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0) (20/268)

020. 친구를 잘 사귀면 인생이 편하다. (1)

“뭐? 낙오자 발생?”

“네, 대기조 중에서 누군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에…….”

앞서 가던 공략조.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빈의 낭떠러지 추락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추락한 사람이, 현하빈이라고?”

선두에 있던 강태서가 재차 정보를 확인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채지석이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현하빈?’

그 외에도 의아한 듯 몇몇 인원이 웅성댔다.

그중 일부는 비아냥거렸다.

“거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고 있어도 되는 구역이잖아? 거기서 떨어졌다니?”

“이래서 신입은 함부로 데려오면 안 돼.”

그리고 일부는 걱정했다.

“괜찮을까요?”

“비각성자라면 모를까, B급 이상은 낙하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포션을 챙겼다면요.”

“그럼 다행이지만…….”

수많은 추측 속, 비아냥과 염려가 뒤섞인 그 사이.

현하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채지석만이 달리 생각했다.

‘새로운 방식의 땡땡이인가?’

걱정도 안 됐다. 그 정도 낭떠러지쯤은 현하빈에겐 계단 한 칸 정도겠지.

‘근데 왜 떨어진 거야? 입구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있을 텐데.’

심심했나?

“…….”

도무지 평범한 상식으로는 그녀의 의도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채지석이 생각에 잠긴 사이, 다른 사람들의 결론이 나왔다.

“일단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갑시다.”

“원래 공략 종료 전까지는 낙오자 안 데려간다고 공지했으니, 어쩔 수 없지.”

“어설프게 구하러 가다가 더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되잖아?”

모두 납득이 되는 의견이었다. 다들 다시 원래대로 자세를 잡았다.

한 사람만 빼고.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잠자코 있던 칼리고의 간부 중 한 명, 황마루는 몰래 비웃음을 머금었다.

황마로.

국내 랭킹 6위.

칼리고의 고위 간부인 그였지만. 그는 항상 불만이 많았다. 길드장인 강태서의 행보가 항상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렇다. 현하빈이라는 신입을 왜 굳이 데려온단 말인가?

‘지 친구라는 이유로 막 던전에 데려오다니. 이게 무슨 소꿉놀이도 아니고. 쯧쯧.’

이런 녀석한테 우리나라의 미래를 맡기는 1위 헌터 칭호를 붙였단 말인가?

‘하지만 저 기세등등한 꼴도, 오늘로 끝이다.’

황마로는 씨익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모두 황마로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었다.

‘칼리고에서 강태서를 몰아내자!’

강태서는 대중적으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과 팬들이 지지하는 인기일 뿐.

차갑고 날 선 분위기 때문에 ‘싸가지가 없어 보인다’며 싫어하는 안티들도 꽤 있었다.

특히 황마로는 국내 랭킹 6위의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강태서의 아래에서 구르는 게 불만이었다.

‘내가 저 애새끼 밑에서 몇 년을 굴렀는지……!’

황마로는 원래 길드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길드를 만들기에는 칼리고와 솔라리스의 양강체제가 너무 탄탄하니 끼어들 틈이 없었다.

랭킹 1위의 길드(칼리고)와 랭킹 2위의 길드(솔라리스)가 워낙 빵빵한데, 그 사이에서 랭킹 6위가 혼자 길드를 만들고 ‘저희 길드 와주세요!’ 한다고 승산이 있겠는가?

그래서 황마로는 처음부터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칼리고에 들어가서 설설 기는 척하다가, 기회 봐서 내가 칼리고를 싹 먹어버리자.’

칼리고의 내부 주요 인사들을 장악해 버리는 작전.

그러면 칼리고가 가지고 있던 명성과 파벌은 그대로 흡수하면서, 길드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이간질과 회유에 능했던 황마로는 그동안 성공적으로 칼리고의 몇몇 인물들을 포섭했다.

다행히 칼리고 내부에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맞아, 강태서. 생긴 것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싸가지가 없어서 영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어린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게 참 뭣 같았어.’

‘황마로 님이 나서주신다면야, 전 찬성이죠.’

‘저희는 황마로 님 편입니다.’

‘그래. 혹시 내가 칼리고의 수장이 된다면 모두에게 큰 자리 하나씩 보장하지!’

‘좋습니다. 그 말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각자의 욕심과 질투를 담고, 결국 결성된 ‘강태서 안티 파벌’.

그 수장인 황마로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강태서.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내가 칼리고를 접수하고 너를 엿 먹이는 날!’

황마로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태서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지금 킬스크린에 온 칼리고 길드원은 모두 황마로가 모은 강태서 안티 세력들이었다.

‘멍청하긴.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우릴 데려오다니.’

황마로는 흡족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킬스크린이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고난도의 던전.

게다가 킬스크린 내부에는 안전지역도, 경찰도, CCTV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 일어난 일은 바깥에서도 손쓸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태서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황마로는 다 계획이 있었다.

어차피 강태서와는 일대일이든 일대 다든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이곳의 보스 손을 빌린다.’

보스 룸에 도착하면, 일부러 강태서 혼자만 들여보낼 것이다.

‘아무리 강태서라 해도, 혼자서 26층 보스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흐흐.’

그럼 보스가 알아서 강태서를 죽여 버리겠지?

‘남은 우리는 길드장을 잃어서 슬픈 척하며 돌아가면 될 테고.’

완벽하다. 완벽해.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며 황마로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몰래 숨겼다.

* * *

한편, 하빈이 있던 던전 보스 룸.

그곳엔 이미 처참하게 쓰러진 마수들과 부서진 던전의 장식들. 두 동강이 난 촛대와 벽의 파편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반파된 방 안.

그 사이에서 하빈은 기절해 있는 마왕 크릭샤를 콕콕 찔렀다.

“야야, 보스야, 일어나봐.”

“끄으…….”

크릭샤가 힘겹게 눈을 떴다. 퉤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그가 핏발 선 눈으로 하빈을 쏘아보았다.

“으으…… 내 이름은 보스가 아니라, 마왕 크릭샤다!”

“그래, 마왕 크릭샤야.”

이름 진짜 이상하네. 뭔 호칭을 이름 앞에 또 붙인대. 하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크릭샤가 발끈했다.

“……이름은 마왕 떼고 그냥 크릭샤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하빈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무척 멋진 이름인걸?”

“대체 네놈은 뭐냐!”

크릭샤가 기가 막혀 소리쳤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다시 되짚어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마왕의 정예 군단이 이 인간 하나에 나가떨어졌다니,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크릭샤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아니, 넌 애초에 인간이 맞기는 하냐?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나? 도대체 넌 어디서 온 누구…….”

기가 막힌 듯 말을 쏟아내던 크릭샤는 하빈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여전히 아헤자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뭐? 계속해봐.”

“그게…….”

크릭샤는 문득 방금까지 얻어맞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빈이 들고 있던 철검.

‘베인 것도 아니고, 칼등으로 그냥 맞기만 해도 날아가 처박혔지…….’

손쓸 도리조차 없었던 공격의 연속이었다. 그걸 다시 겪는다면,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크릭샤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꼭 설명해야 해?”

“하긴. 굳이 신원을 밝힐 필요는 없으시지요.”

“흠.”

하빈이 털썩, 그나마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래. 말이 잘 통해서 좋네.”

“…….”

“난 태세전환이 빠른 인물들을 정말 좋아해.”

가만히 듣던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태세전환이라. 그건 현하빈 네가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냐?]

“뭐어? 내가 언제 태세전환을 했다고.”

[적어도 내가 본 인물 중에서는 최고니라!]

“에엥. 이래 봬도 나, 아주 대나무처럼 올곧은 사람이야.”

[대나무는……!]

아헤자르가 내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대나무는 유연해서 잘 휜다. 그리고 나무도 아니다. 풀이다.

“대나무는, 뭐?”

[아, 아무것도 아니다. 크흠.]

“싱겁기는.”

흥미를 잃은 하빈이 다시 크릭샤에게 턱짓했다.

“크릭샤야,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여기도 보스를 죽여야 던전 닫히는 거야?”

“히, 히익!”

크릭샤는 놀란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이건 가볍게 던져진 질문이지만, 크릭샤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잘못 대답하면 죽이는 거 아니냐고!’

만약 여기서 해맑게 ‘네! 보스를 죽이면 클리어됩니다!’ 이딴 소리를 했다간. ‘아, 그래?’ 하고 스걱!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베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 인간 여자가 저지른 악행만 봐도……!

크릭샤가 재빨리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오호? 너 죽이면 다 끝난다고?”

“아뇨, 아뇨! 안 죽여도 끝낼 수 있습니다! 제가 항복하고 다른 층으로 물러나면 됩니다!”

퇴각.

잘 쓰이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동안 다른 층으로 도망간 보스는 단 하나도 없었다. 도망갈 틈도 없이 죽거나, 도망갈 능력이 없거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부분.

하지만 크릭샤는 여타 다른 보스와는 달랐다. 그는 자칭 똑똑하고 능력 있는 마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이야말로 마족의 덕목이 아니던가.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멍청이들. 목숨이 제일 중요하거늘. 일단 도망가고,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복수를 해야지!’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그는 하빈 몰래 벌써 50층으로 도망가기 위한 포탈을 캐스팅 중이었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끌자. 포탈만 소환되면 바로 50층으로 도망가는 거야! 후후후.’

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이 인간도 50층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오더라도, 차례대로 올라오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흐흐.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계산을 끝낸 크릭샤가 두 손을 스윽 올렸다. 그걸 본 하빈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그렇게 항복해 버리면. 보상은?”

킬스크린은 각층마다 클리어 보상이 엄청났다. 그걸 노리고 여러 헌터들이 달려드는 것이니까. 아마 이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상…… 드릴까요?”

크릭샤가 물었다.

‘보상 좀 내놓는 정도야 괜찮지. 내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크릭샤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어차피 죽는 것보다 좋은 물건 몇 개 주고 목숨 부지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다.

곧 그들의 눈앞에 촤르륵 아이템이 나타났다. 26층을 클리어하면 얻게 되었을, 마왕의 희귀한 아이템들.

“골라보시죠.”

갑옷, 검, 보석, 목걸이……. 각양각색의 아이템을 하빈은 슬쩍 살펴보았다.

[견고한 자만]

등급 : 전설

효과: 방어력 +50

(주의: 착용 시 사용자의 판단력을 일부 떨어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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