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2) (12/268)

012. 철학과가 취업을 가장 잘 하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입니다.

“잘잘아, 너 또 내 캐시로 웹소 질렀지?”

[아, 아니다.]

“기회 줄 때 똑바로 불러라. 지금 충전 내역 확인 들어가고요…….”

[아, 아니, 아니다! 이번에는 안 질렀다!]

“어쭈?”

하빈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은?

방금 이번이라고 했냐?

“……딱 걸렸어, 김잘잘.”

사과컴으로 영상을 재생하던 하빈이 발을 쭉 뻗어 옆에 있는 검을 야무지게 밟았다.

콱!

“야, 그럼 예전엔 썼냐? 내 소듕한 캐시를 말없이 썼단 말이지? 내 사랑하는! 오빠가! 준 돈이라서 나도 정말 아껴 쓰고 있는데.”

[그, 미안하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허락을 받고 보겠다. 근데 언제부터 현시우를 그렇게 애틋하게 불렀느냐?]

“…….”

반창회는 점심 약속.

하빈은 아침 겸 브런치 겸 에피타이저(?)라며 채지석이 가져온 염단 돈가스를 행복하게 받아들었다.

물론 값은 철저하게 치렀다. 어쩌다 보니 하빈의 맞은편에서 같이 돈가스를 먹게 된 채지석은 하빈과 아헤자르의 대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성좌가 웹소설을 본다고……?’

당황스러워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채지석은 그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고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이건 진짜 엄청난 사실인데.’

직접 캐시를 지르고, 웹소설을 본다. 그건 ‘아헤자르’가 실질적으로 이 세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

물론, 그것을 해내는 성좌도 분명 있다. ‘폴터가이스트’처럼 물건을 움직이거나, ‘아헤자르’처럼 대화체로 말을 걸거나.

그러나 그런 성좌들은 전부 격이 높지 않다. 하급 정령이나 유령들은 ‘저쪽’이 아닌 ‘이쪽’에 머무는 작은 존재들이라서 물건을 움직이거나 대화체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격 자체가 낮아 힘이 약하다. 애초에 성좌로 분류되기조차 미미한 존재들.

진짜 강한 성좌는 아예 한 단계 위의 차원에 존재한다.

그것 때문에, 격이 높은 성좌일수록 제약이 많이 걸린다.

대화조차도 간접 메시지로 하는 게 전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바로 이렇게.

손에 꼽는 강한 성좌인 ‘가장 가까운 빛’의 경우 간접 메시지가 전부이다. 아니, 이렇게 메시지조차 못 던지는 성좌들도 있다.

하지만 채지석이 예지력까지 써서 확인했던 아헤자르의 수준은…… 판정 불가에 스킬 실패까지 뜰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

격이 아득하게 높은데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물리력 행사와 대화가 모두 가능한 성좌라고?

“그런 건 진짜…… 처음인데.”

세계 랭킹 1위인 ‘피데스’의 ‘네아이바’가 혹 그런 종류가 아닌가 의혹을 잠깐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의혹에만 그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쪽은, 진짜다.’

채지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헤자르 쪽을 흘깃 보았다. 캐시 질렀다고 혼난 아헤자르는 잔뜩 풀이 죽어서는 연수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검의 앞에 놓인 책이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도 알아서 페이지가 넘어가는 모습.

‘이건……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여파가 장난 아니겠는데.’

애초에 하빈의 모든 구석이 다 그랬지만 말이다.

채지석은 약속대로 비밀을 지켜야겠다 생각하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오호, 아주 흥미로운 책이군. 이곳의 인간들은 어떻게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었지?]

채지석이 놀라고 있을 그 시각, 아헤자르는 또 한 번 감탄하며 책을 보고 있었다.

연수원에서 빌린 책은 헌터물 웹소설의 단행본이었다. 하빈을 조르고 졸라 빌려오게 시킨 것들.

이상하게도 아헤자르는 하빈의 기억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물과 환경을 파악하는 데 유독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아헤자르는 열심히 하빈이 보는 영상도 함께 시청하고, 책도 빌려 읽고 있었다.

[모두 흥미롭긴 했다만…….]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건 역시…….

헌터물!

게이트가 열리고, 헌터들이 나타나 싸우고, 지금의 사태와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들. 그러나 엄연히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에 발매된 창작물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정확히 예언했단 말인가?]

아헤자르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것을 들은 채지석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도 처음 게이트 사태가 터졌을 때, 다들 헌터물 장르의 작품들이 현실에 실현되었다며 난리도 아니었죠.”

지석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사태 이후 헌터물은 말 그대로 핫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각국의 전문가들이 모두 나서서 외쳤다.

‘우린, 헌터물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이건…… 거의 우리의 상황을 예언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전 세계는 앞다투어 한국의 헌터물 웹소들을 번역해서 수입했다. 덕분에 카카페 같은 웹소설 플랫폼들은 그야말로 글로벌하게 대박을 쳤다.

제일 잘 팔린 한국 헌터물은 기어코, 세계에서 많이 팔린 전자책 기네스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했다.

-[단독]한국의 예언서들! 과연 어디까지 예지한 것인가!

-[오늘의 해외뉴스]헌터물을 기반으로, 헌터 협회를 창립하기로 국제 회의에서 뜻을 모아…….

게이트 사태로 휘청이던 대한민국의 경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헌터물 수출 덕에 반쯤 부활했다.

-[인터뷰] 대통령 오찬 발언 ‘헌터물이 나라를 구한다.’ ……네티즌 반응, ‘이게 실화냐.’

지금도 헌터물은 전 세계적 필수 도서로 꼽히는 중이었다. 연수원에 헌터물 웹소가 주요 교재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을 만큼.

[그렇다. 아주 유익했다.]

“그래그래, 잘잘이가 헌터물 읽는 건 나도 이해해 줄 수 있지. 세계적인 필수 교재인걸. 그럼.”

캐시 결제 내역을 확인하던 하빈이 따뜻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근데…….”

“근데?”

“로판은 왜 읽었냐?”

[…….]

“…….”

정적.

이어지는 싸늘한 침묵.

하빈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현판이나 현대 로맨스면 이해를 해줄 수 있어. 잘잘이가 현대의 사회생활이나 인간들의 남녀관계가 궁금했구나, 하고 납득을 하겠지. 그렇지?”

하빈이 자비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로판은?”

[…….]

“로판은 우리 세계 이해하는 용도도 아니고, 어? 심지어 이건 정통 로판들이야! ‘황제를 길들이다가 때려쳤습니다. 부제: 인간이 할 짓이 아님.’ 이건 뭐야? 이 작품은 왜 이렇게 많이 읽었지……?”

[그, 크흠.]

찔린 듯 헛기침을 하던 아헤자르가 머뭇머뭇 바른대로 고했다.

[……그 배경이, 내가 과거에 살던 곳이 생각나서…….]

너무나도 슬프고 서러운 목소리였다. 아마도 아우라이던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

‘과거?’

채지석은 흠칫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하빈은 살짝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잘잘이, 너 설마…….”

[…….]

“우냐?”

[…….]

“야야, 뭘 그런…… 야, 미안하다……. 그런 이유였으면 로판 마음껏 봐라……. 한 달에 몇만 원까진 내가 써줄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하빈의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던 듯, 하빈이 밟고 있던 발을 떼고서 검을 토닥여 주었다.

토닥토닥.

[…….]

“음…… 저는 사정을 잘 모르지만…… 힘내세요. 정 급하시면 저라도 계정 빌려드리겠습니다.”

곁에 있던 채지석도 덩달아 아헤자르를 위로했다. 토닥토닥.

작은 방 안에 훈훈한 위로의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그, 그래도 앞으로는 꼭 허락 맡고 보겠다.]

아헤자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약속했다.

* * *

1학년 7반 반창회.

벌써 5년째 모임이지만 만나는 곳은 늘상 같았다.

학교 근처의 고깃집. 계란후라이와 라면, 김치전을 셀프로 먹을 수 있는 리필 바가 있어서 애용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5년이 지났다 해도 기껏해야 20대 초의 대학생들.

부모님 용돈이나 알바비로 생활하는 그들은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빈을 비롯해 아직 참석하지 않은 인원이 많았지만, 일찍 온 몇몇은 먼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반장이 입을 열었다.

“너네, 그 동안 잘 지냈냐?”

“잘 지냈지.”

“넌 공대 갔다더니, 취업길 보이냐?”

“취업? 하…… 게이트 터지고 공대 취업도 많이 죽었잖아.”

“난 약대 왔는데 자퇴각이다.”

구석에 앉은 한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의 권유로 꾸역꾸역 약대에 진학했는데, 요즘은 포션의 시대가 되어서 약대의 위상이 많이 죽었단다.

곁에 있던 다른 친구가 어깨를 토닥였다.

“야, 나만 하겠냐? 난 뼈 빠지게 고생해서 의대 왔는데 힐러들한테 자리 뺏김.”

여기저기서 와하하 웃었다.

“세상에. 의대랑 약대가 취업 걱정을 하는 날이 오다니.”

“문과는? 문과는 괜찮냐?”

“문송하다. 치킨 튀기는 법 연구하는 중이다. 헌터의 세상이 되어도 치킨은 시켜 먹겠지.”

“치느님은 진리니까.”

평온한 표정의 문과생이 웃음을 지었다.

“나의 철학을 담아 치킨을 튀기겠어!”

“그러려고 철학과 복전했냐…….”

“난 심리학을 담은 떡볶이를 만들게. 같이 창업하자.”

왁자지껄한 술자리. 짠, 하고 소주잔이 부딪혔다. 그 사이에 있던 건축학과생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우린 취업길 짱짱해! 요즘은 건물을 새로 많이 짓는다더라.”

“그거 몬스터가 다 부숴서 그런 거잖아! 좋아하면 안 되지!”

“이런 이기적인 새끼를 보았나?”

주변의 몇몇이 장난삼아 건축학과생의 등짝을 때렸다.

“야 그래도…….”

떠드는 와중 누군가가 한마디를 던졌다.

“역시 요즘은 헌터가 제일 잘 벌지.”

“…….”

잠깐의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 약간의 부러움을 담아 말을 꺼낸 사람을 쳐다보았다.

박민수.

강태서를 제외한 1학년 7반의 유일한 헌터.

게이트 사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한 민수는 요즘도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는 매년 반창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자신의 재력과 잘나감을 뽐냈다.

그에 대한 동기들의 반응은,

‘지 입으로 헌터가 제일 잘나간다고 한 거야, 지금?’

‘강태서에 비하면 쨉도 안 되는 게.’

‘헌터가 제일 잘나가는 건 맞지만…… 아오, 저 새낀 C급이잖아. 진짜 잘나가는 중이라 더 열 받네.’

“그렇네, 민수 넌 요즘 어떻게 사냐?”

총무 안세원이 물었다. 민수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신나서 말을 꺼냈다.

“아 이번에 솔라리스에 경력직으로 지원해 봤는데…….”

“솔라리스!”

“헉, 진짜 솔라리스?”

“말로만 듣던…….”

테이블은 경악과 동요가 가득했다.

누구나 꿈꾸는 신의 직장, 솔라리스. 비각성자들에게도 그곳은 사무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꿈일 정도로 선망의 기업이었다. 다른 학생이 재빨리 물었다.

“야, 그래서 붙었어?”

“아직 발표는 안 났지만, 뭐.”

민수가 말끝을 흐렸다. 합격할 자신은 없었지만, 괜히 허세를 부리는 중이었다. 혹시나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착실하게 밑밥까지 깔았다.

“그냥 합격해도 안 갈까도 생각 중이고. 뭐, 그렇지.”

“그렇구나. 좋겠네.”

“그래, 야, 좋겠다.”

민수는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만끽했다. 그러다 흥분했는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이야기를 던졌다.

“……에이, 얘들아. 취업 안 되어도 너무 걱정하고 그러지 마. 그 뭐냐, 요즘은 게이트 때문에 자퇴하고 대학도 못 간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동기들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강태서를 제외하고, 아예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들은 유일한 한 사람.

“……하빈이었나, 걔는 요즘 어떻게 산대?”

“아직도 알바하고 다니려나?”

“몰라, 연락이 안 돼서.”

“게이트 전에는 공부도 좀 하던 애 아니었나? 난 걔가 나중에 잘 될 줄 알았는데.”

미묘한 동정과 안타까움이 섞인 수군거림. 진짜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걸 듣던 안세원이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야, 근데 이번에…….”

하빈이도 온다고 했는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입구에 가까운 쪽 테이블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

세원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충 말린 듯 부스스한 생머리와 야무지게 갖춰 입은 캐주얼한 후드 집업.

오랜만에 보는데도 하나도 안 변한 얼굴이었다.

현하빈이다.

그대로 서 있던 하빈이 한쪽 손을 팩 들었다.

“롱 타임 노 씨.”

“현하빈!”

“하빈아?”

“하빈이 온 거야?”

“…….”

하빈은 무수한 당황의 시선을 한쪽 손을 흔드는 것으로 받아준 뒤, 척척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옆자리 친구에게 물었다.

“고기 남았냐?”

“……어, 한 번 더 시켰어.”

“나이스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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