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기만의 수호자
‘말도 안 돼…….’
채지석은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런 레이드가 가능하긴 한 건가?
스스스스슥-
가히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하빈이 첫 일격을 날리고 난 이후, 몬스터의 구름 떼는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연필로 그린 그림을 커다란 지우개로 슥슥 지워 나가는 것처럼 보일 만큼.
심지어 그의 눈으로도 좇을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랭커인 채지석의 동체시력인데도.
‘저 정도면 국내, 아니, 세계 최상급 랭커랑 비교해도…….’
……아니, 아니다.
그는 아예 비교하기를 그만두었다. 이건 애초에 감히 이 지구상에 있는 랭커들과 같은 선상에 둘 수가 없는 실력이다.
“…….”
긴장으로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우선, 하빈이 들고 다니던 저 철검.
연수원 입소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분명 평범하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꿰뚫는 눈>으로도 아무런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앞서 몬스터의 체력 게이지를 보았던 이 특수 스킬은, 몬스터와 아이템이 가진 특징이나 이면을 볼 수 있었다. 우선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고.
혹시나 싶어, 추가로 그만이 가진 비장의 희귀 스킬을 썼을 땐,
[스킬 적용에 실패하였습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사그라듭니다.]
‘뭐, 뭐라고?’
스킬이 산산이 부서져 실패함은 물론, 그의 성좌까지도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 어쩌면 그의 성좌를 아득히 상회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 외에는.
……게다가 현하빈은 어떤가.
항상 잘 숨기고 있다지만, 언뜻 보이는 기세는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는 눈빛이나, 드라마 보면서 혼자 쿡쿡 웃는 모습은 그저 영락없는 땡땡이 연수생, 그 또래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는데. 대체 어떻게 저런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
“그러고 보면, 그동안 땡땡이를 치던 것도 묘한 구석이 있었지. 딱 재연수를 면할 정도로 맞추어서…….”
바로 그 시각, 놀라고 있는 것은 채지석뿐이 아니었다.
[아니, 언제 내 스킬을 이렇게나……!]
아헤자르도 당황하고 있었다.
춤추듯이 펼쳐지는 강력한 검격. 지금 하빈이 사용하는 수많은 스킬들은 모두 <무신의 부활> 특성으로 가져온 아헤자르의 기술들.
초 단위로 미친 듯이 뒤바뀌는 스킬 적용과 현란하게 펼쳐지는 보법. 그 사이에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어, 언제 내 스킬을 다 분석하고 쓰는 것이냐?]
마구잡이로 쓴다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이래 봬도 전무후무의 무신으로 불리었던 아헤자르다. 대충 보아도 이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쓴 기술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하빈은,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다. 다른 누가 와도, 아헤자르 본인의 스킬을 이보다 더 탈탈 털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잘잘아, 지금 한시가 바쁜데 떠들지 말자.”
[아, 아니 그렇지만!]
“저번에 힘 숨길 때도 내가 찾아봤잖니, 네 스킬들.”
[말도 안 된다! 겨우 그것만 보고 어떻게!]
슈아악!
마저 몬스터를 베어내던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정말 귀찮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잘잘아, 아무리 궁금한 게 있어도, 꼭 지금 물어야 할까? 몬스터들 한가운데에서? 우리 때와 장소를 가리며 살자?”
하빈의 일침에, 아헤자르는 어쩔 수 없이 입을 합 다물었다.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빈은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해치웠다.
정말로 간단하고 빠른 클리어였다. 보스 몬스터는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용’이었는데, 이곳이 고작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경악할 일이었다.
‘무, 무슨 용이 나와? 이건 SS급 던전에서도 못 본 건데!’
그것을 보고 놀란 채지석과 달리, 하빈은 “가지가지 하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슥삭, 베어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스릉.
유일한 목격자인, 채지석에게,
하빈이 칼을 겨누었다.
“…….”
꿀꺽 침을 삼키는 지석. 하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너무 많은 걸 본 것 같아서. 본인도 알고 있지?”
“…….”
대답 없이 채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흩날리는 몬스터의 잿가루 속, 비장한 얼굴의 두 사람.
지석은 또 한 번 이대로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잠깐! 잠깐, 잠깐 멈추거라!]
바로 그때였다. 아헤자르가 급히 끼어들었다.
[지, 진짜로, 진짜로 죽일 것이냐?]
“…….”
[그래도…… 저 인간은 돈가스도 줬고…… 아까 너를 지키려는 마음도 있었고…….]
아헤자르가 왱알왱알 열심히 변호했다. 원래 이렇게 정이 많은 성격이었나? 의외의 반응에 하빈이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주, 죽이지는 말자! 너무하지 않은가! 좋은 인간인 것 같은데!]
하빈이 별 반응이 없자, 아헤자르가 다급한 마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채지석이 그 말을 들은 듯 눈이 커졌다.
“방금 그거, 혹시 성좌…….”
뜨끔.
“…….”
하빈이 식은땀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아헤자르가 못을 박았다.
[……아, 아니다!]
“야! 그걸 네 입으로 아니라고 하면 어떡해!”
[…….]
정적.
일단 아헤자르와 하빈은 최대한 수습을 해보기로 했다.
[서, 성좌가 아니라 그 하급 정령……. 검의 수호…… 정령……!]
“인공지능…… 그 사과폰 세리 같은 거……!”
하지만 합이 맞지 않아, 장렬하게 실패.
‘성좌가 맞구나.’
채지석이 슬쩍 눈을 피하며 생각했다. 하빈이 포기한 듯 소리쳤다.
“아이씨, 김잘잘! 너 조용히 하랬지……! 다른 인간한테 말 안 들리게!”
[허, 허업.]
하빈이 재차 칼을 채지석에게 겨누었다. 그녀가 아까보다 더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크, 큰일이군. 채지석, 넌 알아선 안 될 비밀을 방금 또 알아 버렸다.”
“…….”
[미안하다! 미안하다, 채지석아!]
하빈은 한숨을 쉬고, 아헤자르는 다급히 사죄하고 있고.
……그야말로 혼돈과 혼란의 도가니.
채지석은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검을 한 번 곁눈질했다.
“……그래, 알겠어.”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하빈이 힘을 드러낼 때부터 그가 곱게 살아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 채지석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하빈, 역시 네가 ‘기만의 수호자’였던 거지?”
“……!”
그 말에 하빈의 움직임이 멎었다.
‘……내 직업명을 어떻게 알았지?’
기만의 수호자.
그건 하빈이 숨겨놓은 직업명이었다. ‘마검사’로 위장해서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텐데.
그녀가 대답이 없자 지석이 말을 이었다.
“대답이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돼. 내 예상이 맞다면…… 넌 위험에 처해 있다.”
하빈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지석이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SS급 이상의 랭커들에게 모두 ‘기만의 수호자’를 처치하라는 퀘스트가 내려져 있어.”
‘뭐?’
[뭐라고?]
기만의 수호자 처치 퀘스트.
만약 저게 진실이라면, 하빈을 죽이려는 노골적인 암시이다.
기만의 수호자라는 괴상한 직업이 하빈 말고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나도 동의한다. 애초에 금지된 루트가 아니고서야 얻을 수 없는 직업.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또 있지는 않을 거다.]
즉, 하빈을 죽이라는 퀘스트.
‘설마…… 관리자를 적대한 것과 연관이 있나?’
하빈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지석이 이어 말했다.
“우리 ‘솔라리스’는 퀘스트를 반대하는 입장이야.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공식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어.”
“…….”
“내가 멘토로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영입이 아니라 보호의 목적으로 접근했었지.”
“보호……?”
[보호……?]
그 말에 웬일로 하빈과 아헤자르가 이구동성으로 어이없는 물음을 흘렸다.
[보호라…….]
“보호…….”
으음.
하빈이 천천히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 시체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진지한 와중에 미안한데, 여기서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거지?”
“…….”
“님이…… 나를?”
하빈이 삐걱삐걱 손가락으로 채지석과 자신을 가리켰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 진심이 담긴 이해 불가.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건 조금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반대로 내가 님을 보호한다면 모를까…….”
[그렇다! 차라리 인간들이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생쥐가 고양이를 보호한다는 말을 믿겠다!]
아헤자르도 격하게 동의했다.
“…….”
휘이잉-
평화로운 정적. 그들 사이로 몬스터 사체가 남긴 재가 굴러다녔다.
쓸려버린 몬스터들의 사체들을 둘러보던 채지석이 혼자서 침음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건 채지석이 아니라 하빈이었고, 오늘 그를 구해 준 것도…… 하빈이었다.
“……이건, 진짜로 할 말이 없긴 하네.”
체념한 듯 하하 헛웃음을 지은 채지석이 푹 고개를 떨구었다.
* * *
하빈이 몬스터를 너무 빨리 쓸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겐 30분 정도 여유 시간이 남았다.
아직 던전을 나서지 않은 둘.
하빈은 목격자인 채지석을 일단 꽁꽁 묶어 놓은 뒤, 아헤자르를 먼저 추궁했다.
“잘잘아, 너도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 하지 마라. 내가 분명 말했었지,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들리게 하라고.”
아헤자르가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채지석도 아헤자르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셈이다. 아헤자르가 다급히 반박했다.
[그, 그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성좌가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실수할 수도 있고……!]
“뭐어?”
그딴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하빈이 한심하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어휴, 김잘잘……. 넌 이미 마리아나 해구 적립이야. 혹시 성좌는 기억력이 없나? 왜 자꾸 다른 사람만 보면 말을 걸고 싶어하지?”
[아, 안 된다! 미안하다! 마리아나 만큼은!]
하빈이 땡강, 하고 검을 바위에 내리치자, 아헤자르가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묶여 있던 채지석이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리아나? 저건 또 무슨 대화야……?’
아까부터 하빈과 아헤자르는 그들끼리 쑥덕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빈이 아헤자르를 갈구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 대화를 듣던 채지석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예전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
‘거기 자리 있는데.’
‘거긴 내 친구, 김잘잘의 자리임.’
‘설마, 하빈이 친구라고 둘러대던 김잘잘이 저 검이었나?!’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채지석의 입꼬리가 웃음을 못 참고 씰룩였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김잘잘이 진짜 존재했다니. 게다가 성좌였을 줄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우린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다그칩니다.]
‘그렇긴 하죠.’
숨죽여 웃던 지석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웃고 싶지 않은데, 솔직히 참기 힘들었다.
“야야, 이제 저 인간 심문해야 돼. 잘잘이는 조용히 해봐.”
“……크흡.”
하빈과 아헤자르의 대화가 문제였다. 대체 누가 성좌를 저런 식으로 다룬단 말인가.
이상하게 웃지 말자고 생각하니 괜히 더 웃겼다.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상황. 채지석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와중에 결국 그의 심문 시간이 돌아왔다.
“……자, 채씨. 이제 그쪽도 똑바로 말해야 할 거야.”
흠흠,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하빈이 건들건들 칼끝을 채지석의 목에 겨누었다.
“내가 ‘기만의 수호자’인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
가벼운 말투와 달리 형형하게 쏘아보는 눈빛.
이 앞에서 얄팍한 거짓말 따위가 통할 리 없다.
채지석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그와 그의 누나, 단둘밖에 모르는 능력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손을 풀어줘. 보여줄 게 있어.”
그가 졌다는 듯 말했다.