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6) (26/268)

026. 빛과 빚 (1)

카펫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운동장 크기의 거대한 비밀 공간.

그곳에 숨겨 놓은 것도 한창 연구 중인 무기들과 로봇 군단, 실험 장치들이었다.

[오오! 비밀 기지인가! 이런 엄청난 전력이 숨어 있었다니!]

아헤자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빈이 물었다.

“이거 길드 사람들도 알아?”

“하…….”

채지석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렇게까지 꽁꽁 숨긴 걸 보면 들키고 싶지 않았을 거다.

“……아무도 몰라. 기밀 유지 때문에 나랑 누나, 비서님만 알걸.”

채지석이 추가로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스르륵 올라왔다.

“그래, 이렇게 다 들킨 이상…… 그냥 구경이나 하고 가라.”

이제 비밀이고 뭐고 포기했는지, 한숨을 쉰 채지석이 대놓고 안내를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의 널찍한 공간에서는 갖가지 정비 로봇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무기나 탈 것, 비행 장치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 슈퍼히어로 나오는 그런 영화 같네.’

하빈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본 채지석이 미소를 지었다.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어때, 멋지지? 나, 이거 보여 준 거 들키면 누나한테 죽을 텐데, 그래도 한 번쯤은 외부인한테 보여주고 싶었다니까!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하던지.”

우리 집 지하에 이런 엄청난 연구소가 있다! 채지석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누나 작품이야. 이런 기계장치나 로봇 군단들, 전부 누나가 연구하는 것들이거든. 비밀리에 몬스터한테도 통하는 총기류와 무기들을 개발하고 있어.”

“누나 작품? 지세 언니는 사제 클래스라고 들었는데?”

하빈도 몇 번 TV에서 채지세를 본 적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치유 스킬은커녕 매번 특이한 장치나 가공할 화력의 무기들을 가지고 나와 적들을 쓸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제작계열 특수 직업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제 그녀의 공식 클래스는-

‘황금의 사제.’

“맞아. 힐도 잘 쓰지. 별명 중 하나가 국민힐러니까.”

유일하게 힐러와 딜러를 병행하는 특수 포지션. 힐러로 시작해서 딜러까지 섭렵한 케이스.

사람들은 채지세가 사용하는 무기 아이템들이 던전에서 얻은 희귀 아이템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모든 기술을 순수하게 본인 힘으로 개발한 거라고?”

하빈이 눈을 찌푸렸다. 정교한 로봇들과 미래에서나 볼 법한 비행 장치들까지. 한 사람이 혼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예지 능력을 쓴 거야.”

지석이 설명했다.

“나는 예지 능력치가 낮아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어떤지 대략적으로나마 아는 정도이지만, 누나의 경우는 자신이 원하는 걸 굉장히 디테일하게 알 수 있거든. 그래서 ‘기술 분야’에 예지 능력을 집중적으로 썼지.”

“기술이라면?”

“지금 이 광경, 미래 기술 수준 같지 않아? 말 그대로야. 누나는 예지를 사용해서, 앞으로 개발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과 기술들을 훔쳐 왔어.”

[세상에. 예지 능력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자는 처음이다.]

아헤자르가 감탄했다.

“대신, 혹시나 미래의 다른 사람의 발명 공적을 가로채는 행위가 될까 봐 모든 기술은 오로지 누나 혼자만 사용하고 있지. 외부에도 절대 공유하지 않는 지식들이야.”

위이잉-

하빈 곁을 지나가던 로봇이 멈춰 서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따라 인사해줘. 쟤가 저래 봬도 감정이 있거든. 무시하면 속상해해.”

말을 마친 지석이 시범을 보이려 로봇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철커덕.

채지석의 머리에 금빛 총구가 겨누어졌다.

“……!”

“내가 한동안은 허락 없이 연구실에 들어오지 말랬지?”

"……현하빈이 알아채서 그랬어. 보여 달라 그랬다고.”

갑자기 그들 사이로 나타난 긴 금발의 여자. 채지석과 닮은 외모와 우아한 목소리까지.

하빈도 익히 티비에서 보던 인물이었다.

채지세.

솔라리스의 길드장, 그리고 이 집과 지하실의 주인.

채지세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하빈을 돌아보았다.

“아. 하빈 양, 반가워요. 그동안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어요.”

“누나. 이제 와서 사람 좋은 척하기엔 이미 늦었어.”

지잉- 철컥.

지세는 말없이 총알을 장전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난 원래 좋은 사람인데.”

“……알겠으니 일단 내 머리에서 총은 좀 내려놓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남동생 머리에 총 겨누는 꼴이라니. 남이 알면 흉봐. 콩가루 집안이라고.”

“누가 흉봐? 있으면 데려와 봐.”

“데려오면? 지금처럼 똑같이 하게?”

지석의 물음에, 지세가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총과 무력은 아주 좋은 협박……아니, 협상의 도구지.”

“누나 직업 힐러거든? 그게 힐러가 할 말이냐고!”

“훌륭한 힐러는 아군이 피해를 입기 전에 적을 먼저 제거하는 법.”

“…….”

물론, 상위 랭커 채지석이 웬만한 총을 두려워할 일은 없었다.

비록 장난으로 겨누어진 총이지만, 채지석만큼은 그 위력을 잘 안다.

마법 방어 무시, 물리 방어 무시.최첨단 유도 기능이 추가된 특수 아이템. <천금의 섬광>.

채지세가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그녀가 다시 하빈을 보며 상냥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손님 대접을 잘했는지 모르겠네요. 하빈 양, 목은 마르지 않아요? 배는 안 고프고? 뭐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이미지 관리하긴 이미 늦었다니까?”

“하하. 언제나 사랑하는 우리 동생 지석이…… 조은 믈흘 때 입 다믈자.”

다정하게 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른 지세. 소름 돋는다는 듯 파르르 떠는 지석을 무시하며 그녀는 하빈과 아헤자르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먹고 싶은 메뉴 이야기해!”

하빈은 사양하지 않았다.

“음, 그럼 나는 치즈케이크.”

* * *

쪼르륵.

눈앞에 놓인 오렌지주스와 먹음직스럽게 잘린 치즈케이크.

하빈은 맞은편에 앉은 금발의 상대를 보며 포크를 들었다.

채지세.

공식적인 국내 랭킹 2위, 세계 랭킹 7위.

한국의 양 날개라 불리는 길드, 칼리고와 솔라리스 중 솔라리스의 대표이자 수장.

여기까지 들으면 누군가는 애매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1위로 랭크된 부문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막을 알면 조금 달라진다.

채지세는 다른 스타 헌터들 중에서도 조금 독특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게이트 사태 전부터 유명인이었다는 점이다.

5년 전, 한국에서 제일가는 명문대인 한국대학교 학생 게시판에는 심심하면 이런 글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기계공학과 채지세님 남친있으신가요?’

‘교양심리학 수요일 듣는 ㅊㅈㅅ! 사귀는 분 있으신가요?!!’

‘지세언니 나랑 결혼해!!!!’

‘기계과에 존예 학우님 한분 계시던데 아시는분....너무 제 이상형이라서....

└ ㅊㅈ세?

└ 채ㅈㅅ잖아 이번에 대학오늘 잡지모델도 했던데

└ ㅊㅈㅅ글 맨날 올라오네 이쯤되면 좀 검색으로 찾아봐라’

한국대 공대 여신으로 입소문을 타다가, 잡지 모델과 인터뷰에 섭외되어 방송도 몇 번 탄 유명인.

빼어난 비주얼로 많은 연예계 기획사들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저는 진심으로 공학자가 꿈이라서 대학에 진학한 거라, 연예계에는 뜻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공학자가 꿈이라며 거절하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꿈도 이루고, 평범히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게이트 사태 이후 그녀가 국내 2위의 SS랭커로 각성하면서부터 그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단독]‘공대여신’ 채지세, 국내 최초 SS랭커로 각성…… 강태서를 잇는 ‘국내 2위’?

-각성자가 된 채지세, 오늘 단독 기자회견 예정…… 네티즌 반응 ‘놀라워’

현재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 하면 당연히 ‘강태서’를 꼽는다. 현 국내 1위, 세계 2위.

그러나 게이트 사태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도 강태서가 국내 1위이자 최초 SSS급으로 대서특필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길드를 창단하거나 국제적인 자리에 나서기엔 한계가 있었다.

당시의 태서는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으로는 15살, 미성년자의 신분.

랭크만 보고 전장의 선두로 내세웠다간 오히려 국제적으로 청소년 학대라고 비난을 받을, 어린 소년의 이미지.

국제기관의 공식 자리에 대표로 내세우기에도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쉽지만, 강태서는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써서는 안 될 카드입니다. 아직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보호해 주어야 하는 미성년자니까요.’

‘아직 사회 경험이 적다고 무시를 당할 겁니다.’

‘맞습니다. 특히 외교적 자리에 대표로 나가기에는…….’

정치계 인사들의 탐탁지 않은 시선. 그리고 한국을 대표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까지. 17살짜리 소년이 짊어지기엔 무리가 컸다.

그래서 강태서 대신 모든 책임과 가시방석을 짊어지게 된 건, 당시 국내 랭킹 2위의 ‘어른’ 채지세였다.

‘채지세도 엄밀히 말하면 갓 어른이 된 사회 초년생인데.’

‘그럼 얼굴마담이나 시키죠.’

‘강태서를 앞세우면 아동학대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채지세는 아니니까.’

초기의 헌터협회는 채지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랭킹 1위 강태서.(미성년자)

랭킹 3위 채지석.(미성년자).

랭킹 2위 채지세.(성인)

헌터협회에게 채지세는 그저, ‘성인이라서 별 탈 없이 내세우기 좋은 헌터’ 정도였다.

딱 이 정도의 기대와 함께, 헌터협회는 형식적으로 그녀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 한국헌터협회의 친선대사, 홍보대사 등등의 역할을 모두 맡겼다.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채지세도 이런 정황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기자회견에서의 채지세는 담담했다. 게이트 사태에 부모님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잘 다니고 있었던 대학을 급하게 졸업해야 한다는 사실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조용한 각오였다.

하지만.

반전은, 그녀의 이후 행보부터 시작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채지세는 일을 잘했다.

그것도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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