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각자의 추정 (1)
‘분명 뭔가 있는데……. 언제까지 숨길 수 있나 보자.’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채지석.
“아, 아무튼 틴트 맞다고. 나는 머리에 틴트 바르는 게 취향이라고.”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는 하빈.
그 둘의 기나긴 대치 끝에, 답답해진 채지석은 조용히 있는 아헤자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헤자르 님도 왜 아까부터 말이 없으십니까? 뭐라고 말씀 해보시죠! 정말 현하빈 여기 얌전히 있었어요?”
[그건…….]
머뭇거리는 아헤자르에게, 하빈은 친절하게 조언했다.
‘잘잘아, 잘 대답하자. 잘못 대답하면 당장 카카페 어플 삭제 들어간다!’
[아, 아무 일도 없었느니라! 우리는 정말로 얌전히! 이곳에 있었다! 마왕이든 몬스터든 코빼기도 못 봤다!]
“마왕이요? 여기 보스 마왕인 거 알고 있으셨습니까?”
‘아오, 김잘잘…….’
하빈이 재빨리 수습했다.
“물론이지! 우리도 공략조 회의하는 건 들었거든!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일단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그건 그렇지…….”
어쨌든 그들은 낭떠러지를 거슬러 킬스크린 입구로 올라왔다.
“부길마님! 돌아오셨군요!”
“괜찮으십니까?”
“옆에 있는 신입은?”
채지석은 흘깃 하빈을 돌아보았다.
아마 현하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쌩쌩하고 튼튼한 인간일 것이다.
채지석이 안도가 섞인 한숨을 쉬었다.
“보다시피 무사합니다…….”
그가 작게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하빈이 더 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에구. 너무 높은 데서 떨어졌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파요, 아야야.”
“……?”
채지석이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뭐야? 너 멀쩡했잖아? 왜 갑자기 꾀병을?’
채지석은 하빈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에서 이미 다 확인했으니까.
틴트(?)가 머리에 묻은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가까이 있는 채지석이 황급히 상태를 다시 체크했지만, 여전히 그녀에겐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하빈의 꾀병에 다른 길드원들은 깜빡 속았다.
“저런, 혼자 그 어두운 곳에 있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친 데는 더 없어요?”
하빈은 처연하게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마침 떨어졌을 때, 인벤토리에 포션이 있었거든요. 만일 그것마저 없었으면…… 전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이구, 아찔했겠네!”
“쯧, 이래서 어린 신입은 함부로 데려오면 안 된다니까!”
“으윽, 지금도 기분 탓인지 여기저기가 아프네요. 포션을 썼는데도 몸이 놀랬나 봐요.”
창백하게 질린 표정, 비틀거리는 척 채지석을 붙드는 자연스러운 제스처까지.
그야말로 당장 레드카펫을 밟아도 될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왜 이러는 건데! 너 멀쩡하잖아!’
그 실체를 아는 채지석만 표정 관리를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의혹과 안타까움의 시선 속. 열심히 자신의 꾀병을 널리널리 알린 하빈이 마침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몸이 안 좋은 저는, 먼저 집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랬다.
갑작스런 하빈이 꾀병을 부린 이유. 이 꾀병의 진정한 목적은 단 하나였다.
빠른 귀가!
‘……설마!’
이 자리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사람, 채지석.
그는 그 순간, 하빈이 왜 갑자기 꾀병을 부렸는지 알아채고 말았다.
“……야, 현하빈! 너 제대로 설명 안 하고 그냥 집에 가려고 그러지!”
“…….”
하빈은 대답하지 않고 채지석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것으로 채지석은 확신했다.
“맞잖아……!”
“아닌데.”
“맞잖아! 방금 눈 피했잖아!”
“……아야, 다리를 삐끗했나, 지금 생각하니 여기도 아픈 것 같고…….”
채지석의 촉은 정확했다.
평소처럼 단둘이 있었다면 하빈도 졌다는 듯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하빈을 추궁하는 채지석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지적했다.
“아니, 부길마님, 아프다는 사람을 왜 붙잡고 그러세요?”
“부길마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저는!”
“자자, 모두 진정하시고. 저희는 공략 끝난 기념 회식이나 하러 가죠? 한잔합시다!”
“아가씨는 그럼 몸도 안 좋은데 집에 가 봐요. 우린 회식이라도 해야 할 분위기라.”
“부길마님도 이리 오시죠!”
“자, 잠깐!”
이번에도 채지석은 다른 길드원들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점점 멀어지는 채지석이 눈빛으로 외쳤다.
‘너…… 이러려고…… 꾀병을……!’
‘그럼 채씨, 회식도 잘하고 와.’
하빈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채지석에게 인사해 주었다.
손을 흔들면서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던 하빈.
그녀는 재빨리 킬스크린을 빠져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소를 지었다. 채지석도, 길드원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좋아, 됐어! 이제 집에 가면 드라마 본방 시간 딱 맞겠다.”
[쯧쯔. 겨우 그게 목적이었느냐? 언제까지 그런 사소한 것을 위해 힘을 숨기려 드는 것이냐!]
아까 채지석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아헤자르가 뒤늦게 말을 쏟아냈다.
[당당하게 우리의 업적을 말했다면 모두가 우러러 보았을 것이다! 무려 마왕을 물리쳤잖느냐! 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었음을……!]
“잘잘이도 빨리 웹소 봐야지. 밀린 알림 줄줄이 왔던데. ‘지금 바로 다음 편을 감상하세요.’라고.”
[뭐라고?! 다, 당장 폰을 켜보거라!]
탁탁. 하빈이 경쾌한 손놀림으로 웹소설 어플을 켰다. 벌써 해가 저물어 밤이 된 거리. 환하게 밝혀진 핸드폰 불빛이 하빈의 얼굴과 아헤자르를 비추었다.
킬스크린 26층 공략 성공의 날. 앞으로도 인류에게 기념비적인 역사로 남을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다음날.
[킬스크린 26층 공략 성공! 인류가 드디어 이 일을 해내는군요!]
[네, 이번 공략은 칼리고와 솔라리스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한국의 거대 길드, 한국의 양 날개라며 손꼽히던 둘이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더 감회가 새로운 것 같습니다.]
[모든 층을 통틀어 최단 시간 공략이라죠?]
[그렇습니다. 보통 킬스크린 공략에는 최소 사흘에서 길면 한 달까지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몇 시간도 안 되어 공략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보스를 죽이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게 가장 특이한 점이었다던데.]
[처음으로 보스가 50층으로 이동해버린 케이스라면서요?]
[하하, 헌터들이 무서워서 보스가 도망이라도 갔나 보죠?]
탁-
강태서는 보도가 생중계되고 있던 폰을, 거의 집어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칼리고 본부의 길드장 집무실.
방음 아티팩트와 도청 방지 아티팩트, 이외의 온갖 비밀 보호를 위한 아티팩트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한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파헤쳐도, 이상해.”
황마로와 일당들.
다들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모두 정신을 차리자마자 알아서 사표를 쓰겠다, 진심으로 미안했다며 강태서에게 눈물로 사죄했다.
하지만 강태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보스 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정작 보스 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들 묶여서 얻어맞은 채로 쓰러져 있었으며, 보스는 왜 50층으로 가 버린 것인지.
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건……끄으윽!’
‘말할 수 없습니다……!’
‘커어억!’
털썩.
그들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말하게 하자, 아예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손으로 적어 보라거나, 몸짓을 해보라거나, 온갖 방법으로 신문해도 마찬가지였다. 강태서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지?’
길드 내에서 디버프 계열이나 회복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를 데려와 물어보기도 했다.
‘열심히 분석해 봤는데, 아무래도 마왕의 저주로 보입니다. 보스가 마왕이었다면서요? 마왕이 건 것 같은데, 이건 저희도 못 풉니다.’
“마왕이 일부러 저주를 걸었다라.”
굳이 왜?
죽이지도 않고, 저주를 걸고, 비엔나소시지처럼 예쁘게 묶어두기까지 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던 태서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림자 소생>
특정 그림자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소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