잘잘이가 걸레라고 할 정도면 말 다 했지.
더군다나 옆에 가지런히 놓인 현시우의 옷과 비교하자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보들보들 고급스러운 소재의 엘레메스 브랜드 옷들. 하필 그 옆에 있으니 하빈의 옷들은 정말 낡고 닳아서 초라해 보였다.
“으음, 그래. 다들 수고했어.”
토닥토닥 자신의 옷들을 다독여준 하빈이 차곡차곡 정리를 시작했다.
“이것들은…… 빨아서 잠옷으로 써야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알차게 옷들을 사용하려는 하빈의 발언에 아헤자르가 경악했다.
[무, 무엇이? 그 걸레짝을 입겠다고? 내가 거지인 척 암행을 나갔을 때 골랐던 옷보다도 낡았거늘! 이제 그만 그 옷들을 놓아주거라!]
“뭔 소리야. 아직 몇 달은 더 입을 수 있겠구만. 그치, 삐약아~?”
-삐이잇?
하빈은 몸을 부벼대는 리베를 쓰다듬으며 근처의 옷부터 개기 시작했다.
밝은 하늘색의 맨투맨. 이 옷은…….
‘우리 딸, 하늘색 좋아하지? 그래서 노란색도 있었는데, 일부러 이 색으로 골라 샀어. 어때? 마음에 들어?’
구멍 난 코듀로이 바지.
‘날씨가 아직 쌀쌀해. 골덴 바지가 지금 입기엔 따뜻하겠더라. 사이즈는 잘 맞니?’
이건 모두 5년도 더 된 옷들이다. 그 말은, 모두 게이트 사태 전에 산 옷들이라는 뜻이다.
“…….”
하빈의 회상을 들여다본 아헤자르는 머쓱해졌다.
[그래서 안 버린 것이었느냐?]
“……뭐래.”
그새 옷 정리를 마친 하빈이 다시 하늘색 맨투맨을 꺼내 입었다. 야무지게 캠버스백까지 챙겨 매고 캡 모자도 썼다.
“나가자. 빨리 다녀올 수 있을 거야.”
[…….]
“이젠 나 혼자서도 옷 잘 고르거든.”
* * *
[……분명, 빨리 다녀올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게?”
[그런데 왜 두 시간째 똑같은 곳만 빙빙 돌고 있는 거냐?]
“흐음.”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두 시간으로 안달을 내다니, 잘잘이의 인내심은 보기보다 꽤 약하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모든 검법의 기본은 인내심과 근성! 난 절대 지루하지 않느니라!]
‘그래. 내가 여길 좀 둘러보니까, 사려고 했던 종류가 헌터 전용 명품관에 가야만 나오나 봐.’
사실 처음부터 하빈이 원하는 건 정해져 있었다.
현시우가 빌려 줬던 후드티.
그건 구름처럼 가볍고 포근한 질감과 보들보들한 감촉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의 착용이었는데도 너무 편하고 좋았기 때문에, 하빈은 그런 느낌의 옷을 갖고 싶었다.
“그 후드티, 택에 달린 소재 보니까 ‘구름새의 털실’이라는 부산물로 만들었더라고. 나도 그 소재 옷이 갖고 싶어졌어.”
몬스터를 죽이면 아이템도 나오지만, 남은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도 많았다.
포션 제작 재료로 쓰이기도 하고, 실험, 공학, 의류나 가구, 주얼리 소재 등, 꽤나 다양한 분야에 쓰였다.
그래서 사체를 옮기는 짐꾼 알바마저도 생긴 것이다.
“‘구름새의 털실’은 내가 알바하면서 한 번도 못 접한 부산물이었는데.”
하빈도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백화점의 중고가 브랜드를 돌면서 물어봤었다.
“‘구름새의 털실’소재로 만든 옷은 없어요?”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그거 외국에서, 그것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라서 넣은 곳이 거의 없을 텐데?’
‘그게 뭐죠? 어디서 듣고 오셨어요?’
‘우리 브랜드는 0.003프로 정도 넣은 옷 있는데. 나머지 99.997%는 면 소재긴 한데 나쁘지 않죠.’
[그럼 사실상 안 넣은 것이 아닌가?]
‘구름새 스페셜 한정판 에디션으로 세 배 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어요!’
‘0.003%로요?’
‘네에. 0.003%로요!’
‘…….’
‘에이, 손님! 왜 그런 표정을 하세요? 금 넣은 술이나 금 넣은 화장품도 금가루 찔끔 넣고 황금크림, 황금술이라며 잘 팔리잖아요.’
‘…….’
그렇게 정보를 모은 결과. 한 점원이 유의미한 정보를 흘려 준 것이다.
‘아, 엘레메스 정도면 쓸 수도 있겠다! 간혹 희귀하거나 비싼 소재는 명품 브랜드가 그 지역이랑 계약 맺어서 선독점을 하거든요. 헌터 전용 명품관에 가보세요.’
“흠, 역시 답은 명품관뿐이라는 거네.”
돌고 돌아 결국 명품관.
마침 이 백화점에는 헌터를 대상으로 하는 명품관이 있었다.
하빈도 그곳을 종종 지나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명품관 수선실에서 긴급하게 몬스터 부산물을 요청할 때가 있었는데, 간단한 건 짐꾼 알바생이 던전에서 바로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빈도 가끔 그렇게 들어간 적이 있다.
“어디 보자, 명품관이…… 별관에 있구나. 한 층 더 내려가야겠다.”
층수를 확인한 하빈이 곧바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손님으로 가는 건 처음이네.”
* * *
J백화점 헌터 전용 명품관.
오늘 그곳을 담당하는 메인 쇼퍼는 유지희와 천사라였다.
둘 중 더 잘 나가는 쇼퍼라면.
‘당연히 나지!’
J명품관의 슈퍼루키.
천사라.
사라는 언제나 최고의 실적을 경신하며 이 자리까지 왔다.
보세 옷가게 알바로 시작해 명품 브랜드 계약직을 거쳐 J백화점에서 최고 판매 실적을 올리는 최연소 퍼스널 쇼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는 성공적 이직, 고속 승진.
그건 모두 천사라의 눈썰미와 기억력 덕분이었다.
한번 본 사람은 어떤 머리와 옷으로 나타나도 매번 정확하게 알아보는 대단한 눈썰미, 그리고 정확한 기억력.
그것을 바탕으로 천사라는, 거물급 손님들을 바로바로 알아보고 기억하며 손님들의 환심을 샀다.
‘앗, 00그룹 회장님이시죠? 저번에 뵈었을 때 JJ브랜드에 관심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미리 알아봤답니다!’
‘헌터님! 저 정말 팬이에요. 요즘 스트릿 패션 계열의 명품을 찾고 계시는 걸로 아는데, 맞으시죠? 이번에 D사의 신상이 딱 그런 느낌이거든요. 방어력 옵션도 예술이에요.’
덕분에 거물 손님들은 천사라를 무척 아꼈고, 그녀의 실적도 고공행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사라 씨, 언제나 단골손님들에게 신경을 쓰는 건 좋은데, 매뉴얼을 지켜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동료, 유지희는 항상 그 부분을 경계했다.
“다른 손님들이 계신데도 단골손님들만 먼저 챙기면 곤란합니다. 모두 다 같은 손님들이신걸요.”
‘허, 언제 그걸 봤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트집이야.’
“……제가 단골손님을 먼저 챙겼다고요? 이상하네. 저는 그런 적 없는데요.”
슬그머니 둘러대던 천사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매뉴얼 좋아하시네. 누가 그런 걸 다 지키면서 살아? 괜히 본인 실적이 나보다 처지니까 매뉴얼 지키라고 잔소리나 하는 거지.’
어차피 매출은 거물급 손님들이 다 올려준다.
방문할 때마다 구두, 옷, 가방, 우산, 목걸이, 심지어는 잠옷이나 속옷, 실용적인 용도가 하나도 없는 장식품까지도 안 가리고 싹 쓸어가는 거물 손님들.
그에 비해 일반인 손님이 큰맘먹고 가방이나 지갑 한 개 구매하는 걸로는 천사라의 실적을 채우기 한참 모자랐다.
‘일반인 열 명 상대하는 것보다 거물 한 분 상대하는 게 몇 배나 더 효율적인데. 뭐 하러 평범한 손님들까지 애를 써야 하지?’
“천사라 씨. 저쪽에 손님 오고 계신 것 같은데요.”
마침 오늘도 유지희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사라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답답하게 사니까 저 연차가 되도록 나랑 동급인 거 아니야?’
유지희는 천사라보다도 훨씬 더 전에 입사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오래 근무했는데도 빠른 승진을 하지 못한 건 그 틀에 박힌 일처리 방식 때문이리라.
매뉴얼.
명품관의 기본 매뉴얼은 별다른 게 없었다. 다만, 이곳에 입점한 ‘아쥬얼’이라는 브랜드는 깐깐한 매뉴얼을 요구했는데, 자기네 브랜드가 입점하는 모든 명품관의 직원들이 정해진 규칙을 따라주기를 권고했다.
딱히 강제성은 없지만, 위반하는 매장은 당장 체인 계약을 해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절대 겉모습으로 고객의 구매력을 판단하지 말 것.
-헌터급 고객이든 일반 고객이든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은 절대 차별하지 말 것.
‘……‘아쥬얼’ 브랜드 설립자, 헌터물 덕후라는 소문이 있더니, 별 조건에 다 집착을 하네?’
헌터물이 대세가 된 요즘, 천사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건 전설처럼 내려오는 흔한 클리셰였다.
어느 날, 대단한 능력을 각성해 졸부가 된 헌터가 백화점에 나타나는데, 하필 예전에 입던 싸구려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거다.
후줄근한 겉모습을 본 직원들은 대놓고 무시하다가 결국 참교육을 당하는, 대충 그런 전개의 이야기였다.
천사라는 코웃음을 쳤다.
‘소설도 아니고, 그런 일이 왜 일어나?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서나 가끔 실제로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요즘은 대체 누가 그런 거에 당해?’
천사라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매일 헌터 랭킹의 변동을 알아본다.
혹시라도 갑자기 나타난 대단한 헌터님이 있으면 먼저 알아보고 깍듯이 모셔드릴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말이야, 헌터로 멋지게 각성했으면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어느 정도 갖춰 입고 백화점을 오겠다. 그게 뭐야? 그 유명한 ‘힘을 숨긴 찐따’ 코스프레라도 하나?’
웃기고 있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정도의 행동력이면 힘을 숨긴 찐따가 아니라, 힘을 숨긴 미친놈이겠지!’
“안녕하세요.”
“……?”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딴생각을 하던 천사라는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낡은 하늘색 맨투맨을 입은 소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냥 돈 없는 학생으로 보일 차림새.
‘뭐 부모님 선물 사려고 돈 모아 왔나? 어디서 저런 옷을 주워 입고 와서는…… 아!’
천사라는 번뜩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마침 옆에서 유지희가 소녀에게 친절한 미소로 말을 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이곳은 헌터 전용 명품관이라서요. 헌터 라이센스를 보여주셔야 입장이 가능하신데, 혹시 확인 괜찮으실까요?”
“지희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저 이분 알아요.”
“네?”
‘확실해, 난 저 애를 알아.’
천사라는 스스로의 기억력을 칭찬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얼굴. 분명 명품관 수선실을 드나드는 걸 봤다. 게이트 짐꾼 알바생으로.
확신의 미소를 지은 천사라가 까닥까닥 손짓했다. 누가 봐도 무시를 담은 손짓이었다.
“수선실은 저쪽이에요, 그쪽, 짐꾼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