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빛과 빚 (3)
채지석은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하빈이, 우리 누나 팬이라고?’
그럼, 하빈을 솔라리스 길드에 영입하는 게 더 쉬워지지 않을까?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같이 일하자고 하면 솔깃할 것 같은데.’
하빈이 팬심을 품고 있는 채지세가, 직접 길드에 영입하려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 생각을 채지석만 한 게 아니었는지, 마침 옆에 있던 그의 누나, 채지세도 하빈에게 제안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하빈 양 영입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몰라. 혹시 솔라리스 들어오지 않을래? 잘해줄게!”
“언니…….”
채지세의 상냥한 눈웃음.
사진이나 매체로 봤을 때도 아름답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직접 보니 정말 눈이 부신 미모였다. 그 비현실적인 얼굴에, 하빈은 우물쭈물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누나 잘하고 있어!’
언제나 단호하던 현하빈이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니. 이것만으로도 정말 커다란 수확이었다.
‘내가 그렇게 따라다녀도 전부 칼같이 거절했었는데, 누나가 말하니까 무려 고민을 다 하네.’
차별 봐라?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런 응원, 하나도 도움 안 되거든요?’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시무룩합니다.]
‘아무튼, 이럴 거면 처음부터 누나가 제안하는 게 빨랐을지도 모르겠다.’
채지석이 김샜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장아장 곁에 다가온 리베가 그를 위로했다.
-삐익삐익
하빈의 치즈케이크를 몰래 먹었는지, 리베의 입가에는 하얀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주인 닮아서 그런가, 얘도 입에 뭘 묻히고 다니네. 일루 와봐.”
-삐이
지석이 슥슥 리베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을 때였다.
마침 고민을 끝낸 하빈이 입을 열었다.
“언니. 제가 언니를 정말 좋아하는 거 알죠? 게다가 그 얼굴로 직접 제안까지 해주시다니, 솔직히 반칙 아니에요?”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 얼굴로 제안하는 게 반칙이래. 말도 너무 귀엽게 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못 들어가요.”
“어?”
한창 리베를 보고 있던 채지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빈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더더욱 못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원래 좋아하는 사람은 상사로 두는 거 아니랬어.”
하빈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인생을 살면서 배운 몇 가지 지혜 중 하나.
좋아하는 대상과는 비즈니스로 엮이면 곤란하다. 그 대상이 취미든, 사람이든.
‘철이 없었지. 스타리너스 커피 좋아한다고 카페에 취직했다는 자체가.’
오래 전, 짐꾼 일을 하며 만난 현하빈의 친구 박원두. 그가 남긴 진심어린 조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내가 스타리너스 커피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일도 재미있겠지, 하고 취직했어. 취직하면 내가 좋아하는 메뉴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캔커피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던 박원두는 아련하게 읊조렸다.
‘현실은 화장실 청소와 끝나지 않는 설거지, 일하다가 다친 여러 상처와 기가 막힌 진상의 콜라보……하하.’
‘…….’
‘이젠 스타리너스의 로고만 봐도 트라우마가, 으윽!’
박원두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스타리너스를 좋아할 수 없다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내 인생의 이유를 하나 잃은 거지. 밥보다도 더 자주 먹었던 스타리너스 커피…… 널 사랑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찬가지로 짐꾼 생활을 하며 스치듯 만났던 인물, 이아연.
그녀는 평일엔 연예인들이 자주 오는 샵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짐꾼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틈만 나면 샵에서 있었던 일들을 술술 풀어냈다.
‘아…… 제가 정말 좋아했던 연예인이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일적으로 만나게 되니까 스트레스야. 이번에 제가 해준 스타일링, 그분 취향이 아니었는지 기분 엄청 상한 기색이더라고요!’
‘그분 돌아가고 나서 저 원장님한테도 혼났어요!’
‘어쨌든 그분, 다음엔 저한테 머리 안 맡길 것 같아요. 내 최애였는데! 아악! 짜증나!’
스트레스를 담아 발을 구르고, 몬스터 부산물을 힘차게 들어 올리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넌, 좋아하는 건 절대 비즈니스론 엮이지 마라.’
‘좋아하는 사람을 절대 상사나 거래처, 손님으로 두지 마세요. 이건 저의 진심 찐 인생 조언.’
한 명은 인생의 이유를 잃었고,
한 명은 최애하는 연예인을 잃었다
[에잇, 고작 저런 걸 가지고 힘드네, 어쩌네 하기는! 하여간 요즘 인간들은, 쯧쯧.]
‘잘잘이, 왜 또 화났어?’
[별것도 아닌 걸로 조언이니 어쩌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나 때는 말이지, 서로 안 맞아도 치고받고 싸우면서 친해지고, 그랬단 말이다!]
‘어떤 점이 안 맞았는데?’
[뭐, 내가 뭐든 힘으로만 해결한다고 시비를 걸길래 대판 싸웠지! 힘이 아니면 무어로 해결한단 말인지, 쯧쯧.]
‘돈이나 머리를 쓰라는 뜻이 아닐까?’
[진정한 전사라면! 간교한 계책보다는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맞서야 하느니라!]
‘어, 그래. 둘이 안 맞을 만하네.’
[그래도 네아이바는 좋은 친구였다!]
“…….”
저 고집불통 김잘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현하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채지세를 바라보았다. 현하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저는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아요. 언니는 언니로 남겨두고 싶다고요.”
아무리 대단한 대우를 받아도 헌터 일은 일이다.
결국은 원하지 않는 순간에도 몬스터와 싸워야 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일. 아무리 예외나 특별대우를 해준다 해도 한계가 있다. 결국은 스트레스 받고, 언젠간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이.
그래서 솔라리스는 처음부터 강경하게 거절한 것이다. 처음 채지석을 알아보고 곤란해한 이유도 이 때문.
“언니를 직장 보스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하빈의 대답에 지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감동인데?”
지세는 하빈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그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런 이유라면 더 이상 우리 길드에 들어오라고 할 수 없지.”
“……누나?”
예상하지 못한 지세의 반응에, 채지석이 다급하게 지세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현하빈 영입해야 한다며?’
‘오늘부로 그 계획은 취소. 노선을 변경한다.’
‘노선 변경?’
‘일단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배워라, 동생아.’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지석과 지세.
마침내 결정을 내린 지세가 슬그머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하빈 양, 제안을 바꾸고 싶은데. 우리 그럼 편하게 언니동생으로 지내는 건 어때?”
“언니동생이요?”
“편하게 생각해. 나도 지석이만큼 재밌는 영화 많이 안다? 맛집도 많이 알고. 언니랑 같이…… 딸기 뷔페 갈래?”
“……!”
하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세가 웃으며 폰을 내밀었다.
“여기, 번호 찍어줘.”
* * *
집으로 돌아온 하빈.
하빈은 이왕 번호 교환하는 김에 채지세의 명함과, 언제든 집에 놀러 와도 된다는 허락까지 알차게 받아왔다.
‘지세 언니 번호라니!’
한국의 빛, 솔라리스의 수장!
게다가 귀찮은 길드 영입은 이제 더 안 한단다. 그저 호의로 건네받은 채지세의 직통번호!
하빈은 뿌듯한 얼굴로 침대 위를 뒹굴 굴렀다.
“이거, 예전에 같이 게이트 알바 했던 사람들이 알면 난리 나겠다.”
하빈이 떠올렸던 박원두와 이아연도 모두 채지세의 팬이었다. 다들 이 사실을 알면 까무러칠 것이다.
“으음, 걔네 요즘은 잘 살고 있으려나?”
마침 그들의 근황을 보러 하빈이 폰을 킬 때였다.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딸기 뷔페? 그것이 무엇이냐?]
대체 그게 뭐길래 지금껏 꿈쩍도 안 하던 하빈의 마음이 그 한마디에 흔들렸는지, 아헤자르는 그곳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 무, 물론 나도 딸기가 무엇인지 알고 뷔페가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둘을 합하면…….]
멈칫. 또 무시당할까 봐 눈치 보는 아헤자르. 그가 자신 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딸기를 무제한으로 먹는 곳인가?]
“오. 나 몰래 공부했어?”
[후…… 크흠. 이 정도쯤이야 척 보면 척이니라! 나 때는…….]
‘틀릴까 봐 조마조마했으면서.’
맞췄다고 다시 신이 나 라떼 타령을 하는 아헤자르. 하빈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긴 딸기만 나오는 게 아니야. 딸기 케이크, 딸기 아이스크림, 딸기 파르페, 딸기 오믈렛, 기타 등등 온갖 딸기를 활용한 맛있는 디저트가 무제한으로 나오는 뷔페라고.”
[호오……. 그런 생각을 해낸 인간이 있다니! 대단한 아이디어로다.]
“옛날부터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고, 바빠서 엄두도 못 냈어.”
당장 생활비도 없는 판에 디저트 가게는 무슨. 그럴 여유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하빈에게는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은커녕 은행이자 안 밀리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돈과 시간이 있다고. 딸기 뷔페, 꼭 가보고 말 거야. 그것도 버킷 리스트에 적어뒀거든?”
누군가에겐 소박한 버킷일지 몰라도 버킷은 버킷.
톡톡, 흥겹게 폰을 두드리며 카톡 채팅방을 주르륵 내리던 하빈은 어느 채팅방 이름에서 우뚝 멈추었다.
[현시우 새번호]
‘아, 이거 아직도 새번호라고 붙여서 저장해 놨네.’
[현시우]
이참에 이름을 바꿔준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기에 그날 이후로 집에 코빼기도 안 비쳐?”
하빈에게 멱살이 잡히고, 아헤자르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나간 현시우.
그 이후로 정말 놀랍게도 그는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빈이 옷 놔두고 갔다고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반창회 때 옷 빌리겠다고 말했었던 하빈. 그때 당시 둘은 이런 대화를 했었다.
오빠 옷 좀 빌림 ㅅㄱ
현시우 새번호
?
집에 옷 놔두고 갔는데
(사진)
오빠거아님?
현시우 새번호
아
ㅇㅇ
다음에 가지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